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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전통과 역사/고사·고담이야기

류성룡의 숙부 류거사의 내공

지송나무 2016. 3. 23. 21:48


 

류성룡


<출처 : 서울동인학회지 제2권, 2012년>


류성룡의 숙부 류거사의 내공
임진년을 맞이하여 임진왜란을 되새기며...

이 성 희

올해가 임진년(壬辰年)이다 지금으로부터 420년전인 1592년 4월 13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가 쓰시마를 출발하여 부산 다대포를 향해 침략한 것이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1차 침입이다,

임진왜란이 나기 전에 유성룡이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삼촌 유아치를 찾아갔다. 유성룡은 유아치의 큰 능력을 알고 있어서, 벼슬을 맡아달라고 하니 한사코 유성룡의 부탁을 거절했다.

유아치는 그의 신통력으로 나라에 난리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유성룡에게 깨우쳐 주기 위해 유성룡에게 바둑을 두자고 청하였는데, 바둑을 잘 두는 유성룡이 유아치에게 져서 집을 다 뺏기게 되자, 유이치는 “나라가 전부 다 빼앗기고, 네 집만큼 남았을 때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하고 물었다.

유성룡이 “청에 원군을 청해야겠지요.”하고 대답하니 유아치는, 우리의 힘이 모자라니, 다른 우국에 도움을 요청해야 될 것인데, 그 도움을 청하기 위해 네가 가야될지도 모르겠다고 하고는 그때 자기에게 들렸다 가라고 했다.

유성룡은 그 말을 깊이 새기고 서울로 돌아갔는데, 이윽고 나라가 노론 소론으로 분열되어 있을 때 왜구가 쳐들어와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왜구에게 밀려 결국 왕이 서울을 버리고 도망가게 되어 급히 청나라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때 사신으로 우의정인 유성룡이 가게 되었다.

삼촌의 말을 새기고 있던 유성룡은 청(명)나라로 가기 전에 유아치를 찾아가니 흰 봉투, 파란 봉투, 노란 봉투를 유성룡에게 주며 청국의 이여송이 의주 쯤 도착하면 무슨 행동을 할 것이니 이 봉투를 차례대로 사용하라고 당부했다.

유성룡이 청국에 도움을 요청하자 유아치가 이야기 한 대로 이여송이 대장이 되어 유성룡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압록강 변에 이르니 이여송이 유성룡에게 손을 쫙 벌리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봉투를 쓸 때가 왔음을 짐작하고 흰 봉투를 뜯었다.

그러자 쌀과 소금이 나와 그 봉투를 이여송에게 주었다. 이여송이 손을 벌린 것은, “우리 십만 대군이 너희 나라에 가는데 이 사람들을 먹일 양식은 있느냐”는 의미였다. 유성룡이 이것을 한 눈에 꿰뚫어보고 쌀과 소금을 주었으니 이여송은 유성룡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여송은 강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전쟁을 하려면 지형을 알아야 되니 지도를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유성룡이 파란 봉투를 주었는데 뜯어보니 조선의 지도가 나오는 것이었다.

또 이여송은 강을 건너려고 할 때, “일국의 대원수가 가는데 그냥 건너갈 수 없으니 은으로 된 다리를 놓아주시오.”하고 유성룡에게 배짱을 부렸다. 유성룡은 방법이 없어 마지막 봉투를 뜯어 봤는데 그 안에는 이여송이 배짱을 부리면 의주 부사를 찾아가라고 적혀있었다.

유성룡이 찾아가니 그 부사는 유아치의 제자였다. 부사는 유성룡의 이야기를 듣더니, “스승님이 제가 여기에 부사로 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칡넝쿨만 가져다가 창고에 쌓아놓으라고 하셨는데 그걸 쓸 때가 된 것 같습니다.”하며 칡넝쿨을 엮어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새벽이 되니 서리가 내려 그 칡넝쿨 다리가 은색으로 반짝거리는 것이었다. 유성룡은 이여송에게 은다리를 만들어 놨으니 건너가자고 하여 이여송은 조선 땅으로 들어와 왜군을 몰아내게 되었다.

