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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네 軍人의 이야기: 성공한 정치군인 金庾信과 朴正熙, 고생한 순수군인 金方慶과 李舜臣

지송나무 2015. 6. 11. 10:14

네 軍人의 이야기: 성공한 정치군인 金庾信과 朴正熙, 고생한 순수군인 金方慶과 李舜臣

趙甲濟    

*군인을 존중하던 시절에 태어난 金庾信의 장엄한 생애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책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고려 仁宗시대의 權臣(권신)이기도 했던 金富軾(김부식)이 쓴 三國史記일 것이다. 이 책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약 1000년간의 역사는 암흑속으로, 또는 안개속으로 들어가버린다. 이 중요한 三國史記는 申采浩(신채호)같은 사람들에 의해 反민족적·사대주의적 관점에서 신라중심으로 쓰여졌다는 오해와 비판을 받아왔다. 기자도 이런 그릇된 주장에 영향을 받아 나이 50 가까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글을 써서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서양의 문필가가 성경을 나이 50에 읽는 것과 같지 않을까)

   
   늦게 읽은 만큼 감동은 컸다. 正史(정사)답게 당대의 최고 지식인이 正色(정색)을 하고 쓴 책이기 때문이다. 삼국과 통일신라를 중심에 놓고 자주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三國史記는 뒤에 나온 또 다른 正史 高麗史에 비해서 월등한 주체성을 띠고 있다. 기자는 三國史記의 가장 중요한 대목인 신라통일기의 역사를 읽으면서 통일 주체세력들의 숨소리와 민중의 鼓動(고동)을 듣는 것 같았다. 통일 3傑(걸)-金春秋, 金庾信, 文武王의 경륜과 전략, 화랑도 출신 장수들의 장렬한 삶과 죽음. 이들이 펼치는 드라마와 人間像은 우리 역사에서 그 뒤 다시는 등장하지 않는다(1945년 이후 현재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가 언젠가는 우리 민족사의 두 번째 황금기로서 이 시기와 비견될 것이다)
  
   로마시대·중국 戰國(전국)시대·일본 명치유신 시대의 영웅들을 연상시키는 신라통일기의 主役(주역)들 특히 그들의 집념, 명예심, 자주성, 국제적 視覺(시각), 武人으로서의 교양은 『아 이런 분들이있었기에 신라가 唐을 이용하고 또 唐과 맞서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과 나를 존재하게 했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列傳 부분의 金庾信傳에 명문이 많다.
   <적국이 무도하여 이리와 범이 되어 우리나라를 침요하니 편안할 날이 없습니다. 저는 신라사람입니다. 나라의 원수를 보면 마음과 머리가 아프므로(痛心疾首)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민망히여기시어 方術을 가르쳐주십시오>(17세 때 석굴에 들어가 기도할 때 나타난 難勝이란 도사에게 金庾信이 하는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신을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를 멸망시킨 후 唐이 신라까지 칠려고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 이뤄진 御前회의에서 金庾信의 발언)
   이런 金庾信의 決戰의지에 꺾인 唐의 원정군사령관 蘇定方(소정방)은 그냥 돌아간다. 唐 고종은 그를 위로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三國史記 김유신 열전 부분은 전하고 있다.
  
   <고종: 『어찌하여 新羅마저 정벌하지 아니하였는가?』蘇定方: 『신라는 그 임금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그 신하는 충의로써 나라를 받들고, 아래사람들은 그 윗사람을 父兄과 같이 섬기므로 비록 나라는 작더라도 가히 도모하기 어려워 정벌하지 못하였습니다』>
  
   임금과 신하와 백성이 애국심과 義理로써 똘똘 뭉친 나라 - 이것이 新羅가 삼국통일을 하고 唐과 맞서 自我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요사이 式으로 번역하면 「대통령과 정치인과 국민들이 단결한 나라이므로 大國의 힘을 믿고서 밀어붙인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란 뜻이다.
  
   <무릇 장수가 된 자는 나라의 干城(간성)이요 임금의 爪牙(조아·어금니)로서 승부의 결단을 矢石(화살과 돌)가운데서 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위로는 天道를 얻고 가운데로는 人心을 얻은 후에라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충절과 신의로써 살아 있고 백제는 오만으로써 망했고 고구려는 교만으로써 위태하다. 지금 우리의 곧음으로써 저들의 굽은 곳을 친다면 뜻대로 될 것이다>(당과 함께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떠나는 김흠순, 김인문 두 장군에게 김유신이 충고하는 내용)
  
   <신의 우매함과 불초함으로 어찌 국가에 이익이 되었겠습니까. 다행히 밝으신 성상께서 의심치 않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기에 조그만 공을 이루어 三韓이 한 집안이 되고 백성은 두마음이 없으니 비록 태평에는 이르지 못하였다고 할지나 또한 小康(소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이 보건대 예로부터 계승하는 임금이 처음은 잘하지 않는 이가 없지만 끝까지 다하는 일이 적어 累代의 공적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리니 매우 통탄할 일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守成 또한 어렵다는 것을 염려하시어 小人을 멀리 하고 君子를 가까이 하십시오. 조정은 위에서 화평하고 백성은 아래에서 안정되어 재앙과 난리를 만들지 않고 국가의 基業(기업)이 무궁하게 된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병문안 온 文武王에게 남긴 김유신의 유언)
  
   <아내에게는 三從의 의리가 있는데 지금 홀로 되었으니 마땅히 자식을 따라야 할 것이나 元述 같은 자는 이미 先君(注-김유신을 지칭)의 자식 노릇을 못하였는데 내가 어찌 그 어미가 되겠는가>(패전하고 돌아온 金庾信의 차남 원술이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를 찾아왔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면서 만나주지 않았다)
  
