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프톨레미아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죠,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남동생인 프톨레미아 13세와 결혼을 했죠.
흔히 왕족끼리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과 결혼을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로마의 위대한 장군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이집트에 와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 되기 위해 카이사르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프톨레미아 13세와 전쟁을 벌여 결국은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 됩니다.
그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인 케사리온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후 카이사르가 부르트스 일당에게 암살당한후 카이사르의 심복인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 진격하던중 클레오파트라와 만났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화가나 이집트에게 전쟁을 선포합니다. 결국 악티온 해전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패배하고 클레오파트라는 그후 자살을 합니다.
양귀비
당나라 현종때의 미녀. 당나라때의 현종은 젊었을때는 무슨 치였는데.. 개황의치인가? 하여간 정치를 잘해서 나라를 부강시켰습니다. 그러나 늘그막에 이림보 라는 말빨 좋은 사람에게 양귀비를 소개 받습니다. 그후 현종은 양귀비를 귀비로 명하고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 후 양씨 가문은 주요 관직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켜 현종이 피난가던중 병사들이 양귀비를 죽이라고 하여 할수 없이 현종은 양귀비에게 자결을 명하여 양귀비는 자살을 하였습니다. (안록산의 난에 의해서 당나라는 점차 기울었죠.)
황진이
조선시대의 유명한 기생이죠. 황진이는 학문, 예술 같은것에 뛰어난 재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예로 황진이는 제주도 지사의 명을 받아 서경덕 선생님을 유혹하라는 명을 받고 서경덕 선생님을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서경덕 선생님은 황진이가 있는듯 없는듯 행동하며 꿈적도 안하여 황진이는 서경덕선생님에게 사죄를 구하며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김개시(金介屎)
광해군 때의 상궁입니다. 이름이 개똥이인데 한자로 써서 개시(介屎)라고 했습니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후궁이 되지 못한 것은 아마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 때부터의 궁녀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궁 신분에 머물렀지만 어쨌든 임금의 총애를 받는
여자이니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죠. 언젠가 어느 드라마에서는 상궁으로서 머리를 올리면서 중전보다 더 큰 가체를 얹었던 걸로 묘사하면서 그녀의 전횡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뇌물 수수, 매관매직... 그러나 광해군이 주지육림에 파묻혀 폭정을 일삼았던 폭군이 아니었던 것처럼
김개시 역시 무조건 사악한 요녀는 아니었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당시 사대부들 마음에 들지 않은 광해군이 폐위될 때 그녀 역시 참수당했습니다.
나합(羅閤)
고종 때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세도가 안동 김씨 가문 아시죠? 그중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김좌근의 소실입니다. 원래는 기생이었죠. 나합이란 건 이름이 아니라 별명입니다. 옛날 합하(閤下)라고 해서, 정1품의 고관들에게만 붙여주는 칭호가 있었습니다. 각하 비슷한 뜻이라고 생각하면 될 겁니다.
그런데 이 기생이 워낙 세도가 당당하여 그 '합'자를 붙여서 합부인이라고 부르게 된 겁니다. 고향이 나주라서 나주 합부인, 줄여서 나합이죠. 일설에는 자기 첩이 너무 설친다는 소문을 들은 김좌근이 "사람들이 너를 나합이라고 부른다며?" 하고 언짢은 듯 웃자,
"합(閤)이 아니라 합(蛤, 조개. 아들을 낳으면 고추고 딸을 낳으면 조개잖아요. 여자를 뜻합니다)자를 붙여서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
라고 변명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우동(於于同)
성종조의 승문원 지사였던 박윤창의 딸로 태어나서 종실 명문인 태강수 이동에게 출가한, 정4품 혜인(惠人)의 품작까지 받은 양반집 여자였습니다. <용재총화>에는 어우동, <실록>에는 어을우동(於乙于同), <송계만록>과 <대동시선>에는 어우동이라 나옵니다.
