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10大 天才
영국의 과학지 Nature 가 선정한 세계 10大 天才
영국의 과학 전문지 Nature는 인류 역사를 바꾼 세계의 천재 1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선정 단체가 과학 분야를 다루는 단체인 만큼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천재들이 다수를 차지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뜻밖의 결과였다. 최고의 천재 자리에는 과학자로서의 재능도 많았지만 화가로서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올랐다. 이 외에도 아테나 여신상의 건축가 피디아스, 미국 독립선언문의 주인공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과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수위를 차지했다. ‘천재’와 그 이름이 동격으로 취급되는 아인슈타인은 턱걸이로 겨우 10위에 올랐고, 발명의 아버지 에디슨과 슈퍼 컴퓨터 두뇌를 가진 빌 게이츠는 순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도대체 선정기준이 무엇이길래 에디슨도, 빌 게이츠도 제외된 걸까. 정답은 특정 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형 인간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사실 선정된 천재들의 명단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두 거장,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을지언정 ‘색채론’의 기본을 확립한 괴테 역시 그 이름을 올렸다. 많고 많은 미국의 대통령 중에 한명일 뿐인 토머스 제퍼슨은 정치가이자 변호사였으며, 건축가이자 언어학자였을 만큼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만능이었다.
그러니 전형적인 실험실형 발명가였던 에디슨이나 컴퓨터 박사 빌 게이츠는 제외될 수밖에.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도 도달하지 못한 신의 경지에 도달한 10명의 천재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보다 편해지고 보다 여유로와졌음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 천재성과 함께 창조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천재들의 신화를 벗겨보자.
1.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최초의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다빈치의 미술 작품은 치밀하도록 과학적인 그의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의 미술 작품에 나타나는 완벽한 조화와 신비로움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름 앞에 붙은 ‘과학의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다빈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 누구보다도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는 미술, 음악, 건축, 군사공학, 도시계획, 비행 기계의 고안을 포함한 다양한 발명과 함께 해부, 요리, 식물학, 의상 및 무대 디자인, 해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예술가로서의 업적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대에 여러 자연과학 분야에 걸친 다양한 관찰과 실험을 하고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인류 최초의 비행으로 기록된 라이트 형제의 역사적 발명품의 시초가 된 비행기 설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실험 관찰과 이론이 종합되고 정형화되어 자연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 과학이라면, 아직 망원경과 현미경이 없던 시대에 살았던 다빈치의 관찰이나 관찰 결과의 수학적 분석은 제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자연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 모든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그에게 ‘인류 최고의 창조적 천재’라는 호칭만큼 탁월한 수식어는 없다.
2.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
위대한 심리 치료사,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재 다능한 ‘르네상스형 인간’이 선정 기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전형적인 문학가인 셰익스피어가 두 번째로 선정된 데에는 어딘지 모순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 불후의 명작만 남긴 게 아니다. 시인이자 극작가로서 삶의 희비극을 가장 밝은 눈으로 꿰뚫어보고 생각의 깊이를 제공한 선지자였다. 4백년 전의 셰익스피어에게서 오늘의 지혜를 발견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런던 그린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자를 위한 셰익스피어 강좌’를 열어 화제를 모았 는데,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역할을 바탕으로 인간 경영과 인사관리 등의 리더십을, 극 중 주인공 간의 함수 관계로 기업 인수·합병, 공동 가치 추구 등의 경영 기술을 강의했다.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안토니오에게서는 설득 기술을, 햄릿이라는 우유부단한 인물을 통해서는 결단의 중요함을, <템피스트>의 등장인물인 프로스페로에게서는 책임과 승리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의 몸속에서 자신을 심리적으로 재생시키는 작업을 통해 수많은 종류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또한 극 중 인물에 몰입하는 ‘메소드 액팅(method acting)’의 숙달자이자, 인류 최초의 심리학자였던 셈이다.