   金庾信의 큰 권모술수
  
   삼국사기를 통해서 기자가 만난 인물이 金庾信이다. 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수십년간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을 모시고 統一大業에 精進(정진)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1인자인 왕과 병권을 쥔 2인자가 이렇게 오랫동안 共存한 예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발견하기 힘들다. 1인자가 군대를 장악한 2인자를 의심하는 순간 2인자의 운명은 刑場이거나 쿠데타에 의한 역습이다. 金庾信은 至誠(지성)으로 1인자를, 왕들은 존경으로 그를 대했다. 金富軾(김부식)은 金庾信傳의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평했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었고 맡겨서 변함이 없었고 꾀를 쓰려 할 때 이를 들어줌으로써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을 하지 않게 하였다>
  
   부리는 왕과 부림을 받는 金庾信 사이의 이런 신뢰관계가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金庾信은 꾀를 부려 누이 문희를 金春秋에게 시집보냈고 金春秋와 그 누이한테서 난 딸을 아내로 맞았다(당시는 近親결혼 풍습이 있었다). 문무왕은 金庾信의 여동생의 아들, 즉 생질이기도 했다. 신라에 정복당한 가야왕실의 후손인 金庾信은 이런 혈연관계를 통해서 신라왕족과 두 王의 安心을 산 뒤 자신의 야망-삼국통일을 해낸 것이리라. 권모술수와 전략전술을 겸비한 金庾信이야말로 정치군인의 한 典型(전형)이겠다.
  
   「전쟁은 군인에게 맡기기엔 너무 큰 일이다」는 말이 있듯이 金庾信이 순수한 군인이었다면 삼국통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金庾信은 권모술수에 통달하되 그것을 개인의 영달이나 집권이 아닌 민족통일국가 건설이란 보다 큰 차원의 명제로 승화시킨 대인물이다. 그래서 기자는 그를 「한민족을 만든 민족사 제1인물」로 定義하는 것이다. 
   
   *李舜臣의 亂中日記: 군인을 경멸하던 시대에 태어난 한 軍人의 悲壯한 삶
   

 


   알려질 것을 의식하지 않고 쓴 日記
  
   李舜臣의 일기를 亂中日記라고 부르게 된 것은 正祖가 李忠武公全書를 만들도록 한 뒤였다. 편찬자가 亂中日記라고 붙인 것이지 李舜臣이 그렇게 붙인 것은 아니다. 李舜臣은 그의 死後에 자신의 日記가 알려지고 국보로까지 지정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日記는 전란속에서 가슴에 쌓아둘 수 없었던 울분, 걱정, 한탄을 기록한 것이지 나중에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이 일기를 읽을 때 유념해야 할 일이다.
  
   李舜臣은 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 알려질 일이 없으리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자와 같은 호기심 많은 사람으로서는 李舜臣의 그런 착각이 무척 다행이다. 솔직한 자기토로에 의해서 드러나는 인간 李舜臣의 裸像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傳記작가들의 의해 신격화되고 박제품이 된 근엄하고 딱딱한 李舜臣과 달리 亂中日記속의 李舜臣은 피가 끓고 미움과 사랑이 교차하며 憂國과 분노가 뒤섞이고 비통함과 집념이 뒤엉키는 격동하고 생동하는 바로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이다. 聖人도 아니고 聖雄도 아니다. 그의 傳記 10권을 읽는 것보다는 亂中日記 한 권을 읽는 것이 그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다.
  
   超人이 아닌 病弱했던 사람: 신경성 위장병을 앓다
  
   正祖 시대 난중일기를 처음 활자판으로 간행할 때 누락시킨 부분이 많은데 주로 조정을 비판하고 元均에 대해서 험한 이야기를 한 경우이다. 이 누락부분이야말로 李舜臣의 진면목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안팎이 모두 바치는 뇌물의 多少로 죄의 輕重(경중)을 결정한다니, 이러다가는 결말이 어찌 될 지 모르겠다. 이야말로 한 줄기 돈만 있다면 죽은 사람의 넋도 찾아온다는 것인가>(丁酉年 5월21일)
  
   <元(원균)이 온갖 계략을 다 써서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역시 운수인가. 뇌물짐이 서울로 가는 길을 연잇고 있으며, 그러면서 날이 갈수록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만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丁酉年 5월8일)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무치고 슬픈 마음에 눈물은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은 어찌 내 사정을 살펴주지 못하는고, 왜 빨리 죽지 않는가>(丁酉年 5월6일)
  
   1998년에 서울대학교 朴惠一 명예교수(원자력 공학)와 崔熙東 원자핵공학과 교수, 裵永德-金明燮 원자력연구소 연구원이 같이 쓴 「李舜臣의 일기-親筆草本에서 國譯本에 이르기까지」에는 난중일기를 분석하여 李舜臣의 행동을 엿보게 한 대목이 있다.
  
   李舜臣이 자신의 일기에서 몸이 불편하다든지 병에 걸린 것을 언급한 대목이 180여 회에 이른다.
  
