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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전통과 역사/고전·전통찾기

조선조 명문가의 상징 기로소 회원

지송나무 2020. 4. 13.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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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조 명문가의 상징 기로소, 회원수 2위는 안동 김씨, 1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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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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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국대 분당한방병원 내과 과장
     
    입력 : 2014.12.03 08:04
     
  •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경로사상이 있었고 임금이 직접 경로정신을 실천함으로써 노인을 존경하는 기풍을 조성하며 노인으로 하여금 여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게 하기 위한 제도가 있었습니다. 그런 제도 중에 구체적인 것으로 ‘기로소(耆老所)’라는 명예기구가 있었습니다. 기로소는 조선시대에 연로한 문신(文臣)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되어 왕과 조정 원로의 친목, 연회 등을 주관하였는데, 1394년부터 1909년까지 존속되었습니다.

    기로소의 유래

    기로소는 1394년에 태조 이성계가 60세를 넘자 기사(耆社)라는 명예관청을 설치하여 70세 내외의 정2품 이상의 관료를 선발하여 기사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임금 스스로도 이름을 올린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올린 신하들에게 논밭과 노비, 고기 잡는 기구 등을 하사하고 매년 봄과 가을에 군신이 함께 어울려 연회를 베풀며 즐겼습니다. 태종 즉위 초에 이것을 본격적으로 제도화하여 전함재추소(前銜宰樞所)라고 하다가 세종 때 치사기로소(致仕耆老所)로 개칭하여 ‘기로소’가 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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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조 이성계
  • 태조 이성계
     
     

    70세까지 장수한 중신들은 누구나 기로소에 들어갔을까?

    조선 중기 이후에는 기로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제한을 두었습니다. 나이만 되면 무조건 되는 것이 아니고 문신으로서 정2품 이상의 관직을 거치고 70세 이상인 자로 한정하였는데, 반드시 문과에 합격했던 자만이 가능했습니다. 즉, 음직(蔭職)이나 무과 출신자에게는 입사 자격을 주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나이와 벼슬 품계에 한 가지 더하여 인격의 3요소까지 갖추어야만 입사가 가능했으니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조선 말기의 헌종임금 때 정리된 ‘기사제명록’에는 572명이 기록되어 있고 그 중 14명이 연령 미상입니다. 70세가 되어 벼슬에서 물러난 치사(致仕)자가 130명인데, 그 중에 불과 50여명만 기로소에 입사가 되었던 것이죠. 심지어 70세에 입사한 신하는 20명뿐이고 나머지 536명은 71세를 넘어 수년 내지 십여 년이 지나서야 입사가 되었습니다.

    기로소에서 입소한 중신들에게 준 것은?

    임금의 탄일과 설날, 동지, 그리고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왕이 행차할 때, 모여서 하례(賀禮)를 행하거나 중요한 국사의 논의에 참여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사례(大射禮), 즉 활쏘기 대회도 하였는데, 성적에 따라 우수한 자에게는 활을 하사하고 성적이 좋지 않는 자에게는 벌주를 내렸다고 합니다. 벌주를 마시지 않으려고 평소 활쏘기 연습도 했을 것이니 운동이 되지 않았나 싶군요.

    그리고 기신들에게 하사품을 지급하였습니다. 쌀이나 한약은 매월 지급했고, 주식과 의복을 비롯하여 과일, 해초류에 세찬(歲饌)까지 지급하여 노신들의 영양보충에까지 신경을 썼습니다. 또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 그리고 생일, 회방(回榜), 회혼(回婚) 외에 자손 및 서손(婿孫)들의 대소과(大小科) 축하연에 드는 비용 및 부의금도 지급하였습니다. 한약재를 살펴보면 여름에 필요한 제호탕(醍醐湯)과 익원산(益元散), 우황청심원(牛黃淸心元), 안신환(安神丸), 소합환(蘇合丸), 그리고 앵두(櫻桃), 우유(牛乳) 등도 있습니다. 이처럼 양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잘 먹을 수 있고 계절에 따라 필요한 한약 처방과 구급약도 받아 제때 복용할 수 있으니 노인의 건강관리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겁니다.

    국가에 헌신한 노신들이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정말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이죠. 후생복지가 잘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그래서 기로소에 입소하는 것을 개인의 영광은 물론이고 ‘가문의 영광’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게다가 기로소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참여하는 특성상 관아의 서열에서는 으뜸을 차지하였던 것이죠. 물론 70세가 넘은 임금이 많지 않았기에 기로소에 이름을 올린 임금은 불과 몇 명뿐입니다. 그런데 왕의 경우에는 70세가 되지 않아도 입소하였습니다. 특별 대우였죠. 태조는 60세에 기로소를 만들면서 들어갔고, 숙종은 59세에 입소하였으며 영조와 고종은 51세에 입소하였습니다. 당연히 숙종과 영조 때 하사품이 더욱 풍족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장수집안이고 명문집안이라고 할 수 있고, 장수 DNA가 전해지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기로소 배출 순위가 조선조의 진짜 명문과 문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1위는 파평 윤씨 23명, 2위는 연안 이씨, 청송 심씨, 안동 김씨 각 21명, 5위는 동래 정씨와 남양 홍씨 각 20명, 7위는 한산 이씨와 안동 권씨 각 19명, 9위는 대구 서씨와 풍양 조씨 각 16명씩입니다. 그런데 왕족인 전주 이씨는 48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70세에 퇴직을 요청한 신하 중에 특별한 경우에 지팡이를 하사하는 ‘사궤장(賜几杖)’ 제도가 있었습니다. 최고의 영예가 되었고, 재물도 하사하고 그 자손에게는 특채의 혜택까지 베풀었다고 합니다. 사궤장자를 배출한 가문으로는 전주 이씨, 파평 윤씨, 동래 정씨, 광주 이씨, 안동 김씨를 비롯하여 총 44가문에 64명입니다.

    일반 백성들 중에 노인을 대접하는 행사는?

    조선시대에 실시된 기로 정책 중에 가장 중요한 행사 중의 하나로 ‘양로연’이 있었습니다. 기근이 드는 경우에도 변함없이 시행되어야 할 국가의 중대사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 이래 10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연초에 쌀을 주고 매월 술과 고기도 주었고, 9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매년 술, 고기와 작(술잔의 일종)을 주고, 80세 이상의 노인에게는 지방관으로 하여금 향응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양로연에는 신분의 존비를 문제 삼지 않았기에 천인들도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기로소 들어간 인물들

    조선시대 전 기간을 통해 기로소에 들어간 사람은 7백여 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최고령자는 현종 때의 윤경(尹絅, 1567~1664)이라는 분으로 98세였고, 다음으로 숙종 때 97세의 이구원(李久源, 1579∼1675)과 96세의 민형남(閔馨男, 1564∼1659) 등이 있었습니다. 세종대왕 때의 명재상인 황희(黃喜, 1363~1452)도 90세까지 장수했으니 당연히 ‘기로소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밖에도 조선 초기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용비어천가를 짓고 한글창제에 참여한 정인지(鄭麟趾, 1396∼1478), 어부가를 지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 영의정을 5번이나 지낸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 1547~1634), 조선 중기 한문학 4대가로 동의보감 서문을 지은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金堉, 1580~1658), ‘동창이 밝았느냐’를 지은 남구만(南九萬, 1629∼1711) 등이 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 왕과 기로소 신하들의 연회를 기록한 '기사계첩'.

 

     정지천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