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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마음의 양식/좋은글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지송나무 2015. 6. 23. 11:07

재미있는 시평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끄떡없는

                    끄떡없는 어머니의 모습.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알았던 나.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시평>

 

너무나 진솔해서,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 시

글은 진실해야 힘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이 글이 진정 그랬습니다.

 

오래 전에 이 글을 읽고 한 방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저 같이 부모에게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 사람이 들으라고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보고는 저도 놀랐습니다. 이 시는 아주 많은 사람을 흔들어놓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주기만 하는 삶을 살고 자식은 받기만 하는 인생을 삽니다. 이러한 불공평한 일은 왜 생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일을 아주 솔직하고 꾸밈없이 적어놓은 글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이글을 공감하고 감동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처럼 이 글을 읽고는 충격을 받았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헌신에 고마워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는 당연히 그러한 삶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자식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그 깊은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이 글을 읽고는 아파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고는 처음으로 어머니의 삶을 돌아보게 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미 과거에 알았지만 제대로 어머니에게 해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식이기 때문에 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생각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마다의 가슴에 저마다의 사연으로 어머니는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떠올려도 가슴이 아릿해지는 이름이 어머니지요. 내 인생을 만들어주었다는 것만큼 내 인생을 위해 어머니 자신의 열정과 삶 전체를 쏟아 부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으로 돌아보게 하는 이름입니다. 가난하고 궁핍의 강을 건너는 인생의 집에서 하늘 한 번 편히 바라 볼 시간 없이 살아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살을 버리고, 자식을 위해 취미를 버리고, 모자라는 밥을 혼자 굶는 것으로 감당하면서 견뎌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진솔해서,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읽어야 하는 이 시를 지은 사람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어느 유명시인의 시보다도 감동적인 글의 주인을 몰라 아쉽습니다. 이름이 없이 인터넷을 통해서 파급되고 있었고, 어떤 곳에는 '심순덕'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어떤 곳은 에 나온 내용이라고도 합니다. 지은이는 심순덕 시인이고 에 나온 것은 확실한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내용이라는 반증은 공감의 폭이 그만큼 넓고 깊다는 데에서 확인되는 것이지요. 시적인 완성도가 높아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은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명을 울려서 그 울림이 한결 더 커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실은 사람을 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한 개인이 겪은 사실적인 상황을 그대로 옮겨 놓아 읽는 이로 하여금 정서의 속갈피를 자극하는 것이었지요.

 

한국의 어머니들이 가진 자식에게 모두를 쏟아 붇는 미덕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공통점이지만 누구 하나 진실을 감동적으로 이렇게 그려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른 시인들은 시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미화시킴으로써 진실성을 도리어 무너뜨리는 누를 끼쳤습니다. 이 시는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시를 성공시키는 요소가 된 것이지요. 

 

이 시는 많은 곳에 올려져 있음에도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행 나눔도 시의 내용도 조금씩 달라 어떤 것이 원본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감동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변형이 되었어도 원형은 깨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의 완성을 위한 여러 가지 기술적인 방법을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변형에 그리 취약하지 않았던 게지요.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보릿고개를 넘어온 세대가 지금의 4,50 대의 부모들입니다. 부모, 아비와 어미라는 이름은 참 난감한 이름이지요. 자식을 낳는 순간 모든 짐을 짊어져야 하는 숙명을 가진 이름이거든요. 자식은, 부모가 낳아주었지만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미와 아비가 선택해서 태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미와 아비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은 태어났다는 것이지요.

 

어찌된 일인지 아비와 어미는 자식을 낳는 순간부터 모든 정열과 삶을 자식을 위하여 쓰게 됩니다. 헌신적인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헌신은 일방적이어서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근대 이후에 그렇다는 이야기지요. 근대 이전에는 자식의 효가 강조되어 보상을 받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보상이 없는 일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의 아비와 어미입니다. 내리사랑은 동물적인 사랑일지도 모르지요. 인류학이나 동물생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는 종족보존을 위한 초보적인 생래현상일지도 모릅니다. 아비와 어미가 다 같이 자식을 위하여 인생을 바치지만 한국사회라는 가정 내에서 불평등한 구조를 받아들인 마지막 희생자는 어미라는 이름의 소유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이 남는 곳에서는 어미의 희생이 극대화되지 않습니다. 어미의 희생은 재화가 모자라는 곳에서 눈물 나지요. 따뜻한 밥을 지어서 가족이 둘러앉았습니다. 배고픈 가족들이 모여 앉아 맛있게 먹고 있는데 밭일을 하고 지친 몸으로 들어와 밥을 손수 지은 어머니는 밥이 모자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숟가락을 들면 누군가 하나는 굶어야 합니다. 허기진 배를 참으면서 밥맛이 없다며 물러섭니다. 늘 있어온 일이라 어린 자식들은 상황파악을 하고 있지 못합니다. 누구 하나 자주 있어 온 자연스러운 이 일이 어머니의 배고픔과 연결되어있는지를 알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어머니는 도리어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 남편과 아이들이 대견스럽습니다. 허리가 휠만큼 일을 해도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것은 여전합니다. 가난은 사람을 참혹하게 합니다. 가난은 다만 불편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만큼의 가난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가난이지요. 먹을 것이 모자라는 절대적인 빈곤 앞에서 불편을 이야기 하는 것은 호사스러운 일이지요.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남과 여가 다르지 않음에도 이 사회는 여자라는 이름의 존재에게 아프게 하지요. 여자가 아이를 낳으면 어미가 되지요. 어미의 다른 이름은 엄마지요, 어머니이고요. 지금 아이들에겐 엄마라는 이름으로 익숙해진 이름이기도 합니다. 모든 생명은 엄마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생명은 엄마의 자식입니다.