   1597년 8월21일자 일기: 「새벽 2시쯤에 곽란이 일어났다. 차게 한 탓인가 하여 소주를 마셔 다스리려 했다가 人事不省에 빠져 거의 구하지 못할 뻔했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고통을 겪었다」
  
   8월22일: 「곽란으로 인사불성, 기운이 없고 또 뒤도 보지 못하였다」
  
   8월23일: 「병세가 몹시 위급하여 배에서 거처하기가 불편하고 또 실상 전쟁터도 아니므로 배에서 내려 포구밖에서 묵었다」
  
   이 기사를 본 내과전문의의 소견은 「극심한 신체적 과로와 정신적 압박에서 비롯된 일종의 신경성 위장반응이며 급성 위염의 증상군에 속하는 病狀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난중일기엔 술마신 기록이 140여회나 나온다. 그는 속앓이를 하면서도 술을 즐겨 했다. 나라가 되어 가는 모습에 대한 울분, 고향에 있는 어머니와 아내 걱정,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元均에 대한 경멸과 미움, 倭敵에 대한 증오, 民草의 참상에 대한 동정심으로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李舜臣은 몸을 돌보지 않고 술로써 시름을 달랬던 것 같다. 토사곽란을 소주로 치료하려고 했을 정도이다.
  
   위장병을 술로 다스리려고 한 사람
  
   신경성 위장병의 원인은 과도한 걱정과 울분이었을 것이다. 李舜臣 일기엔 꿈에 대한 이야기가 수십 차례나 나온다. 그는 꿈자리가 어지러웠던 사람이다. 꿈의 내용도 주로 가족들에 대한 걱정과 나라 걱정이다.
  
   <丙申 정월12일: 새벽 2시쯤, 꿈에 어떤 곳에 이르러 영의정(柳成龍)과 함께 이야기했다 잠시 함께 속 아랫도리를 끄르고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서로 나라를 걱정하는 생각을 털어 놓다가 끝내는 가슴이 막히어 그만두었다. 이윽고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오히려 흩어지지 않고 조용히 이야기하는 중에 「만일 서쪽의 적이 급히 들어오고 남쪽의 적까지 덤비게 된다면 임금이 어디로 다시 가시랴」하고 걱정만 되뇌이며 할 말을 알지 못했다>
  
   꿈속에서 비바람이 퍼붓는데도 가슴이 막힐 만큼 나라 걱정을 하는 李舜臣은 元均에 대해서만은 아주 경멸스러운 용어를 쓰고 적개심마저 드러낸다. 그를 元凶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이 난중일기의 元均 인물평으로 해서 임진왜란 뒤 3명의 일등공신 중 한 사람(다른 두 사람은 李舜臣과 權慄)으로 선정되었음에도 元均은 실제보다 더 나쁘게 알려진 억울한 면도 있다. 난중일기를 읽고 있으면 李舜臣은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울분과 恨을 가슴 속에 묻고 지낸 사람이란 느낌이 든다.
  
   기록문학
  
   李舜臣의 진면목은 역시 海戰을 기록한 대목에서 잘 나타난다. 특히 전멸하다시피한 朝鮮 水軍에서 겨우 13척의 戰船을 수습하여 일본 水軍 200여척과 대결한 명량대첩날의 기록은 悲壯하고 문학적이다.
  
   <이른 아침에 別望軍이 다가와 보고하기를 수효를 알 수 없도록 많은 적선이 鳴梁으로 들어와 곧장 우리가 진치고 있는 곳으로 오고 있다고 하였다. 즉각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려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 배를 에워쌌다. 여러 장수들은 적은 수로 많은 敵을 대적하는 것이라 모두 회피하기만 꾀하는데 右水使 金億秋가 탄 배는 이미 2마장(1마장은 십리나 오리 정도 거리) 밖으로 나가 있었다. 나는 노를 재촉하여 앞으로 돌진하여 地字, 玄字 등 각종 銃筒을 폭풍과 우뢰같이 쏘아대고 군관들이 배 위에 총총히 들어서서 화살을 빗발처럼 쏘니 적의 무리가 감히 대들지 못하고 나왔다가 물러났다가 하였다.
  
   그러나 겹겹히 둘러싸여서 형세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 온 배의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 보며 얼굴 빛을 잃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타이르되 적선이 비록 많다고 해도 우리 배를 바로 침범치 못할 것이니 조금도 마음을 동하지 말고 다시 힘을 다하여 적을 쏘고 또 쏘아라 하였다. 여러 장수들의 배들을 본 즉, 먼 바다로 물러서 있는데, 배를 돌려 군령을 내리고자 해도 적들이 그 틈을 타서 더 대들 것이라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었다. 호각을 불어 中軍에게 軍令을 내리는 깃발을 세우게 하고 또 招搖旗를 세웠더니 中軍將 미조항첨사 김응함의 배가 차츰 내 배로 가까이 왔으며 거제현령 安衛의 배가 먼저 다가왔다.
  
   나는 배 위에 서서 친히 安衛를 불러 말하기를, 너는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네가 군법으로 죽고싶으냐, 도망간다고 어디 가서 살 것이냐 하니, 安衛도 황급히 적선 속으로 돌입하였다. 또 김응함을 불러 너는 중군으로서 멀리 피하여 대장을 구원하지 않으니 죄를 어찌 피할 것이냐, 당장에 처형할 것이로되 적세가 또한 급하니 우선 功을 세우게 하리라 하였다.
  
   그래서 두 배가 앞서나가자 敵將이 탄 배가 그 휘하의 배 2척에 지시하여 일시에 安衛의 배에 개미가 붙듯이 서로 먼저 올라가려 하니 安衛와 그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죽을 힘을 다하여 혹은 모난 몽둥이로, 혹은 긴 창으로, 혹은 水磨石 덩어리로 무수히 마구 쳐대다가 배 위의 사람들이 거의 기진맥진하므로 나는 뱃머리를 돌려 바로 쫓아 들어가 빗발치듯 마구 쏘아댔다. 적선 3척이 거의 다 엎어지고 쓰러졌을 때 鹿島萬戶 송여종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들이 뒤따라 와서 힘을 합해 적을 사살하니 몸을 움직이는 적은 하나도 없었다.
  