3. 요한 볼프강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
최초의 색채 이론가, 요한 볼프강 괴테 어렸을 때부터 라틴어, 희랍어, 음악, 미술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괴테는 23세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4세 때 <파우스트>, 33세 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완성하여 다작가이면서도 대작가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괴테는 단순히 작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정치가, 행정가, 교육자, 과학자로서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1775년 바이마르를 방문한 그는 50여 년간 머물면서 바이마르를 고전주의 문학의 중심지로 이끌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학·해부학·광물학·지질학·색채론 등에 몰두하여 전 방위적인 재능을 펼쳤다. 그의 문학적인 명성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한 <색채론>은 괴테가 20여 년에 걸쳐 연구한 오랜 실험의 결과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괴테는 1786년 이탈리아 여행 시 그곳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실용적인 차원에서 채색의 규칙과 법칙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본격적으로 색채 연구에 들어갔다. 색채를 관찰자의 시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객관적인 실체로 파악한 뉴턴과 달리, 색채 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대립 관계로 보았던 그의 이론은 수학적인 체계가 없다는 이유로 물리학의 주류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새롭게 조명받았다. 색채에 대한 그의 실험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7가지 색밖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4.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인
불가사의를 창조해낸 사람들,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인 고대 이집트 왕가 무덤의 한 형식인 피라미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자 7대 불가사의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제4대 왕조였던 쿠푸 왕의 지휘 아래 약 10만 명의 인부가 3개월씩 교대하여 30년 이상 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피라미드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로 남서쪽 기제에 있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 높이는 137m로 40층 건물의 높이와 같으며, 무게도 6백만 톤이나 된다. 피라미드의 각 변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대피라미드엔 지구의 반지름이나 태양까지의 거리, 원주율이나 1년 날짜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피라미드의 높이는 정확히 태양까지 거리의 10억분의 1, 피라미드의 너비는 정확히 지구 반지름의 1천만분의1, 한변의 길이는 정확히 365.23인치로 1년의 날짜수와 같다. 피라미드를 건설한 사람들이 천재의 범주에 포함된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피라미드의 기이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피라미드의 한가운데와 높이의 3분의 2 지점에 어떤 물체를 놓아두면, 그 물체는 흔히 일어나는 변화를 겪지 않는다. 꽃은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고 마르며, 쌀은 썩지 않고 굳고, 면도날이나 칼날은 무디어지지 않는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그들,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인들뿐이다.
5.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di Lu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진정한 르네상스맨, 미켈란젤로 디 루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또 한 명의 천재가 전성기 르네상스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동시대를 살았던 다빈치의 천재성에 가려 ‘열등감에 가득찬 고독한 예술가’로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다빈치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바로크 예술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또 화가로서, 조각가로서, 건축가로서, 시인으로서 르네상스시대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맨이었다. 어릴 적부터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손꼽히는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문하에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당시 기를란다요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된 그림에도 질투를 느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는 ‘타고난 예술가’였던 모양이다. 그후 피렌체의 권력자인 메디치가의 조각 학교로 옮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고대 조각을 연구했다. 40여 점의 조각 작품. 회화로는 시스티나 성당 사면의 대벽화, 건축에서는 교회와 기념 건축물 등의 설계와 장식을 남겼고, 또 회화·조각·건축에 관한 습작·소묘·에스키스 등 약 8백여 점이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그중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만찬’은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작들이다.
6. 아이작 뉴턴 (Sir Isaac Newton,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17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뉴턴과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아인슈타인. 근대를 지탱해온 뉴턴적 우주관을 현대의 아인슈타인이 뒤집었기에 두 사람은 시대를 건너뛴 라이벌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그보다 더 자주 동일한 수식어로 묘사되는 과학사의 단짝 커플이다. 바로 ‘세상의 몰이해 속에 고독하게 연구한 천재’라는 것이다. 뉴턴이 창조성을 발휘한 부분은 풀이가 가능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당대의 학자들이 ‘빛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빠져있을 때, 뉴턴은 눈으로 검증할 수 있는 빛의 성질에 주목했다. 또한 자신이 상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로 실험해보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학에 관한 실험은 일반인들도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실험이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가 아니라, 실제 실험을 통해서 당시 유행하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사고 실험이 갖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뉴턴은 기존의 지식을 습득할 때도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깊이 이해할 때까지 읽고 또 읽는 스타일이었다. 집중력과 끈기, 노력을 몸소 실천한 뉴턴에게 한순간의 번득이는 영감이나 천재성이라는 말은 그의 창조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빛의 구성을 논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 <광학>은 30여 년에 이르는 오랜 연구 결과이며, 만유인력 역시 사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발표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전된 개념이다.
