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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마음의 양식/미술 이야기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지송나무 2019. 12. 10. 20:27

문득 어느 책을 읽다보니 조선시대 두 여인에 대한 흥미있는 비교가 있어 흥미를 갖고 내용을 정리했다.

신사임당(1504~1551)과 허난설헌(1563~1589)은 조선 선조때 동시대를 살며 당시 여인으로서는 각자 영특한 머리와 재주가 있었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달랐으며 조선 시대를 걸쳐 유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사후 평가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이 두 여인에 대한 고증과 자료를 조사/발표하는 역사가나 논객들이 많아지며 
당시 조선시대의 유교적 사상을 기반으로 신사임당은 자신의 삶보다 훨씬 더 숭고하게 포장되었고 
반면에 허난설헌은 그의 재능에 비해 불행한 삶을 살았고 사후에도 조선에선 제대로 평가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허난설헌에 대한 연민과 비통함을  느낀다.

 

신사임당, 현모양처의 표상 ?

 

그의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 등과 친분이 있었으나, 기묘사화로 선비들이 희생되자 관직을 단념하고 강원도 강릉으로 낙향하였다. 아들 딸의 차별을 두지 않던 아버지 신명화는 딸들과 조카 딸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신사임당을 비롯한 다섯 딸들은 신명화에게 천자문과 동몽선습명심보감유교의 사서 육경과 주자를 배움으로써 일찍부터 성리학적 학문적 소양을 갖추었다. 특히 신사임당은 신명화의 여러 딸들 중에서도 기억력이 비상하여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
기억력이 좋은 그는 한학의 기본 서적을 금방 정통하였고, 한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난 사임당은 시와 그림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일곱 살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서 그려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특히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아울러 사임당은 유교의 경전과 좋은 책들을 널리 읽어 학문을 담았다. 어머니가 자수를 뜨는 것을 보고 흉내를 내자 외할아버지는 그에게 그림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7세 때부터 그림을 정식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림 교재로는 세종 때의 유명한 화가였던 안견의 산수화를 사 주었다

신사임당은 당시 데릴사위제도의 영향도 있었던지라 결혼 후에도 주로 처가에 살며 자유롭고, 자기 주체적인 삶을 살았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덕수 이씨 이기이행 형제의 조카인 이원수를 사위로 정하였다. 당시 이원수는 이렇다 할 관직도 없었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두 당숙이 영의정과 좌의정 등을 역임한 고관이었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고 주변에서는 사위감을 볼줄 모른다며 이상하게 봤다.

그러나 아버지 신 진사는 사임당의 사위를 고를 때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가문이나 재력이 아니라 딸의 서화 활동을 키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12] 타고난 재증으로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예술가로서의 길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점이 신 진사의 주된 관심사였다.[12] 지체높은 권문세가의 집안에서 새로 시집온 새댁의 그림 활동을 인정해 준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고, 반대로 집안이 너무 볼품이 없거나 가난한 경우에는 살림살이에 바빠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것이라는게 신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의 생각이었다


결혼 몇달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한성으로 올라갔으며, 얼마 뒤에 시집의 선조 때부터의 터전인 파주군 율곡리에 거주하기도 했고,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리에서도 여러 해 살았다. 한성과 친정 강릉을 오가던 생활이 많이 불편했던 그는 남편 이원수에게 특별히 한성 강릉의 중간 지점인 평창에 거주지를 마련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5남 3녀를 두는데 셋째 아들 이이는 이름난 성리학자이자 조선 중,후기 서인 노론 당의 사상적인 시조였다. 다섯째 아들 이우는 관직은 정3품에 머물렀지만 시와 서화로 이름을 날렸고, 장녀 이매창 역시 시와 그림 재주에 능하여 작은 신사임당, 소사임당이라 불리기도 했다.

 

신사임당 초상화

 

신사임당이 우리나라 지폐 중 오만원권의 상징인물로 그려졌는데, 사실  2007년 당시 여성단체와 많은 여성계의 반발과 집단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국은행이 "조선 중기 대표적 여류예술가"이자 "어진 아내"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여준 인물"이라며 밀어부쳤다고 한다.
 
이런 한국은행의 평가에 대해 여러 역사들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 


1. "여류예술가"라면 신사임당보다 훨씬 허난설헌, 황진이가 뛰어났으며 
    심지어 허난설헌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그의 시가 소개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최초의 한류가 되었다고 한다.