   투항한 倭人 俊沙는 안골포(지금 진해시 안골동)의 적진으로부터 항복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더니 말하기를, 그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 적진의 적장 마다시요라고 했다. 내가 無上(물긷는 군사) 김돌손을 시켜 갈구리로 뱃머리에 낚아 올린 즉, 俊沙가 좋아 날뛰면서 바로 마다시라고 말하므로 곧 명하여 토막토막 자르게 하니, 적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이때 우리 배들은 적이 다시 범하지 못할 것을 알고 북을 울리며 일제히 진격하여 地字, 玄字 포를 쏘아대니 그 소리가 산천을 뒤흔들었고 화살을 빗발처럼 퍼부어 적선 31척을 깨뜨리자 적선은 퇴각하여 다시는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우리 수군은 싸웠던 바다에 그대로 묵고 싶었으나 물결이 몹시 험하고 바람도 역풍인 데다가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당사도로 옮겨 가서 밤을 지냈다. 이번 일은 실로 天幸이었다>(朴惠一 외 3명이 쓴 「李舜臣의 日記」에서 인용. 서울대학교 출판부)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 앞에서
  
   1594년 5월9일 일기: 「비, 비. 종일 빈 정자에 홀로 앉아 있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밀어 마음이 산란했다. 무슨 말을 하랴, 어떻게 말하랴. 어지럽고 꿈에 취한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이처럼 잠못 이루는 밤속에서 읊은 시조가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一聲胡茄(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이다.
  
   달빛 비친 바다를 바라보면서 수심에 잠긴 李舜臣의 모습은 亂中日記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는 걱정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亂中日記 어디를 보아도 느긋한, 유쾌한 李舜臣을 찾아보기 어렵다. 한 시대의 짐을 몽땅 혼자서 진 모습의 연속이다.
  
   난중일기엔 아산에 모신 어머님에 대한 걱정이 100여회나 등장한다.
   <丁酉 4월13일:잠시 후 종 順花가 배로부터 와서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하였다.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어찌 적으랴.
  
   丁酉 4월19일: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靈筵(영연)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찌 하랴, 어찌 하랴. 天地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李舜臣은 군인을 경멸하는 文民 지배의 정치질서 속에서 제대로 뜻을 펴보지 못했다. 왜적과 싸우는 戰線사령관을 모함에 걸어 잡아들이고 고문하는 양반 지도층 인사들의 등살에 그는 心身이 골았다. 그런 가운데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막내아들을 잃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땐 李舜臣이 억울한 옥중생활에서 풀려나 죄인의 신분으로 白衣從軍중이었기 때문에 문상만 하고 장례식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戰線으로 떠나야 했다. 막내아들(면)의 戰死통지를 받을 때 심경을 李舜臣은 이렇게 적었다.
  
   <1597년 10월14일: 저녁에 천안으로부터 사람이 와서 집안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어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어질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고, 타고 찢어지는 것 같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니와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어두워지고 캄캄하고 밝은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죄를 지어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마침내 어디에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힘쓰고 같이 울고싶건마는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또한 의지할 곳이 없으므로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마음은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따름이다. 울부짖을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구나. 이날 밤 10시경 비가 내렸다>
  
   3일 뒤 일기에서 李舜臣은 「내일이 막내아들의 부음을 들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인데 마음껏 통곡해보지도 못했으므로 소금 만드는 사람인 강막지의 집으로 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장군
  
   난중일기엔 脫營한 군인들을 잡아와서 처형하고 엉터리 보고를 한 군관에게 곤장을 치는가 하면 뇌물을 받고 戰船을 빌어준 군인들을 처벌하는 따위의 벌주는 기록에 110여회나 등장한다. 李舜臣은 결코 자애로운 장군이 아니었다. 아랫사람들의 실수를 엄격하게 다스렸다.
  
   군대를 기피하려는 사람들이 많고 軍需공급은 제대로 되지 않는 劣惡한 상황에서 軍紀를 엄정하게 잡아가자니 강력한 體罰이 동원되었으리라.
  
   러일 전쟁 중 대마도 해협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대패시킨 일본 해군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가 『나를 넬슨 제독에 비교하는 것은 몰라도 李舜臣에 비교하는 것은 황공한 일이다』란 취지의 말을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도고의 다음 설명이다.
  
   『넬슨이나 나는 국가의 전폭적인 뒷받침을 받아 결전에 임했다. 그러나 李舜臣은 그런 지원 없이 홀로 고독하게 싸운 분이다』
  
   武將이 武將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 말이 바로 李舜臣의 실존적인 고독, 그 핵심을 이야기하고 있다. 무능한 王朝, 엉터리 전쟁지도, 오지 않는 軍需 지원. 이런 가운데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敵을 상대해야 했던 李舜臣. 군인을 경멸하는 시대에 태어나 조국과 민족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고 뚜벅뚜벅 걸어간 李舜臣, 그의 자살설은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리라.
  