 

삶의 길은 가파르고 거칠지만 꽃밭도 있고 사랑도 있습니다. 삶은 고난만이 아닙니다. 하지만 가난은 삶을 고난으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화는 무한정하지 않습니다. 돈의 양도 정해져있고 먹고 입을 것도 일정량이 있습니다.

 

저는 감히 이런 말을 하고는 합니다. 부자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고요. 이 세상에 정해진 양을 힘이 강하다고, 자신이 똑똑하다고 해서 더 많이 가진 것이 자랑이 될 수 없지요. 그렇다고 부자가 욕을 먹어야 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이 세상은 자본주의 구조 하에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거든요. 어찌 되었든 가난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한 집안의 어머니 역할은 심각해집니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더구나 농경사회에서 가난의 짐은 여성들이 먼저 짊어져야 하거든요. 잘못된 것임에도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강요 받아온 측면이 있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에는 눈물이 숨어있습니다. 가만히 불러 보기만 해도 눈물이 먼저 흐르려 합니다. 그만큼 어머니는 자식에게 베풀다가 쭉정이만 남아서 한 없이 가벼워지는 존재였지요. 늦은 가을날 바람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다 바람이 멈춘 자리에 수북이 쌓여 봄이 올 때까지 사그라지는 낙엽처럼 쓸쓸한 이름입니다. 가난과 고난이 덮친 집에서는 어머니의 역할이 더욱 애틋하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자신의 몫까지도 자식에게 나누어주는 눈물겨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여자는 어머니가 되는 순간 완성됩니다.

 

여자가 엄마가 되는 순간 여자는 다시 태어나나 봅니다. 번데기가 나비로 변해 날아오르는 신비를 목격한 사람은 알지요. 그 신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말입니다. 여자는 두 번 태어나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여자는 사람으로 태어나고 어머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지요. 여자는 어머니가 되는 순간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세상의 아픔을 받아들이는 자세로 변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자식의 짐을 대신 짊어지면서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힘이 있습니다.

 

세상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내 엄마가 남보다 잘 나서 엄마가 아닙니다. 내 엄마가 남보다 많이 배워서 엄마가 아닙니다. 엄마라는 이름에는 신비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덜 배우고 힘없는 엄마에게서 더 큰 힘이 나오는 걸 보게 되는 게지요. 사랑은 지식으로 하는 것이 아님을 저는 압니다. 가슴으로 하는 게지요. 가슴의 온도가 뜨거운 사람은 다른 소소한 부족함을 넘어서거든요.

 

신은, 모든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없어서 대신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말을 믿고 싶어지는 게지요.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머니라는 존재는 신의 자식이 아닙니다. 사람의 자식인 것이었습니다. 똑같이 아프고 힘들어하고 슬퍼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한 없이 힘들어질 때면 기댈 곳이 없습니다. 세상은 여자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에게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탓하고 원망하기에는 나약합니다. 도전보다는 견디어야 하는 인고가 먼저임을 이 세상은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어머니가 힘이 들 때면 어디에 기대야 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막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무너지고 주저앉는 육신을 보게 됩니다. 자식에 대한 베풂이 모자란 어머니는 자책이 먼저 앞서고 있습니다. 내가 모자라 자식을 고생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의지할 데 없는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 어려운 세월 속에서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픔을 견디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자신을 길러준 어머니가 고맙고 보고 싶어집니다. 너무나 보고 싶고 자신의 삶이 힘이 들어서 참고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습니다. 너무나 슬프게 울고 있습니다. 자식에게 들키지 않으려 숨죽여 우는 어머니의 모습은 평소 보았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닙니다. 강인한 어머니였습니다. 세상의 거친 것들을 받아들여 순화시키는 힘이 컸던 어머니였습니다.

 

헌데 그러한 어머니가 울고 있습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숨죽여서 우는, 무너진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식은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같은 몸을 가진 존재였음을 비로소 보게 되었습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외할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알았던 나.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입장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어머니에게서 배웠습니다. 생명을 받아서 태어나 가장 먼저 한 일이 어머니의 젖을 빠는 일이었으니 어머니는 생명줄이었습니다. 세상을 사는 방법도 어머니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어머니의 말과 행동에서 자식은 배우고 익혔습니다. 그렇게 절대적인 어머니였기에 어머니는 모든 일을 혼자서 해결하고 힘이 들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손이 얼만큼 차가운 물로 빨래를 하고, 허리가 휠만큼 힘든 일을 해도 당연한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돌아가신 할머니, 어머니의 어머니가 보고 싶으시다고 할 때도 그냥 해보는 소리인 줄만 알았더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 없이 소리죽여 우는 어머니를 본 후론 어머니가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위하여 눈물을 참고, 힘든 일을 하면서 투정 한 번 부릴 수 없는 어머니는 가엾은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머니가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대우받아야하고 누구보다도 먼저 존경받아야하는 존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람의 가슴에 신의 자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자로 태어나서 어머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분명 힘들고 아픈 과정을 거쳐야 하는 지난한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헌데 자식이란 짐을 짊어지면서 살아가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짊어진 짐이 생명을 가져서 자라나면서 더 무거운 짐이 되는 특성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기쁨을 자식에게 거는 어머니라는 이름에 거룩함이 보입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참 아름다운 이름임에 틀림없습니다.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되면 어머니는 늙어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떠나가면서 불현 서쪽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노을처럼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에게 등불이 되어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입니다. ‘고맙습니다.’

 

                - 글, 신광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