7.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 ~ 1826년 7월 4일)
한국에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이름이 알려졌던 것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클린턴의 스캔들이 터지던 무렵이다. 흑인 노예와의 스캔들로 인해 클린턴과 자주 비교가 되었던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바로 토머스 제퍼슨이다. 스캔들은 차치해 두고라도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잡았던 인물이자 미국인들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에 한명인 그가 어떻게 천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전형적인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그가 도시 계획자이자 건축가였으며, 농학자이자 언어학자였으며, 또한 위대한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오늘날 고고학계의 규범이 된 방법들을 이용해 최초로 과학적인 고고학 발굴을 한 아마추어 과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대통령이 되기 전 변호사로 일했던 제퍼슨은 재임 중에는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에 주력한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灣)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현재 미국의 영토를 확립한 뛰어난 도시계획자였고,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여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노력한 뛰어난 교육자였다. 뿐만 아니라 철학, 농학, 언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몬티셀로의 성인(聖人)'으로 불리었다.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해 놓았다는 묘비명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가 그의 이러한 업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8. 알렉산더 대왕 (라틴어: Alexander III Magnus 기원전 356년 7월 말 ~ 기원전 323년 6월 10일)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말 그대로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그가 10명의 천재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의 대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컸다.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알렉산더 대왕에게 윤리학,·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 ·측량 등을 시킨 일,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배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뛰어난 전략, 전술가였다. 종종 광개토대왕과 비교되면서도 광개토대왕 보다는 한 수 위라는 평가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시리아, 페니이카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와 인도의 인더강에 이르는 유럽, 아시아 대륙까지 점령한 그는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패한 적이 없을 만큼 뛰어난 전술을 자랑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33세의 일기로 죽기까지 그가 이름 지은 도시가 자그마치 70개에 달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나뉘어졌다.
9. 페이디아스 (고대 그리스어: Φειδ?α?, 기원전 480년경 - 기원전 430년)
건축 역사상 건축가가 밝혀진 몇 안되는 건축물인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 이 두 작품의 총지휘를 맡은 이가 바로 피디아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올림피아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이었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된 후 40년이 지났을 때 피디아스에게 주문되었는데, 8년 여의 작업 끝에 높이 12m, 길이 10m, 폭 6.65m 크기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피디아스는 제우스의 신성한 위엄과 너그러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은 18세기경부터 일어났지만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또한 피디아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로 8m나 되는 대형 아테나 신상을 만들었고,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을 조각하기도 했다. 덕분에 피디아스는 건축가에서 최고의 조각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0.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독일어: Albert Einstein,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
20세기 초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함으로써 근대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아인슈타인.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로 지칭되는 그가 고작 10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9명의 천재들에 비해 과학 분야에서만 뚜렷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 분야에서는 ‘최고’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르네상스형 인간’에는 미치지 못한 이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한낱 실험실과 과학적인 사고에 갇힌 천재는 아니었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는가 하면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그 무엇보다도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꿈꾼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1879년 독일 울름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이때 광양자설, 브라운 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 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또한 논란이 되었지만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 이론으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재위왕비이전 왕다음 왕
제2대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 | |
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 | |
헤누첸, 메리타테스 | |
스네프루 | |
제데프레 |
쿠푸(
재위:
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는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건설자이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유물을 남긴 쿠푸 자신의 유물로는 7.6cm의 작은 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름의 뜻은 "크눔으로부터 보호받다"이며, 그리스어로는 Χ?ωψ, 케오프스라고도 한다. 마네토의 연대기에는 수피스 1세로 되어있다
쿠푸는 선왕인 스네프루와 마찬가지로 시나이 반도 원정에 나섰다. 와디 마가라의 유적에는 쿠푸의 군대가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남쪽 아스완에 있는 엘레판티네 섬
투푸의 대피라미드
기자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대피라미드가 서 있다. 이것은 바로 쿠푸의 작품이다. 높이가 137.5m에 달해(건설 당시에는 146.6m) 지금까지 4천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건조물이었다.
쿠푸의 피라미드는 기자에 처음으로 위치한 피라미드이다. 그 이전의 파라오들은 다슈르와 사카라 등지에 피라미드를 조성했다. 쿠푸 이후 기자에 거대한 피라미드 단지가 조성된다.
대피라미드의 공사를 담당한 것은 건축가이자 쿠푸의 사촌인 헤몬이었다. 헤몬의 무덤도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건설기간은 20년이 걸렸다고 한다.현대 기술로도 이 대피라미드의 건축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경사로를 이용해 지었다는 가설이 있으나 현실성이 떨어지며, 헤로도토스가 설명한 것처럼 특별한 장치를 이용하여 네 면에서 동시에 블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 그나마 제일 신빙성이 있다.