   그가 최후의 해전에서 살아 개선했다면 과연 명대로 살았을까? 李舜臣의 가장 큰 多幸은 최후 전장에서의 장렬한 죽음이었다는 느낌이다. 李舜臣의 일기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그의 행동은 활쏘기이다. 270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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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李舜臣' 金方慶의 위대한 생애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감동하여 그를 주인공으로 '風濤'라는 소설을 썼다.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를 요약)
  
  저는 1970년대 초에 일본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가 쓴 風濤(풍도)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이노우에 야스시란 소설가는 ‘돈황’이란 역사 소설과 '氷壁'(빙벽)이란 등산 소설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죽은 이노우에 야스시는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써 여운이 오래 남는 이야기를 엮어가는 소설가입니다. 바람 風, 파도 濤자의 이 풍도란 소설의 주인공은 몽골제국인 원나라에 지배당하고 있던 고려 시대의 장군 金方慶(김방경)이었습니다. 당시 몽골은 일본으로 원정하기 위하여 고려의 남해안, 지금의 마산 부근에서 함선을 건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기술자들 3만5000여 명이 동원되어 900여 척의 배를 만들었습니다.
  
   제1차 원정은 서기 1274년 고려 충렬왕 원년이었습니다. 이때 동원된 원정군은 몽골군과 중국 漢族(한족) 군대를 합쳐서 2만5000명, 고려군이 8000명, 키잡이, 안내자, 뱃군을 합쳐서 6700명으로서 총 4만을 넘는 大軍(대군)이었습니다. 고려군의 사령관은 김방경이었습니다. 이 원정군은 합포, 즉 지금의 마산항을 출발하여 대마도에 상륙했습니다. 간단하게 이 섬을 점령한 연합군은 9일 뒤에는 일본 큐슈 연안에 있는 잇기 섬을 점령했습니다. 대마도와 잇기 섬의 영주들은 모두 싸우다가 죽었고 일본 무사들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잇기 섬을 점령한 5일 뒤에는 드디어 하카다만에 당도했습니다. 하카다는 지금의 큐슈 후쿠오카입니다.
  
   다음날 큐슈에 상륙한 몽골-고려 연합군은 본격적으로 일본 가마쿠라 막부의 군대와 접전을 벌였습니다. 일본 무사들은 1대1의 결투를 중심으로 하는 戰法(전법)을 익혔지만 몽골군대는 조직적인 싸움에 능한데다가 일종의 대포까지 갖고 와 쏘아대니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金方慶의 지휘하는 모습을 高麗史(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군이 몰려와서 長劒(장검)이 바로 좌우에서 번득이었으나 김방경은 심어놓은 나무마냥 조금도 물러서지를 않았다. 김방경은 효시, 즉 전투 신호용 화살 하나를 뽑아 쏘고 소리를 높여 외치니 왜군들이 놀라서 기가 죽어 달아났다. 왜군이 大敗(대패)하고 엎드려진 시체가 삼을 베어 눞인 듯이 많았다.〉
  
   몽골-고려 연합군은 밤에는 하카다만에 정박시켜둔 함선에 돌아가서 쉬었는데 어느날 태풍이 불어와서 이 함선들이 대부분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이 태풍으로 溺死(익사)한 원정군의 수가 1만3500명이었다고 합니다. 태풍이 보호하여 일본을 살려낸 셈입니다. 일본의 역사가 바뀔 뻔했던 이 원정의 지휘관인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왜 일본의 소설가가 썼을까 하는 의문을 저는 갖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이 風濤란 소설에는 일본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고 고려 이야기만 나옵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는 몇 번이나 책을 덮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몽골의 지배를 받아 신음하는 고려 사람들의 고통이 肉聲(육성)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김방경의 곤혹스런 처지도 답답하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는 두 사람의 상관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고려에 주둔한 몽골군의 사령관과 고려왕이 그들이었습니다. 김방경으로서는 몽골군 사령관이 시키는 대로 했다간 고려 백성이 고생할 것이고 그 명령을 듣지 않았다가는 고려왕의 입장이 난처하게 될 처지에 있었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고려 주둔 몽골군대의 사령관인 흔도가 하루는 김방경에게 불평을 털어놓습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나로 하여금 몽골軍을 관할하게 하고 그대로 하여금 고려軍을 관할하도록 하였는데 그대는 매양 일만 있으면 고려왕에게 미루고 고려왕은 그대에게 밀어버리니 과연 누가 고려군의 일을 맡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김방경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출정시에는 군대를 장군이 관할하는 것이고 평화시에는 國王(국왕)의 관할을 받는 것이니 본래 법이 그렇지 않은가.”
   이 말이 끝나자 흔도는 새를 한 마리 잡아서 갖고 놀다가 김방경이 보는 앞에서 죽여버렸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이렇게 한 데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오”
   김방경이 대답합니다. “농부들이 힘써 농사를 지어놓으면 이것들이 와락 달려들어 곡물을 다 쪼아먹어버리니 장군께서 그 새를 죽인 것은 잘한 일입니다.”
   다시 몽골장군 흔도가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내가 여기에 와서 보아하니 고려사람들은 모두 글을 아는 것이 중국의 漢族과 꼭 같다. 그리하여 속으로는 우리 몽골 사람들이 살육을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몽골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그런 살육할 권리를 부여 받았기 때문에 죄가 되지도 않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대 고려사람들이 우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이유이다.”
   흔도의 이야기는, 글을 좀 안다고 해서 까불지 말라는 비아냥이 담긴 말입니다. 몽골사람들은 그런 글 따위는 모르고 다만 군사력이 바로 正義(정의)라는 단순한 생각을 갖고 있으므로 너무 머리를 굴리고 꾀를 부리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김방경으로서는 그런 꾀라도 쓰지 않으면 우리 백성을 모조리 이 사나운 몽골 군대의 처분에 다 내어놓아야 하는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김방경은 몽골 군대의 지휘하에서 삼별초를 토벌하는 책임도 떠맡았습니다.
  
