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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장면 [張勉]한국 정치가

지송나무 2015. 6. 11. 11:20

장면 [張勉]한국 정치가  

 

본관은 옥산(玉山). 호는 운석(雲石).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 1919년 기독교청년회(YMCA) 영어학교, 1925년 미국 맨해튼 가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했다. 1948년 맨해튼 가톨릭대학과 1949년 영국 포덤대학, 1957년 미국 시턴홀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192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 설정을 위한 재단사무를 보는 한편, 메리놀 외방전교회 신부들에게 한국어와 풍습을 가르쳤다. 1927년 평양교구 설정과 함께 평양으로 이주하여 교회일을 돌보았다.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45년 8·15해방이 될 때까지 교육자로 활동했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겨울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UN) 총회에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대한민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 기여했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1949년 초대 주미대사로 부임하여 한미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6·25전쟁 때는 UN과 미국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큰 활약을 했고, 곧이어 1951년 제2대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원내 자유당 인사들이 이승만을 대신할 제2대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면서부터 반(反)이승만 대열에 가담했으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고 추대 움직임이 수포로 돌아감으로써 야인(野人)으로 돌아갔다. 1955년 신익희 등과 민주당을 조직하여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같은 해 민주당의 민주국민당계(구파)를 대표하는 신익희·조병옥과 대비되는 흥사단 중심의 비민주국민당계(신파)의 지도자로 추대되어 민주당의 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년 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되었고, 1960년 조병옥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했다. 같은 해 4·19혁명으로 자유당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을 거쳐 내각책임제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으며 이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정책을 지켜나갔다. 그러나 첨예한 정쟁과 우유부단한 지도력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로 이어지면서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후 정치정화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당했고, 한때 이주당(二主黨)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나, 석방된 후 종교생활에 전념하다가 1966년 간염으로 죽었다.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경기도 포천의 가톨릭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1951년 로마 교황청 훈장을 받았으며, 번역서로 〈교부들의 신앙〉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