시댁이 종실이었으니, 족보를 따지면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이자 세종대왕의 바로 위 형님인 효령대군의 손주며느리가 됩니다. 그런데 어우동은 지나치게 색을 밝히는 게 탈이었습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과는 즉석에서 관계를 가졌고, 근친상간도 마다하지 않았다 합니다. 팔촌 시아주버니가
되는 수산수(守山守) 이기, 육촌 시아주버니인 방산수(方山守) 이난 등등. 결국 소박을 맞았는데 소박맞은 다음에는 아예 대놓고 난봉이었죠. 특히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팔뚝이나 몸에 먹물로 자신의 이름을 문신해두기까지 했지요.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서리 감의동은 등판에다가 이름을
새겨 넣었답니다. 어우동의 남성편력에는 병조판서 어유소, 직제학 노공필, 아전 오종연, 과거 합격생 홍찬 등... 줄줄이였죠. 게다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번좌라는 딸까지 낳았다고 합니다. 결국 풍기문란죄로 탄핵되어 처형당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의금부의 문초과정에서 드러난 고위관리 등이
한결같이 어우동과의 관계를 부인했다는 거죠. 풍기문란이라고 여자를 잡아들였는데, 관계했다는 남자는 하나도 없는 우스운 상황...? 어쨌든 일이 커지면 더 망신이라는 생각에 의금부에서는 서둘러 처형해버림으로써 조선조 최대의 섹스 스캔들을 종료시켰습니다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입니다. 당나라 3대 황제의 고종의 황후가 측천무후입니다 워낙에 얼굴이 예뻐서 2대 황제 태종의 후궁이었다가 태종이 죽고 절에서 비구니로
살다가, 워낙 예뻤던 관계로 고종 그러니까 태종의 아들이고 다음 황제의 후궁이 되었답니다 , 워낙 고종이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여서 측천무후를 황후로 봉했답니다 (장희빈..이야기와 조~~금 비슷하죠??)
이 여자는 워낙 잔인해서 고종의 후궁과 전 황후를 황제가 찾아간다는 이유만으로 손발을 자르고 술항아리에 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고종이 몸이 약해서 정사를 볼수 없자, 자신이왕권을 잡았으며, 자신에게 반대 되는 모든것들을 죽였다고 하네요
자신의 자매들과 후궁이 낳은 딸, 그리고 두 아들도 모반을 하였다 죽였으며 좀 덜떨어지는 아들을 왕으로 삼았는데 이때도 왕권을 좌지 우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이렇게 포악하였어도 정치적으로 이룬 성과도 있다고 합니다
우선 귀족세력을 배격하고 과거로 새로운 관료를 등용했으며, 아버지상과 어머니상을 똑같이 치루어야 한다는 법을 제정하여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정책도 만들었고 문학서적도 편찬하게 하고 여러 의견을 정치에 수렴하기도 하였으며, 서예가로서도 이름을 남겼다고 합니다
살로메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이죠, 성서에는 이름은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유대의 역사학자 요제프스의 《유대 고사기(古事記)》에서 살로메라 적고 있다. 헤롯의 생일축하연에서 춤을 추었는데, 헤롯이 “네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겠다”고 하자 어미의 사주(使嗾)를 받은
살로메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여 이를 얻어냈다구하죠. 이는 세례자 요한이 헤롯과 그 형수 헤로디아와의 결혼을 평소 나쁘게 생각하여 그 행위를 나무랐기 때문라구 합니다.
장녹수
장녹수 그녀는 제안대군(성종의 형)의 여종이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고 가무에도 능하여 연산군의 눈에 들어 입궐, 숙원에 봉해졌다. 왕의 총애를 기화로 국사에 간여하고 재정의 궁핍을 초래하는 등 연산군 실정의 한 원인을 만들었기도 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참형을 받고 적몰되었다.
왕과 비에서는 연산군의 총애를 받지만, 장녹수가 그렇게 국사에 관여를 하였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천한 기생으로 후궁자리에 오른 그녀는 또다른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정난정...