쿠푸 파라오의 석관은 거대한 회랑을 따라 올라가면 피라미드의 핵심에 있는 방에 있다. 이 석관은 거대한 한 개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이다. 이미 선왕 스네프루의 시절에 한꺼번에 세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 정도로 갖춰진 왕국의 강력한 경제력과 이집트 북부와 남부에 걸친 쿠푸 왕의 활동, 수십만 이집트인들의 노력이 이러한 거대한 유적을 완성해 내었다.
대피라미드에 얽힌 전설
대피라미드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기에 이에 관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대피라미드의 공사가 계속되자 쿠푸는 더 많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딸 한명(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음)을 성매매를 하도록 하여 그 돈을 피라미드 공사비에 보탰다고 한다. 이때 이 공주는 화대 이외에 손님들에게 돌 한토막씩을 더 낼 것을 요구했고, 이것을 모아 자기 자신의 피라미드도 만들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 근처의 유적들
피라미드 근처에는 여러가지 추가적인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동쪽 통로 근처에는 쿠푸의 어머니인 헤테프-헤레스 1세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외에 왕비들의 피라미드 세 기가 발견되었다. 1954년에는 남쪽 면 근처에서 수천년 세월을 견딘 나무로 된 온전한 배 한척이 발견되었다.
▲ 발굴 된 나무 배
기타 유적
대피라미드의 남쪽 면에서 발견된 배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43m에 달했다. 30.8m의 구멍 안에 들어있던 것이 발굴되었는데, 옆에서도 유사한 배가 한 척 더(두 번째 배는 온전하지는 못하다) 발견되었다. 수천년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배는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오랜 복원작업 끝에 1982년부터는 발견장소 바로 위에 세운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수천년 세월동안 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이후에는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 명확한 해답은 없다.
가족관계
- 부모 : 스네프루, 헤테프-헤레스 1세
- 어머니를 알 수 없는 왕자들
- 왕자 제데프레 (제3대 파라오)
- 왕자 바네프레
- 공주 카메레르네브티 1세
- 왕비 헤누첸
- 왕자 카프레 (제4대 파라오)
- 왕자 쿠푸카에프
- 왕비 메리타테스
- 왕자 카와브
- 왕자 제데프호르
- 공주 메레산크 2세
- 공주 헤테프-헤레스 2세
● 피라미드 내부구조 <옮겨온 글>
영국의 과학지 Nature 가 선정한 세계 10大 天才
영국의 과학 전문지 Nature는 인류 역사를 바꾼 세계의 천재 1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선정 단체가 과학 분야를 다루는 단체인 만큼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천재들이 다수를 차지하리라는 예상을 뒤엎은 뜻밖의 결과였다. 최고의 천재 자리에는 과학자로서의 재능도 많았지만 화가로서의 이름으로 잘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올랐다. 이 외에도 아테나 여신상의 건축가 피디아스, 미국 독립선언문의 주인공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과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수위를 차지했다. ‘천재’와 그 이름이 동격으로 취급되는 아인슈타인은 턱걸이로 겨우 10위에 올랐고, 발명의 아버지 에디슨과 슈퍼 컴퓨터 두뇌를 가진 빌 게이츠는 순위에도 오르지 못했다.
도대체 선정기준이 무엇이길래 에디슨도, 빌 게이츠도 제외된 걸까. 정답은 특정 분야가 아닌, 모든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르네상스형 인간인가 아닌가의 차이이다. 사실 선정된 천재들의 명단에는 르네상스 시대의 두 거장,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포함되어 있으며, 당시에는 인정받지 못했을지언정 ‘색채론’의 기본을 확립한 괴테 역시 그 이름을 올렸다. 많고 많은 미국의 대통령 중에 한명일 뿐인 토머스 제퍼슨은 정치가이자 변호사였으며, 건축가이자 언어학자였을 만큼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한 만능이었다.
그러니 전형적인 실험실형 발명가였던 에디슨이나 컴퓨터 박사 빌 게이츠는 제외될 수밖에. 인류 역사상 그 어떤 인간도 도달하지 못한 신의 경지에 도달한 10명의 천재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보다 편해지고 보다 여유로와졌음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 않는 천재성과 함께 창조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천재들의 신화를 벗겨보자.