2. "어진 아내(양처)"라는 평에 대해선 결혼 후에도 주로 처가에 살며 시나 그림을 그리며 그다지 남편에게 신경쓰지 않았으며, 심지어 바람기있던 남편은 첩을 두게 되는데 사임당은 자신이 죽은 후엔 재가하지 말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성리학의 칠거지악 중 하나에 해당할 수 있다고 한다. 

  • 신사임당 : 내가 죽은 뒤에 당신은 다시 장가를 들지 마시오. 우리에게 이미 아들 다섯, 딸 셋, 8남매의 자녀가 있는데, 다른 자식이 필요하며 또 다시 무슨 자식을 더 두어 예기에 가르친 훈계를 어길 수가 있겠소?
  •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합하는 것이오?
  • 신사임당 : 공자 노나라 소공 때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그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그 부인과 다시 동거를 하지 아니했을 뿐 아주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소.
  •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친 기록이 없다? 그러면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 신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남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존중하여 다시 새 장가를 들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 이원수 : 주자의 집안 예법에는 이같은 일이 있지 않소?
  • 신사임당 : 주자가 47세 때 부인 우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살림할 사람이 없었지만 다시 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시조 시인인 이은상 시인이 쓴 사임당과 율곡에서 발췌.

또한 남편 이원수에게 고분고분 순종하지는 않았는데, 남편 이원수에게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좋은 명산을 알아내 남편을 보내기도 했다. 남편 이원수는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10년간 별거를 약속하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아내가 보고 싶어 다시 되돌아왔고, 그는 결단력 없는 남편을 나무라기도 하였다. 남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녀는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비구니가 되겠다고 협박하여 남편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했다. 그러나 결국 남편 이원수는 3년만에 학문을 단념, 과거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3. "영재교육에 남다른 성과를 보였다(현모)"는 것도 이율곡에게 어떻게 교육을 시켰다는 것에 대해 찾아볼 수 있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결국 대학자이자 당시 250년간 주류 정치권력이었던 서인-노론파의 들의 정신적 지주인 이율곡을 신성시하며 당연히 그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을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성상이자 현모양처로 여겨진 것은 시대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점이 크다고 한다.

 

16C말~19C초반 약 250년간 조선사대부는 동인, 서인에서 북인, 남인,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 정권다툼을 하였는데 권력의 중심은 서인과 노론으로 이율곡이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신사임당의 초중도

 

16세기 조선은 사대부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던 시대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고, 서인은 다시 노론과 서론으로 나뉘는데
이황이 중심이 되었던 남인과 이이과 중심이 되었더 서인이 17세기까지 정치 중심에 있다가
16세기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약 250년간 서인과 여기서 파생된 노론이 조선 권력의 중심에 서며
이들은 이율곡을 정신적 지주로 여기며 자연스럽게 신사임당은 마치 기독교의  어머니인 성모마리아와 비견할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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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비운한 삶을 산 천재여류시인

 

역사가들은 신사임당보다 훨씬 재능이 뛰어나고 심지어 그의 시가 명나라와 일본에서까지 대인기를 차지한 허난설헌이 그의 재능에 비해 결혼 이후 비운한 삶을 살며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뭐 매우 애석해하고 있다.


난설헌은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과 그의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허엽은 북인출신이었다. 

일찍부터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허난설헌은 8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이란 시(산문)를 써서 아버지와 오빠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상량문은 집을 지을 때 대들보를 올리며 행하는 상량의식의 글로서 허난설헌은 신선세계에 있는 상상의 궁궐인 광한전 백옥루의 상량식에 자신이 초대받았다고 하면서 이 글을 지었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은 첫 부분에서 광한전 주인의 신선생활을 묘사하고 그가 여러 신선들을 초대하기 위해 광한전을 짓게 된 배경을 묘사하였다. 이 모임에 많은 신선이 동원되고 기술자가 있었지만 상량문 지을 시인이 없자 허난설헌이 초대되어 상량문을 지었다.

상량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영차 동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새벽에 봉황타고 요궁에 들어가 날이 밝자 해가 부상 밑에서 솟아올라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에 비쳐 붉도다.
어영차, 남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못 물 마신다. 은평상에서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웃으며 요희를 불러 푸른 적삼 벗기네.
어영차, 서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비단 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으니, 날 저문 뒤에 학 타고 돌아가길 재촉한다.
어영차, 북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북해 아득하고 아득해 북극성에 젖어 드는데,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물이 높이 치솟아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이 어둑하다. 어영차. 위쪽으로 대들보 올리세.”