윤원형의 첩에자 처로 오른 요부 본관은 초계이며,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이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다.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고자 기생이 되어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에게 접근하여 첩이 되었다.
1545년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한 명종을 대신하여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소윤의 우두머리였던 윤원형의 사주를 받고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중종의 8남)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 획책한다고 무고함으로써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 결과 윤임과 영의정 유관, 이조판서 유인숙 등이 반역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됨으로써 인종의 외척 세력인 대윤 일파는 크게 세력을 잃었다. 1551년(명종 6) 윤원형의 정실 김씨를 몰아내고 적처가 되었으며 이어 김씨를 독살하였다.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하여 전매, 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으므로, 당시 권력을 탐했던 조신들은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의 자녀들과 다투어 혼인줄을 놓았다고 한다.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하였으며 정경부인의 작호를 받았다.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선종판사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선·교 양종이 부활되고
도첩제도가 다시 실시되는 등 한때나마 불교가 융성하기도 하였다. 1565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사림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강음으로 유배되자 함께 갔으나 김씨 독살사건이 탄로나자 윤원형과 음독자살하였다. 그후 본래 신분으로 환원되었다. 여인천하에서 보았던 것 처럼 정난정은 매우 영리하였던 걸로 보입니다.
서출이라서 신분에 대한 콤플렉스가 강했던 걸로 보입니다. 당시 조선시대에서 외명부의 정1품 정경부인 자리까지 오른 정난정은 또다른 의의를 가지는 여자입니다.
메살리나,(小)아그리피나
고대 로마 황제 가운데 가장 여복이 없는 사람으로는 클라우디우스 1세가 꼽히죠. 첫번째 황후는 스스로 창녀촌을 찾아가 밤새도록 손님을 받기까지 한 희대의 색정광 메살리나였습니다. 그 뒤를 이은 황후 아그리피나는 정치 권력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음모가였죠. 메살리나 황후가
황제의 눈을 속이고 외간남자와 2중으로 결혼한 사실이 들통나 23세 때 처형당한 뒤 황후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습니다.. 시칠리아 총독 아헤노바르부스와 사별한 젊은 미모의 과부 아그리피나도 후보 중의 한사람이었죠.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조카이기도 한 그녀는 먼저 육탄 공세로 황제 측근인
해방 노예 팔라스를 휘어잡은 다음 숙부를 유혹하기 시작했죠. 30대 초반의 성숙한 육체를 앞세운 그녀의 공세는 보기좋게 성공,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아들 네로를 데리고 황후가 됐습니다. 데리고 온 아들을 황제로 만들기 위해 남편인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16세밖에 안되는
소년 황제 네로는 브루투스아 세네카의 도움으로 선정을 베푸는 바람에 그녀는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됐죠. 아그리피나가 클라우디우스의 딸 옥타비아(네로의 의붓 여동생)와 네로를 결혼시킨 것도 황제를 마음대로 주무르기 위한 일종의 책략이었으나 이 역시 별효과를 보지 못했죠. 아들 네로의 독살에도
실패한 아그리피나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친아들에게까지 '전가의 보도'인 섹스 공세를 벌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러한 어머니에게 반발했으나 성숙한 여인의 농밀한 테크닉 앞에 네로는 이성을 잃고 말죠. 모자상간의 소문이 전 로마를 휩쓸자 네로는 마침내 어머니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게되죠. 아그리피나가
탄 호화 유람선 바닥에 구멍을 뚫어 사고를 위장하려 했으나 실패, 해방 노예부대를 파견하고서야 겨우 살해에 성공하죠.
마지막 순간 아그리피나는 아랫도리를 벗어 보이면서 '여기를 찔러. 네로가 태어난 바로 여기를 찔러라'고 외쳤다고 했다구 합니다. 어머니의 사체가 운반돼 오자 네로는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몸매인가'라고
감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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