1.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1452년 4월 15일 ~ 1519년 5월 2일)
최초의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르네상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화가, 인류 역사상 가장 천재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이미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다빈치의 미술 작품은 치밀하도록 과학적인 그의 생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그의 미술 작품에 나타나는 완벽한 조화와 신비로움을 생각한다면 그의 이름 앞에 붙은 ‘과학의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다. 다빈치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 누구보다도 다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는 미술, 음악, 건축, 군사공학, 도시계획, 비행 기계의 고안을 포함한 다양한 발명과 함께 해부, 요리, 식물학, 의상 및 무대 디자인, 해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예술가로서의 업적은 물론이거니와 과학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대에 여러 자연과학 분야에 걸친 다양한 관찰과 실험을 하고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인류 최초의 비행으로 기록된 라이트 형제의 역사적 발명품의 시초가 된 비행기 설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처음 이루어졌다.
실험 관찰과 이론이 종합되고 정형화되어 자연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 과학이라면, 아직 망원경과 현미경이 없던 시대에 살았던 다빈치의 관찰이나 관찰 결과의 수학적 분석은 제한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자연과 생명에 대한 무한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고, 세상 모든 것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려고 노력한 그에게 ‘인류 최고의 창조적 천재’라는 호칭만큼 탁월한 수식어는 없다.
2.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
위대한 심리 치료사, 윌리엄 셰익스피어. 다재 다능한 ‘르네상스형 인간’이 선정 기준이었음을 감안할 때, 전형적인 문학가인 셰익스피어가 두 번째로 선정된 데에는 어딘지 모순이 있는 듯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햄릿>, <오셀로>, <리어왕> 등 불후의 명작만 남긴 게 아니다. 시인이자 극작가로서 삶의 희비극을 가장 밝은 눈으로 꿰뚫어보고 생각의 깊이를 제공한 선지자였다. 4백년 전의 셰익스피어에게서 오늘의 지혜를 발견하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런던 그린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경영자를 위한 셰익스피어 강좌’를 열어 화제를 모았 는데,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캐릭터와 역할을 바탕으로 인간 경영과 인사관리 등의 리더십을, 극 중 주인공 간의 함수 관계로 기업 인수·합병, 공동 가치 추구 등의 경영 기술을 강의했다.
<줄리어스 시저>에 등장하는 안토니오에게서는 설득 기술을, 햄릿이라는 우유부단한 인물을 통해서는 결단의 중요함을, <템피스트>의 등장인물인 프로스페로에게서는 책임과 승리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다른 사람의 몸속에서 자신을 심리적으로 재생시키는 작업을 통해 수많은 종류의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또한 극 중 인물에 몰입하는 ‘메소드 액팅(method acting)’의 숙달자이자, 인류 최초의 심리학자였던 셈이다.
3. 요한 볼프강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년 8월 28일 ~ 1832년 3월 22일)
최초의 색채 이론가, 요한 볼프강 괴테 어렸을 때부터 라틴어, 희랍어, 음악, 미술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인 괴테는 23세 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24세 때 <파우스트>, 33세 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완성하여 다작가이면서도 대작가로 평가 받는다. 하지만 괴테는 단순히 작가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정치가, 행정가, 교육자, 과학자로서 역동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1775년 바이마르를 방문한 그는 50여 년간 머물면서 바이마르를 고전주의 문학의 중심지로 이끌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학·해부학·광물학·지질학·색채론 등에 몰두하여 전 방위적인 재능을 펼쳤다. 그의 문학적인 명성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한 <색채론>은 괴테가 20여 년에 걸쳐 연구한 오랜 실험의 결과물.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괴테는 1786년 이탈리아 여행 시 그곳의 다양한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실용적인 차원에서 채색의 규칙과 법칙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본격적으로 색채 연구에 들어갔다. 색채를 관찰자의 시각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객관적인 실체로 파악한 뉴턴과 달리, 색채 현상을 밝음과 어둠의 대립 관계로 보았던 그의 이론은 수학적인 체계가 없다는 이유로 물리학의 주류에서 배제되었으나,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새롭게 조명받았다. 색채에 대한 그의 실험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7가지 색밖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4. 피라미드를 만든 이집트인
불가사의를 창조해낸 사람들,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인 고대 이집트 왕가 무덤의 한 형식인 피라미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이자 7대 불가사의 중 첫 번째에 해당한다. 제4대 왕조였던 쿠푸 왕의 지휘 아래 약 10만 명의 인부가 3개월씩 교대하여 30년 이상 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구체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피라미드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로 남서쪽 기제에 있는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 높이는 137m로 40층 건물의 높이와 같으며, 무게도 6백만 톤이나 된다. 피라미드의 각 변은 정확히 동서남북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대피라미드엔 지구의 반지름이나 태양까지의 거리, 원주율이나 1년 날짜 등이 표현되어 있는데, 피라미드의 높이는 정확히 태양까지 거리의 10억분의 1, 피라미드의 너비는 정확히 지구 반지름의 1천만분의1, 한변의 길이는 정확히 365.23인치로 1년의 날짜수와 같다. 피라미드를 건설한 사람들이 천재의 범주에 포함된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피라미드의 기이한 특성 때문일 것이다. 피라미드의 한가운데와 높이의 3분의 2 지점에 어떤 물체를 놓아두면, 그 물체는 흔히 일어나는 변화를 겪지 않는다. 꽃은 본래의 빛깔을 잃지 않고 마르며, 쌀은 썩지 않고 굳고, 면도날이나 칼날은 무디어지지 않는다.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오직 그들, 피라미드를 건설한 이집트인들뿐이다.