상량문의 문체는 포량(抛樑)의 동서남북과 상하의 여섯 대들보가 묘사되고 광한전이 신선세계에서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   허난설헌은 이 상량문에서 여성으로 감히 이룰 수 없는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는 가상의 선계(仙界)를 설정하여 이상세계속의 주인공으로 변신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현실초극의 사상이 담겨 있다.

 

 

이런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 서경덕 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 서얼출신)에게 와 글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그만큼 아버지에게 남녀 구별없이 학문을 가르쳤고, 12살 위의 오빠 허봉에게 귀여움을 받았으며  서얼출신이었던 친구 이달에게 누이동생을 당문학을 배우게할 정도로 개방적이고 남녀차별없이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어린 동생인 허균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 저자)의 학문공부를 도와주기도 했다.

 

허난설헌

 

 

친필서화와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 어린 여자아이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하늘의 새를 보는 행복함을 표현함

 

 

이런 천재는 15세때 아버지의 소개로 안동 김씨인 김성립과 결혼을 하고 시집으로 들어갔는데 이때부터 불행의 시작이었다.  남편인 김성립은 번번히 과거에 낙제하여 계속 공부를 빌미로 과거시험준비 합숙을 하느라 별거를 하게 되었고, 남편없이 시를 쓰는 며느리를 늘 시집에선 달가워하지 않았다.

허난설헌 작,  묵조도

 

한번은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이 편지에서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에 직언했다 한다.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哭子곡자
(아들 딸 여의고서)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애애광능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魄지전소여백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후일 그의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 역시 추증 예겸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1592년부터 시작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나라의 군대가 지원을 오게되었는데 이때 허균이 함께 온 명나라 사신들을 응대를 하며 허난설헌의 시집을 선사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명나라에선 허난설험의 시가 찬사를 받고 선풍을 일으켰으며  이후 조선에 오는 명나라 사신들마다 허난설헌의 시집을 얻으려 허균을 방문했다고 한다.
심지어 이후 일본에 까지 그의 시집이 소개가 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허난설헌의 시는 중국에서 "조선시선"이라는 책으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모은 것으로 허난설헌의 시가 상당부분 실려 있고 현재는 중국 북경대학 등 주요대학의 조선어학과에서 중요한 시로 배우고 있다고 한다.

신사임당이 당시 자유로운 환경에서 자기 주체적으로 살며  이후에도 대표적인 현모양처로까지 칭송을 받은 반면에 허난설헌은 조선시대의 성리학과 유교사상의 희생자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비운의 주인공이었다.


많은 문학가들은 이런 허난설험의 재능을 더욱 아깝게 생각하고 있다. 

 

허난설헌의 생가, 강릉

 

허난설헌 사후,  임진왜란 허균 광해군 말년 옥사당하면서 잊혀졌다가, 1940년 무렵 소설가 월탄 박종화가 그녀의 시와 작품성을 평가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2000년 9월에는 그의 시작품 168편을 모아 청 만력 40년(1612년)에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 ≪취사원창≫(聚沙元倡)이 새롭게 발굴됐다. ≪취사원창≫은 중국 안후이성(安徽省) 출신 문인인 반지항(潘之恒, 1556~1622)의 문집 『긍사』(亘史)에 1책으로 수록되어 들어있었다. 이 시집에는 허난설헌의 산문 글 1편도 들어있었는데, 당시 중국 난징대학교 박사과정 유학생인 김영숙이 처음 발견했고 한중문화교류사 전공인 순천향대 중문학과 교수 박현규가 대만 고궁박물관에 소장중이던 이 소장품을 정밀분석해 한국 학계에 소개하여 알려졌다. 그동안 취사원창은 중국 학계에서도 호문해(胡文楷)가 1957년 간행한 『역대부녀저작고(歷代婦女著作考』라는 책에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 실전된 상태였다.≪취사원창≫에 나타난 난설헌 시는 오언고시 14편, 칠언고시 11편, 오언율시 6편, 칠언율시 14편, 오언절구 20편, 칠언절구 103편이며 산문 1편은 그가 8세 때 지었다는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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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같은 조선시대에 다른 삶을 살았는가? 

신사임당 시대까지는 결혼할 남자가  신부 집에 데릴사위가 가서 자식을 낳고 살다가 독립을 하였으나 
허난설헌 시대부터는 여자가 신랑 집에 시집을 가서 시집식구를 부양하는 과도기가 시작되다 보니 결국 허난설험은 과도기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신사임당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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