   고려 왕실은 강화도에서 약 30년간 몽골군을 상대로 싸우다가 항복하고 육지로 나올 때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삼별초란 부대는 원래 최씨 武臣(무신) 정권 때 수도이던 開京(개경)을 지키던 특수정예부대였습니다. 여기에다가 몽골군대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사람들을 집어넣었기 때문에 몽골군대에 대한 증오심은 대단했습니다. 이 삼별초는 고려 왕실의 해산명령에 불복하고 강화도를 봉쇄한 다음 왕족의 한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고 계속해서 몽골에 저항할 태세를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육지와 너무 가까운 이 강화도에서는 장기抗戰(항전)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서해안을 따라서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진도에 성을 쌓고 궁전까지 건설한 삼별초는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고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전주까지 위협하여 왕실에서 조세와 쌀을 거두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1271년 몽골과 고려 연합군은 진도를 함락시켰습니다. 삼별초 대장 金通精(김통정)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다시 제주도로 들어가 抗戰을 계속했습니다. 1273년 몽골 고려 연합군은 김방경의 실질적인 지휘하에 1만 명의 군인과 160척의 함선을 이끌고 추자도를 거쳐 제주도의 함덕 포구에 상륙하여 삼별초를 섬멸하였습니다. 삼별초의 이 장렬한 몽골에 대한 항전은 고려 무신정권의 투지를 엿보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같은 고려 군대에 의하여 마치 반란군이 토벌되듯이 사라져갔다는 점에서 패전국의 悲運(비운)을 실감하게 해줍니다. 한때의 戰友(전우)들을 토벌해야 했던 김방경의 고민 또한 깊었을 것입니다.
  
   저는 조선조 문종 때 김종서 정인지가 편찬한 고려사를 읽으면서 왜 일본인 이노우에 야스시가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게 되었을까 하는 오랜 의문을 풀 수가 있었습니다. 김방경의 생애는 이순신의 생애처럼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바가 있었습니다. 몽골帝國(제국)의 압제를 피해가면서 고려왕실과 고려백성들을 보호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고뇌하면서 묵묵히 걸어갔던 한 巨人(거인)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노우에 야스시는 아마도 고려사를 읽고서 김방경의 생애에 감동되어 '風濤'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李舜臣(이순신)이 모함을 받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듯이 김방경도 억울한 고초를 당한 적이 있었습니다. 간교한 부하 몇 사람이, 김방경이 강화도로 들어가서 몽골군대를 몰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략을 하여 몽골측에 보고했기 때문입니다. 고려왕실에서 조사해보니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고려인으로서 몽골에 귀화하여 고위직에 있었던 홍다구가 이 소식을 元(원)의 수도 燕京(연경)에서 들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고려를 반역하여 몽골에 붙은 경력이 있는 집안의 아들로서 자신의 조국 고려에 대하여 악감정을 가지고 있어 기회만 있으면 몽골의 위세를 빌어 고려왕실과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던 인간이었습니다. 이 홍다구가 쿠빌라이 황제에게 간청하여 스스로 신문관이 되어가지고는 고려로 와서 직접 김방경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홍다구는 겨울에 늙은 김방경을 벌거벗겨놓고는 쇠사슬로 목을 조이고 때리는 고문을 자행하였습니다. 보다못한 고려 충렬왕이 “이 문제는 이미 무고한 것으로 판정이 난 것인데 왜 또 조사를 하는가”라고 만류했으나 홍다구는 황제의 명령이라면서 듣지를 않았고 왕은 구경만 할 뿐이었습니다. 김방경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기절하고 다시 살아나는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거짓 자백을 거부했습니다. 홍다구도 신문조사에서 별 성과가 없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충렬왕의 측근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김방경이 자백하면 그 한 사람에게만 벌을 줄 것이요. 그것도 귀양 보내는 정도로 가볍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충렬왕은 김방경에게 사정하다시피 합니다.
   “이런 고문을 계속해서 받으면 장군이 결국 죽을 것이오. 그러니 일단 거짓 자백이라도 하여 우선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오. 더구나 元의 황제께서는 어질고 거룩하신 분이니 진실을 밝혀줄 것이오”
   김방경은 이렇게 거절합니다.
   “왕은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는 일개 병사의 몸으로 출세하여 직위가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저의 간과 골이 땅바닥에서 구르게 된다고 해도 나라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하겠거늘 어찌 一身(일신)을 아끼여 근거 없는 죄명을 둘러쓰고 국가를 배반하겠습니까.”
   김방경은 홍다구를 향해서 “나를 죽이려거든 죽여라. 나는 부당한 일을 가지고는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아무런 자백을 받아내지 못한 홍다구는 김방경이 갑옷을 집에 감추어두었다는 엉뚱한 트집을 잡아서 그를 대청도로 귀양보냈습니다.
  