5.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di Lu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
진정한 르네상스맨, 미켈란젤로 디 루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예술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할 무렵, 또 한 명의 천재가 전성기 르네상스의 탄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미켈란젤로였다. 동시대를 살았던 다빈치의 천재성에 가려 ‘열등감에 가득찬 고독한 예술가’로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사실 그는 다빈치보다 더 많은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바로크 예술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또 화가로서, 조각가로서, 건축가로서, 시인으로서 르네상스시대에 부합하는 전형적인 르네상스맨이었다. 어릴 적부터 스케치하는 것을 좋아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의 손꼽히는 화가였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문하에서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당시 기를란다요가 미켈란젤로의 미완성된 그림에도 질투를 느꼈을 정도였다고 하니 가히 그는 ‘타고난 예술가’였던 모양이다. 그후 피렌체의 권력자인 메디치가의 조각 학교로 옮긴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보호를 받으며 고대 조각을 연구했다. 40여 점의 조각 작품. 회화로는 시스티나 성당 사면의 대벽화, 건축에서는 교회와 기념 건축물 등의 설계와 장식을 남겼고, 또 회화·조각·건축에 관한 습작·소묘·에스키스 등 약 8백여 점이 세계 각지에 분산되어 있다. 그중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와 ‘최후의 만찬’은 그의 천재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작들이다.
6. 아이작 뉴턴 (Sir Isaac Newton, 1643년 1월 4일~1727년 3월 31일)
17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뉴턴과 20세기를 대표하는 과학자 아인슈타인. 근대를 지탱해온 뉴턴적 우주관을 현대의 아인슈타인이 뒤집었기에 두 사람은 시대를 건너뛴 라이벌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둘은 그보다 더 자주 동일한 수식어로 묘사되는 과학사의 단짝 커플이다. 바로 ‘세상의 몰이해 속에 고독하게 연구한 천재’라는 것이다. 뉴턴이 창조성을 발휘한 부분은 풀이가 가능한 문제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다. 당대의 학자들이 ‘빛은 무엇인가’라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빠져있을 때, 뉴턴은 눈으로 검증할 수 있는 빛의 성질에 주목했다. 또한 자신이 상정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제로 실험해보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견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광학에 관한 실험은 일반인들도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실험이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가 아니라, 실제 실험을 통해서 당시 유행하던 스콜라 철학자들의 사고 실험이 갖는 한계를 벗어났다는 데 의의가 있다. 또한 뉴턴은 기존의 지식을 습득할 때도 기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깊이 이해할 때까지 읽고 또 읽는 스타일이었다. 집중력과 끈기, 노력을 몸소 실천한 뉴턴에게 한순간의 번득이는 영감이나 천재성이라는 말은 그의 창조성을 설명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빛의 구성을 논한 그의 대표적인 저서 <광학>은 30여 년에 이르는 오랜 연구 결과이며, 만유인력 역시 사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발표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발전된 개념이다.
