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네 지명의 유래=
- 남산동(南山洞)
대구부 서상면(西上面)에 속해 있었는데 그 위치가 남산 아래라 하여 남산(南山)이라 하였다. 1914년 남산정(南山町)이 되었고 1946년에 남산동이 되었다.
- 대명동(大明洞)
대명동은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과 관계가 깊다. 두사충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2차례나 명나라에서 왔다. 수군을 지휘하던 이 충무공과도 각별하게 지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두사충은 명나라로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귀화를 한다. 귀화를 한 두사충을 조선 조정에서 땅을 하사하여(대구시내 경상감영 일대) 살게 해준다.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 대덕산:앞산) 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하고 단을 쌓아 올려 매월 초하루가 되면 천자를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 반월당(半月堂)
이곳에 건평 61평의 2층 목조건물을 지어서 백화점 영업을 하였는데 그 백화점 이름을 반월당이라고 한데서 유래하였다. 처음 백화점 반월당을 세운 이는 약전골목에서 많은 돈을 모은 차병곤씨 였는데 취급품목은 수예품이 주류를 이루어 여학생이 주 고객이었다고 한다. 반월당의 경영은 차씨의 부인이 주로 하였는데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고 1943년 경영난으로 딴 사람에게 넘겨져 공신백화점으로 바뀌게 된다. 해방 이후 공신백화점도 문을 닫고 구 시대의 흔적을 안은 채 헐리기 전까지 수없이 많은 업종들이 바뀌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덕산동(德山洞)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반월당(半月堂)이라고 전해오고 있던 것이다.
- 대봉동(大鳳洞)
1918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달성군 수성면의 봉덕동과 대명동의 일부가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두 동의 일부를 합쳐 대명과 봉덕의 머리글자를 따서 대봉정(町)으로 불리다가 대봉동이 되었다.
- 대신동(大新洞)
대신동은 서문시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한량들이 즐겨 찾았던 천황당(天皇堂) 못을 메우고, 1920년 그 자리에 큰 장을 옮기게 된다. 못자리로 시장을 옮긴 후 서문시장(西門市場)으로 부르게 되었다. 서문시장은 큰 장으로 평양, 강경 장과 함께 전국의 3대 시장으로 꼽혔다. 못이 있었던 주변에 새로운 동네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큰 장에서 큰 대(大)를 따고, 새로 생긴 동네라 해서 신(新)을 따서 대신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14년에 신정(新町)으로 부르다가 1946년에 다시 대신동이 되었다.
- 동성로(東城路)
일제강점기 때인 1906년10월부터 1907년4월까지 대구 읍성의 동편을 헐어 도로로 사용한데서 유래하여 동성로라 하였다. 대구부 동상면 지역으로 1914년에 동성정(町)이라고 하다가 1946년에 동성로가 되었다.
- 봉산동(鳳山洞)
봉산이란 제일중학(구, 제일여중)이 자리하고 있는 자라바위가 있는 산을 말하는데 이 이름을 따서 봉산동이라 지었다. 조선 숙종 때부터 이 산에서 정오를 알리는 오포(午砲)를 발사하였다. 일명 오포산이라고도 한다. 봉산의 다른 이름은 연구산(連龜山), 운구산(運龜山), 자래방우산(자라바위산)이라 하기도 하였다. 지금도 제일중학 정원에는 돌거북이 있는데 머리는 남쪽인 앞산을 꼬리는 북쪽인 시내를 향하고 있다. 이는 비슬산에서 시작된 지맥이 약해지는 것을 보(補)하는 동시에 화기를 누르는 비보책인 것이다.
- 삼덕동(三德洞)
일제시대에는 삼립정(三笠町)으로 불리다가 천덕(天德), 인덕(人德), 지덕(地德)을 합하여 삼덕동이 되었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이었다가 1914년 지역 통폐합에 따라 남성리, 신동의 일부를 합하여 삼립정으로 불리다가 1946년에 덕산동의 일부를 합하여 삼덕동이 되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포정동(布政洞)
이곳에 있던 경상감영의 선화당(宣化堂) 정문이 포정문(布政門)이었기 때문에 포정동이라 하였다. 대구부 동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상정(上町)으로 불리다가 1946년 동명 변경에 따라 포정동으로 바뀌었다. 감사가 있는 곳, 즉 감영(監營)을 포정사(布政司)라고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 자갈마당
이곳은 지금부터 대략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버려진 황무지였다. 그러나 6.25 이후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어 대구 북쪽의 관문구실을 하게 되고 교통의 중심지가 되니 자연 이 일대가 넓은 장터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곳을 <넓은마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특히 이곳은 땔감과 구들장을 팔러 나온 사람들이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만 오면 땅이 질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어서 자갈을 많이 깔아놓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넓은마당 대신에 <자갈마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구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또 다른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 봉덕동(鳳德洞)
대구부 상수서면(上守西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봉산동(鳳山洞)과 덕산동(德山洞)을 병합하여 봉덕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1918년 지방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대구부에 편입되었으며 일부를 떼어내어 대봉동에 넘겨주었다. 1929년 경에는 대구중학 근처에 대구지역 최초의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고 하며 그 후 인근의 경산, 하양 등지로 재배면적을 넓혀갔다고 한다.