   쿠빌라이 황제는 김방경의 용맹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김방경이 숨겨놓았다는 갑옷이 몇 개나 되더냐고 고려 측에 물었습니다. 고려왕실에서 마흔여섯 벌이라고 대답하니 웃으면서 “아니 반역을 도모한다는 사람이 마흔여섯 벌의 갑옷으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조사하겠다고 나섭니다. 그리하여 고려 충렬왕이 연경으로 와서 보고하도록 하고 올 때는 김방경을 귀양지에서 석방하여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쿠빌라이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하여 목숨은 건지게 되고 복직도 되었지만 김방경은 사표를 냈습니다. 그때 나이가 이미 60대 후반이었던 것입니다. 충렬왕은 그러나 간곡히 타일러 사표를 되돌려주고는 제2차 일본 원정군의 고려군 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또 다시 惡役(악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 제2차 일본 원정군의 규모는 제1차 원정 때보다 네 배나 되는 엄청난 함대였습니다. 서기 1281년 5월 합포, 즉 마산을 떠난 몽골 고려 漢族 연합군은 병력이 4만에 함선이 9백 척이나 되었습니다. 이 함대를 東路軍(동로군)이라 불렀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중국 남쪽에서 출항한 강남군은 옛 南宋(남송)의 해군을 主力(주력)으로 하여 함선이 3500척, 병력은 10만이나 되었습니다. 江南軍(강남군)과 동로군을 합치면 15만이 되는 원정군이었습니다. 이는 당시까지의 세계전쟁사에서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중세의 프랑스와 영국이 싸웠던 백년전쟁 때 도버 해협을 건너 프랑스에 상륙한 영국의 군대는 1만을 넘었던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아마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제2차 일본원정 규모의 上陸(상륙)전쟁은 없었을 것입니다. 15만이 움직인 이 원정은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전쟁이었습니다. 이때 일본이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 의해서 점령되었더라면 동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고 임진왜란도 日帝(일제) 36년의 식민지 시대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마산을 먼저 출항한 동로군은 대마도와 잇기 섬을 점령한 다음 일본의 큐슈 후쿠오카에 상륙하려고 했으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 가마쿠라 막부 군대가 완강하게 저항하여 일단 다카시마 섬으로 철수하였습니다. 여기서 중국 남쪽에서 출항한 강남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느라고 한 달여를 보냈습니다. 이때 몽골 군대의 장수 흔도와 홍다구는 강남군이 올 기한이 지났으니 철수하자는 주장을 내어놓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김방경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석 달 식량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아직 한 달분의 식량이 남아 있다. 그러니 강남군이 도착할 때를 기다려 반드시 일본을 격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며칠 있다가 강남군이 도착하여 合流(합류)했습니다. 이 사상최대의 함대는 힘을 모아서 후쿠오카를 치는데 또 태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8월에 폭풍을 만나서 모두 물에 빠져죽고 그 시체들이 썰물과 밀물을 따라 포구에 밀려들어 포구가 시체로 가득 찼으므로 시체를 밝고도 걸어다닐 수가 있을 지경이었다. 그로 하여 마침내 回軍(회군)하였다.〉
  
   15만의 원정군 가운데 살아서 돌아간 사람은 김방경을 포함하여 약 3만이었다고 합니다.
  
   두 번의 몽골침략을, 태풍의 도움으로 물리쳤던 일본은 이 태풍을 가미카제, 즉 神風(신풍)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두 번째 원정에서 왜 김방경이 철군을 반대하고 끝까지 싸우려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의 짐작으로는 원정 준비 때문에 하도 고려백성들을 고생시켰기 때문에 이번에는 양단간에 결판을 내어서 다시는 전쟁준비를 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의 고려 인구는 지금 한반도 인구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나라 형편에 두 번의 전쟁을 위하여 근 2000척이나 되는 배를 만들고 수많은 군사를 내었으니 그 고생이 어떠했겠습니까. 전쟁 준비의 惡役을 맡아서 백성들을 부려야 했던 김방경의 고민 또한 상상이 가는 것입니다.
  
   김방경은 나이 일흔둘에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김방경이 하루는 고향인 안동으로 성묘를 가는데 왕이 김방경의 아들을 수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일행이 안동에 도착하니 김방경의 친구들이 며칠 묵고 가라고 붙들었습니다. 김방경은 아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금 가을 곡식이 다 익어 베어들일 때가 되었다. 백성들의 힘이 부족하여 다른 일을 할 짬이 없는데 어찌 오래 머물러 있어 그들을 번거롭게 만들겠느냐. 너는 이 길로 곧 돌아가도록 해라.”
  
   김방경은 長壽(장수)했습니다. 그는 여든아홉에 죽었습니다. 고려사는 그를 이렇게 평하고 있습니다.
  
   〈김방경은 충직하고 진실하고도 후하였으며 도량이 아주 넓어서 사소한 일에 구애됨이 없었고 엄격하고도 굳세었으며 항상 말이 적었다. 아들 조카에 대해서도 반드시 예의에 맞게 언동을 취하였으며 일을 처리해나가는 데 조금도 착오가 없었다. 자기 몸을 잘 거두고 근면하고 절약하는 氣風(기풍)을 견지하였으며 대낮에는 드러눕는 일이 없었고 늙었으되 머리칼이 검은 채로 남아 있어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능히 견디었으며 병환이라곤 없었다. 또 옛 친구들을 잊어버리지 않고 누가 죽었다 하면 꼭 문상하러 갔으며 일평생 임금의 잘못을 남에게 말하지 않았고 현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된 뒤에도 나라 일을 집안 일 근심하듯 하였다. 그는 죽은 뒤에 안동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했으나 그 당시 정권을 잡았던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여 禮式(예식)대로 장사지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후에 왕이 이것을 후회하였다.〉
  