7. 토머스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년 4월 13일 ~ 1826년 7월 4일)
한국에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이름이 알려졌던 것은 미국의 전 대통령인 클린턴의 스캔들이 터지던 무렵이다. 흑인 노예와의 스캔들로 인해 클린턴과 자주 비교가 되었던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바로 토머스 제퍼슨이다. 스캔들은 차치해 두고라도 미국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잡았던 인물이자 미국인들이 뽑은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중에 한명인 그가 어떻게 천재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전형적인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그가 도시 계획자이자 건축가였으며, 농학자이자 언어학자였으며, 또한 위대한 교육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욱이 오늘날 고고학계의 규범이 된 방법들을 이용해 최초로 과학적인 고고학 발굴을 한 아마추어 과학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대통령이 되기 전 변호사로 일했던 제퍼슨은 재임 중에는 종교·언론·출판 자유의 확립에 주력한 뛰어난 정치가였으며, 캐나다 국경에서 멕시코만(灣)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프랑스로부터 구입하여 현재 미국의 영토를 확립한 뛰어난 도시계획자였고,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여 민주적 교육의 보급에 노력한 뛰어난 교육자였다. 뿐만 아니라 철학, 농학, 언어학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어 ‘몬티셀로의 성인(聖人)'으로 불리었다. 생전에 자신이 직접 정해 놓았다는 묘비명 ‘미국독립선언의 기초자, 버지니아 신교자유법의 기초자, 버지니아대학의 아버지 토머스 제퍼슨 여기에 잠들다’라는 글귀가 그의 이러한 업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8. 알렉산더 대왕 (라틴어: Alexander III Magnus 기원전 356년 7월 말 ~ 기원전 323년 6월 10일)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던, 말 그대로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던 인물이다. 그가 10명의 천재 가운데 한 명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의 대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컸다. 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알렉산더 대왕에게 윤리학,·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 ·측량 등을 시킨 일,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배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그는 뛰어난 전략, 전술가였다. 종종 광개토대왕과 비교되면서도 광개토대왕 보다는 한 수 위라는 평가를 얻는 것도 이 때문이다.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시리아, 페니이카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와 인도의 인더강에 이르는 유럽, 아시아 대륙까지 점령한 그는 단 한 차례를 제외하고는 패한 적이 없을 만큼 뛰어난 전술을 자랑했다. 또한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33세의 일기로 죽기까지 그가 이름 지은 도시가 자그마치 70개에 달했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나뉘어졌다.
9. 페이디아스 (고대 그리스어: Φειδ?α?, 기원전 480년경 - 기원전 430년)
건축 역사상 건축가가 밝혀진 몇 안되는 건축물인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 이 두 작품의 총지휘를 맡은 이가 바로 피디아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올림피아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이었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된 후 40년이 지났을 때 피디아스에게 주문되었는데, 8년 여의 작업 끝에 높이 12m, 길이 10m, 폭 6.65m 크기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피디아스는 제우스의 신성한 위엄과 너그러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은 18세기경부터 일어났지만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또한 피디아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로 8m나 되는 대형 아테나 신상을 만들었고,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을 조각하기도 했다. 덕분에 피디아스는 건축가에서 최고의 조각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10.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독일어: Albert Einstein, 1879년 3월 14일 ~ 1955년 4월 18일)
20세기 초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 이론을 완성함으로써 근대 물리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아인슈타인. 20세기가 낳은 최고의 천재 물리학자로 지칭되는 그가 고작 10위에 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9명의 천재들에 비해 과학 분야에서만 뚜렷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과학 분야에서는 ‘최고’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르네상스형 인간’에는 미치지 못한 이가 바로 아인슈타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한낱 실험실과 과학적인 사고에 갇힌 천재는 아니었다. 그는 공공연히 자신이 사회주의자임을 밝히는가 하면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의 광풍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던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그 무엇보다도 전쟁의 영원한 종식을 꿈꾼 반전 평화주의자였다. 1879년 독일 울름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국립공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베른 특허국의 관리 자리를 얻어 5년간 근무하였다. 이때 광양자설, 브라운 운동의 이론, 특수상대성이론을 연구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갈릴레이나 뉴턴의 역학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고, 종래의 시간 공간 개념을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또한 논란이 되었지만 질량과 에너지의 등가성(等價性)의 발견은 원자폭탄의 가능성을 예언하기도 했다. 이론물리학에 기여한 업적으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으며, 그 후 중력장이론으로서의 일반상대성이론을 중력장과 전자장의 이론으로서의 통일장 이론으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재위왕비이전 왕다음 왕
제2대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 | |
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 | |
헤누첸, 메리타테스 | |
스네프루 | |
제데프레 |
쿠푸(
재위:
기원전 2589년 ~ 기원전 2566년)는 이집트 제4왕조의 파라오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자의 대피라미드의 건설자이다. 하지만 이런 거대한 유물을 남긴 쿠푸 자신의 유물로는 7.6cm의 작은 상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이름의 뜻은 "크눔으로부터 보호받다"이며, 그리스어로는 Χ?ωψ, 케오프스라고도 한다. 마네토의 연대기에는 수피스 1세로 되어있다
쿠푸는 선왕인 스네프루와 마찬가지로 시나이 반도 원정에 나섰다. 와디 마가라의 유적에는 쿠푸의 군대가 주둔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남쪽 아스완에 있는 엘레판티네 섬
투푸의 대피라미드
기자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대피라미드가 서 있다. 이것은 바로 쿠푸의 작품이다. 높이가 137.5m에 달해(건설 당시에는 146.6m) 지금까지 4천년 이상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공 건조물이었다.