이여송은 유성룡의 재주를 보고 조선에 명인이 많은 것을 걱정하여 돌아가는 길에 백두산(장백산)의 산혈을 끊었다. 이여송이 집에 돌아가 어머니께 장백산의 기가 막힌 산혈 하나를 끊고 왔다고 말씀드렸는데 어머니는 이여송이 끊은 산혈은 자신의 집안 산혈을 끊은 것이라고 하고, 너 때문에 우리 집안이 망하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는 설화가 있었다(한국의 설화 중에서)

유거사(柳居士)는 안동인(安東人)으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숙부이다. 생김새가 보잘 것 없었고 행동거지 또한 어리석고 실속이 없었으며 평상시에는 말하지도 웃지도 않았다. 초가집 하나를 지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책을 읽으니 서애가 일개 어리석은 숙부로만 여겼었다.

하루는 거사가 서애에게 말하였다. “자네가 나와 바둑을 두면서 소일(消日)하지 않겠는가?” 서애는 바둑이 고수인데다 일찍이 어리석은 숙부가 바둑 두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대답하였다, “숙부님도 바둑둘 줄 아십니까?” 하고, 더불어 바둑을 두었는데, 서애가 연달아 세 판을 지는지라 놀라 이상히 여기니 거사가 말하였다.

“이제 바둑은 그만 두세, 오늘 저녁 어떤 중이 필시 자네 집에 올 것이니 모름지기 나의 초막으로 가라고 지시하여 보내게” 하고 말하자,

서애는 마음속으로 중이 오리라는 것을 숙부가 미리 아는 것에 대해 괴이하게 여겼으나 겉으로는 “예”라고 응낙하였다.

그 날 밤에 과연 어떤 중이 와서 말하였다, “저는 묘향산에 거처하고있는데 이 집에서 묵어가기를 원합니다.” 서애는 어리석은 숙부의 말이 딱 들어맞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중에게 소반(蘇飯)을 먹여서 초막으로 보냈다.

유거사가 말하였다. “나는 선사(禪師)가 올 줄 미리 알고 있었소.”하고 말하자, 중이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유거사가 말하였다. “조금 전 내 조카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반드시 정사(靜舍)에 와서 묵으리라고 생각하였소.”

말을 마친 뒤 거사가 다른 말없이 코를 골고 자자 중 또한 잠을 잤다.

중이 잠든 틈을 타서 유거사가 몰래 중의 바리때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안에 동국지도(東國地圖) 한 부(部)가 있었다. 관문(關門), 요해처, 진번(鎭藩), 험이처(險夷處) 및 인물, 양식, 기계 등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었고 또 단검 한 쌍이 있었는데 칼날이 날카로왔다.

유거사가 검을 쥐고 중의 배 위에 걸터앉아 청정(淸正)을 부르며 말하였다. “너의 죄를 알렸다!” 중이 놀라 보니 밝은 빛이 번쩍번쩍하는 날카로운 검이 바로 머리맡을 위협하고 있었다. 중이 말하였다.

“소승은 죄가 없나이다. 목숨을 살려주십시오.”

유거사가 말하였다. “주머니 속의 지도를 얻어낸 것은 너의 죄가 아니더냐? 세 번 조선에 들어온 것 역시 너의 죄가 아니더냐? 우리나라에는 마치 인물이 없는 것처럼 엿본 것은 너의 죄가 아니더냐?”

중이 입을 다물고 대꾸하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애걸하며 말하였다.

“만약 저의 목숨을 살려주신 다면 곧장 바다를 건너가서 결초보은(結草報恩)하겠나이다.”

거사가 길게 한숨지으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우리나라에 7년의 재액이 있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수라. 내가 고추부서(孤雛腐鼠) 같은 너희들을 죽여도 이익 될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내가 지금 너의 목숨을 살려줄 것이니 후에 왜인들이 만약 안동(安東) 땅에 한 발자국이라도 발을 들여놓는다면 내 마땅히 모두 섬멸하여 하나도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너는 빨리 바다를 건너 가거라.”

중이 “예, 예”하며 즉각 인사를 하고 떠났다. 임진왜란 때 전국 8도가 유린되었으나, 안동만은 병화를 면하였으니 이것은 곧 거사의 공덕 때문이었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설화 야담)

<옮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