   김방경의 생애와 이순신의 생애에서 공통점이 있다면 모함을 당하고 나서도 조국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고서 모든 것을 던져 나라와 백성을 위했다는 점입니다. 亂世(난세)에 태어난 이 두 巨人(거인)은 조정이나 신하나 백성들에 대하여 섭섭한 생각이 있더라도 그런 것들을 사소하게 넘기고 오히려 국가라는 大義(대의)를 위하여 全생애를 투척했다는 점에서 위대한 한국인이었습니다. 국가에 대한 그런 충성은 백성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가슴 가득히 깔려 있었기 때문이며 그런 점에서 충무공과 김방경은 위대한 휴머니스트였다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두 분의 생애에서 위인들을 괴롭히고 巨木(거목)을 찍어내리려고 하는 추악한 소인배들의 모습도 함께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민족의 피 속에 흐르고 있는 빛과 그림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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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경제개발을 성공시킨 정치군인

 


 

  

   朴正熙는 銃口의 힘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점에서 李舜臣이나 金方慶과는 다르고 金庾信과 비슷하다. 이순신과 김방경은 정치에 복종한 순수한 군인, 김유신과 박정희는 군대를 정권 장악에 이용, 통일대업과 조국근대화에 성공한 정치군인이다. 가야계인 김유신은 원천적으로 王이 될 수 없었기에 선덕여왕, 김춘추, 문무왕을 밀어 권력의 안정을 뒷받침하였다. 박정희는 자신이 직접 군사혁명을 일으켜 약800년만에 처음으로 군인집권 시대를 열었다. 군인이 통일에 성공한 적은 있으나 경제개발에 성공한 예는 매우 드문데 박정희는 그런 예외적 존재이다. 성공한 정치군인 김유신과 박정희, 고생한 순수군인 김방경과 이순신의 다른 운명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군인과 국가의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 바가 크다 할 것이다.
  
   李光耀가 꼽은 아시아의 3大 지도자
  
   1979년 10월 訪韓한 싱가포르 李光耀 수상은 발전상을 보고는 라이벌 의식을 갖는 것 같았다고 당시 그를 안내하였던 金聖鎭 당시 문공부 장관이 말한 적이 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은 "응. 지금 싱가포르 하고 있는 걸 보면 잘 하고 있지. 잘 하고 있지만 거 뭐 조막만한 거 가지고 그것도 못하면 어떻게 해?"하며 싱긋 웃었다.
   1979년 10월19일 청와대에서 환영만찬이 열렸다. 李光耀는 朴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金 장관은 1991년에 駐(주)싱가포르 대사로 임명받아 李光耀와 재회했다. 1994년 1월19일, 대우그룹 부회장으로 있던 그는 月刊朝鮮을 위해 李 前수상과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鄧小平(등소평)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약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한 사람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 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 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당시 金泳三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말을 앞세우면서 前 정권을 격하하고 있었다.
  
   1961년, 1972년, 1979년의 한국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중 87위로 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 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 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 달러로서 세계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 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10배, 한국은 약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中,日,獨에 다음에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기준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維新期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고도성장과 균형발전을 겸했다
  
   세계은행이 1965-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 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칠레를 빼고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下位 40%의 성장률이 전체 평균과 비슷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권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교했다. 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 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의 다른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NP 성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 소득 下位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게도 똑 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성이 강하여 南美式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Liberal Authoritarian-자유지향적 권위주의 지도자
  
   富者나라가 아니면 民主국가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있다. 정치학자 아담 프저워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가 만든 통계이다. 1950-199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현재 가치 기준) 이하인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시험했을 경우 그 평균수명은 8년밖에 되지 않았다. 1500~3000 달러 사이에선 평균수명이 1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 이상인 민주국가가 전복되어 독재로 돌아갈 가능성은 500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0달러 이상인 32개 민주국가는 단 한 나라도 체제가 붕괴된 적이 없다. 반면, 그 이하 69개 국가 중 39개가 민주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약56%의 사망률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도 되지 않았던 李承晩 정부 시절에 왜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은(李대통령은 불완전한 민주주의는 했다), 세종대왕에게 왜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을 부자나라로 만들고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도 무리다.
   양식 있는 학자들은 박정희나 이승만을 독재자라 부르지 않는다.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경제를 건설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자유 지향적 권위주의적 지도자’, 즉 ‘Liberal Authoritarian’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승만은 6·25 전쟁 중에도 국회를 해산하지도 선거를 중단하지도 언론을 검열하지도 않았다. 민주주의를 시작한 지 3년째인 나라가 이 정도 하였다면 잘 한 것 아닌가? 朴正熙는 5·16과 10월 유신으로 두 차례 憲政질서를 중단시켰지만 사후에 선거를 통하여 그 조치에 대한 追認(추인)을 받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朴正熙를 싫어하다가 존경하게 된 카터 선거 참모의 고백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李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성공모델을 만든 분이고 朴대통령은 제도정비와 경제발전을 통해서 민주주의 국가가 작동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분이다.
   민주주의는 외양이고 그 속은 안전, 복지, 자유이다. 朴대통령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안전과 복지를 확보했으므로 3분의 2 민주주의를 이룬 것이다. 안전과 복지가 확보되면 인간은 자유를 희구하게 된다. 朴정권에 대항해서 그 자유를 요구했던 소위 민주화 세력은 3분의 1 민주주의를 한 셈이다.
   朴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는 외국인의 평가를 나의 견해로 삼아 대신 소개한다. 윌리엄 H. 오버홀트가 1990년대에 쓴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한때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反韓的(반한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저자가 朴正熙의 한국을 재평가하면서 開途國(개도국)의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 당하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民權(민권)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모택동) 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트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이라고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最惠國(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선행(先行)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후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서구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國益(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私有化(사유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넷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하자말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敵對(적대)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외자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에.
   朴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과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동시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正熙는 현대식 국가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미군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고위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식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퀴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가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朴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오버홀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 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터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등소평)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