쿠푸의 피라미드는 기자에 처음으로 위치한 피라미드이다. 그 이전의 파라오들은 다슈르와 사카라 등지에 피라미드를 조성했다. 쿠푸 이후 기자에 거대한 피라미드 단지가 조성된다.
대피라미드의 공사를 담당한 것은 건축가이자 쿠푸의 사촌인 헤몬이었다. 헤몬의 무덤도 대피라미드 근처에서 발견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건설기간은 20년이 걸렸다고 한다.현대 기술로도 이 대피라미드의 건축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경사로를 이용해 지었다는 가설이 있으나 현실성이 떨어지며, 헤로도토스가 설명한 것처럼 특별한 장치를 이용하여 네 면에서 동시에 블록을 쌓아 올리는 방식이 그나마 제일 신빙성이 있다.
쿠푸 파라오의 석관은 거대한 회랑을 따라 올라가면 피라미드의 핵심에 있는 방에 있다. 이 석관은 거대한 한 개의 화강암을 깎아 만든 것이다. 이미 선왕 스네프루의 시절에 한꺼번에 세 개의 피라미드를 만들 정도로 갖춰진 왕국의 강력한 경제력과 이집트 북부와 남부에 걸친 쿠푸 왕의 활동, 수십만 이집트인들의 노력이 이러한 거대한 유적을 완성해 내었다.
대피라미드에 얽힌 전설
대피라미드의 규모가 워낙 거대하기에 이에 관한 전설도 전해져 내려온다. 대피라미드의 공사가 계속되자 쿠푸는 더 많은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자신의 딸 한명(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음)을 성매매를 하도록 하여 그 돈을 피라미드 공사비에 보탰다고 한다. 이때 이 공주는 화대 이외에 손님들에게 돌 한토막씩을 더 낼 것을 요구했고, 이것을 모아 자기 자신의 피라미드도 만들었다고 한다.
대피라미드 근처의 유적들
피라미드 근처에는 여러가지 추가적인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동쪽 통로 근처에는 쿠푸의 어머니인 헤테프-헤레스 1세의 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외에 왕비들의 피라미드 세 기가 발견되었다. 1954년에는 남쪽 면 근처에서 수천년 세월을 견딘 나무로 된 온전한 배 한척이 발견되었다.
▲ 발굴 된 나무 배
기타 유적
대피라미드의 남쪽 면에서 발견된 배는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길이가 43m에 달했다. 30.8m의 구멍 안에 들어있던 것이 발굴되었는데, 옆에서도 유사한 배가 한 척 더(두 번째 배는 온전하지는 못하다) 발견되었다. 수천년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배는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오랜 복원작업 끝에 1982년부터는 발견장소 바로 위에 세운 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수천년 세월동안 나무로 만들어진 배가 온전하게 남아있을 수 있는지, 이후에는 어떻게 보관할 것인지에 대해서 아직까지 명확한 해답은 없다.
가족관계
- 부모 : 스네프루, 헤테프-헤레스 1세
- 어머니를 알 수 없는 왕자들
- 왕자 제데프레 (제3대 파라오)
- 왕자 바네프레
- 공주 카메레르네브티 1세
- 왕비 헤누첸
- 왕자 카프레 (제4대 파라오)
- 왕자 쿠푸카에프
- 왕비 메리타테스
- 왕자 카와브
- 왕자 제데프호르
- 공주 메레산크 2세
- 공주 헤테프-헤레스 2세
● 피라미드 내부구조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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