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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서산대사의 일생

지송나무 2019. 8. 25. 15:20



서산대사의 일생

서산대사 영정 


 
1520(중종 15)∼1604(선조37). 조선 중기의 승려·승군장(僧軍將).
완산 최씨(完山崔氏). 이름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호는 청허(淸虛). 별호는 백화도인(白華道人) 또는 서산대사(西山大師)·
풍악산인(楓岳山人)·두류산인(頭流山人)·묘향산인(妙香山人)·
조계퇴은(曹溪退隱)·병로(病老) 등이고 법명은 휴정이다.
 
평안도 안주 출신으로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어머니 김씨는 노파가 찾아와 아들을 잉태하였다며 축하하는 태몽을 꾸고
이듬해 3월에 그를 낳았다.

3세 되던 해 사월초파일에 아버지가 등불 아래에서 졸고 있는데
한 노인이 나타나 “꼬마스님을 뵈러 왔다.”고 하며 두 손으로
어린 여신을 번쩍 안아 들고 몇 마디 주문을 외우며 머리를 쓰다듬은 다음
아이의 이름을 ‘운학’이라 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뒤 아명은 운학이 되었다.
 
어려서 아이들과 놀 때에도 남다른 바가 있어 돌을 세워 부처라 하고,
모래를 쌓아 올려놓고 탑이라 하며 놀았다.
 

9세에 어머니가 죽고 이듬해 아버지가 죽게 되자  안주목사 이사증
(李思曾)을 따라 서울로 옮겨 성균관에서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과거를 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친구들과 같이 지리산의 화엄동(華嚴洞)·
칠불동(七佛洞) 등을 구경하면서 여러 사찰에 기거하던 중, 영관대사(靈觀大師)의 설법을 듣고 불법(佛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곳에서 ≪전등 傳燈≫·≪염송 拈頌≫·≪화엄경 華嚴經≫·≪원각경 圓覺經≫·
≪능엄경 楞嚴經≫·≪유마경 維摩經≫·≪반야경 般若經≫·≪법화경 法華經≫ 등의
깊은 교리를 탐구하던 중, 깨달은 바 있어 스스로 시를 짓고
삭발한 다음 숭인장로(崇仁長老)를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하였다.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
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을 모시고 계(戒)를 받았다.
 
그 뒤 영관으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하다가 1549년(명종 4)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선교양종판사직이 승려의 본분이 아니라 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
금강산·두류산·태백산·오대산·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
(保任:깨달음을 더욱 갈고 닦음)하였고,후학을 만나면 친절히 지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정감록 鄭鑑錄≫의 미신에 의하여 정여립(鄭汝立)이
왕위에 오른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려 역모(逆謀)를 꾀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역모에 가담한 요승 무업(無業)이 휴정과 유정(惟政)이 자신과 함께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주장하여 투옥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초(供招)가 명백하였으므로, 선조는 무죄석방하면서 손수 그린 묵죽(墨竹) 한 폭을 하사하였다. 휴정은 그 자리에서 『경차선조대왕어사묵죽시운 敬次宣祖大王御賜墨竹詩韻』이라는 시를 지어 선조에게 올렸다. 이에 선조도 그의 시에 감동하여 한 수를 지었는데 ≪청허당집 淸虛堂集≫ 권수에 수록되어 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피난하였다.
이 때 선조는 묘향산으로 사신을 보내어 나라의 위급함을 알리고
 휴정을 불렀다.
노구를 무릅쓰고 달려온 휴정에게 선조는 나라를 구할 방법을 물었고,
휴정은 “늙고 병들어 싸움에 나아가지 못할 승려는 절을 지키게 하면서
나라를 구할 수 있도록 부처에게 기원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통솔하여 전쟁터로 나아가 나라를 구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곧 전국에 격문을 돌려서 각처의 승려들이 구국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이에 제자 처영(處英)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유정은 금강산에서 1,000여 명의 승군을 모아 평양으로 왔다.
 
그는 문도 1,500명의 의승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키고
스스로 의승군을 통솔하였으며, 명나라 군사와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이라는 직함을 내렸으나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군직을 제자인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환도할 때 700여 명의 승군을 거느리고 개성으로 나아가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맞이하였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그는 승군장의 직을 물러나
묘향산으로 돌아와 열반(涅槃)을 준비하였다.
 
이 때 선조는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라는 최고의 존칭과 함께
정2품 당상관 직위를 하사하여 나라에 있어서의 공과 불교에 있어서의
덕을 치하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곳을 순력하다가 1604년 1월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설법을 마치고 자신의 영정(影幀)을 꺼내어 그 뒷면에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
(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는 시를 적어
유정과 처영에게 전하게 하고 가부좌하여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나이 85세, 법랍 67세였다. 입적한 뒤 21일 동안
방 안에서는 기이한 향기가 가득하였다고 한다.
 

묘향산의 안심사(安心寺), 금강산의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를 세웠고, 해남의 표충사(表忠祠), 밀양의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하였다.

서산대사의 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