- 신천동(新川洞), 신암동(新岩洞)
1778년(정조 3년) 대구 부사 이서가 대구부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천에 제방을 쌓아 현재의 신천이 흐르는 위치로 물줄기를 돌려 새로이 하천을 만들었다. 그 하천을 새로 만든 하천이라 하여 신천(新川)이라 하였고, 그 가장자리에 있던 마을을 신천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신천동 아래에 자연부락이 있었는데 골이 깊은 계곡이라 해서 대곡리(大谷里)로 불리어지며 한골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 마을로 신천이 흐르게 되면서 바위가 많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신암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 수성동
수성동은 옛날 하동(현재 수성1가동)과 배일촌(동구 신천동)사이의 들판으로서 전부 논과 밭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약 40여년 전부터 한집 두집 불어나기 시작하였으며 1948년 대구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동구 신천동에 속하였다가 1980년 4월 1일 동구에서 수성구로 분구될 때 시조례 제1213호(1979. 8. 28 공포)에 의해 당시 동구 신천3,4동의 일부가 수성구로 편입되면서 수성 1,2,3가에 이어 수성4가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수성들판 한가운데 위치했으므로 그 당시 수성동은 자연부락이 존재하지 않았다.
- 만촌동(晩村洞)
본래의 이름은 '늦이'라 하였다. '늦이'의 '늦'은 늦다라는 뜻이며 '이'는 원래 인칭대명사이나 고어의 '리(里)'의 음차로 보아야 한다. 이 곳 주민들은 '늦이'를 한자로 지잉(遲芿)(遲=訓借, 芿=音借)으로도 표기하였다. 따라서 만촌(晩村)의 촌(村)은 '리(里)'와 같은 '마을'이란 뜻이다. 이와 같은 이름을 사용하게 된 것은 예로부터 이곳은 달성하씨, 달성서씨 등이 문호를 차려놓고 강학에 힘쓰고 학문을 숭상하는 반면 선비의 기질에 따라 생업에는 등한시하여 농사철이 되어도 항상 이웃마을보다 농사일이 늦어져서 부근 주민들이 농사일에 늦은 곳이라는 뜻으로 불려온 것이 마을의 명칭이 되었다고 한다.
- 범어동(泛魚洞)
옛날 그 일대 산의 모습이 마치 붕어가 입을 벌리고 산 아래 흐르는 냇물(泛魚川)에 떠있는 모습과 같다고 하여 마을의 이름을 뜰 범(泛), 고기 어(魚)를 합하여 범어라고 이름을 붙였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역을 설치하여 마을이름을 따서 범어역이라고 하였다. 1914년 범어동이라고 개칭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 범물동(凡勿洞)
옛날에는 이곳 뒷산에서 범이 많이 울었다고 범울이, 범물리 라고 불렀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이전리(泥田里)와 가동(佳洞)을 병합하여 범물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다.
- 황금동(黃金洞)
원래 이 마을 주변 들판에는 곡식이 황금빛이고, 산에는 나무가 울창하여 황청리(黃靑里)라고 불렀다. 1914년 인근의 소지천동을 병합하여 황청동(黃靑洞)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었는데 황청동을 황천동이라고 잘못 부르는 경우가 많아서 1980년 수성구를 신설하면서 황금동으로 동명을 개칭하게 되었다. 요사이는 잘 쓰지 않지만 사람의 죽음을 뜻하는 말인 황천은 黃泉이라고 쓴다.
- 지산동(池山洞)
이곳 뒷산의 모양이 곡식을 고르는 키처럼 생겼다 해서 이 산을 치산, 이 지역을 치산리 라고 불렀다. 1914년 비슷한 한자음을 붙여서 지산동이라 하고 달성군 수성면에 편입되었다. 1938년 대구부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노원동(魯院洞)
이곳은 원래 원대들로서 노곡(魯谷) 주민들의 농토로 이용되어 왔으나 마을이 형성된 후 원대동(院垈洞)으로 명명되었다. 행정구역 개편에 의하여 서구에서 북구로 편입되면서 주민들의 의견에 따라 노곡과 원대동의 머리글자를 따서 노원동이 되었다.
- 칠성동(七星洞)
칠성동은 칠성바위에서 유래한 듯 보여진다. 칠성바위라고 하는 지석묘는 탱석 또는 고인돌이라 부르는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한반도 전역에 분포되어 있다. 시민회관 앞에 놓여있는 칠성바위는 이같은 지석묘 중의 하나였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이 이곳에서 치성을 들이면 아기를 낳는다는 민간신앙의 대상물로 바뀌었다.
- 비산동(飛山洞)
아득한 옛날 달천(達川)에서 한 아낙네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한창 빨래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윽한 음악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서쪽으로부터 커다란 산이 음악소리와 함께 둥둥 떠서 날아오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혼비백산한 아낙네가 산이 날아온다고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 소리에 그만 날아오던 산이 그 자리에 내려앉고 말았다. 그 뒤부터 사람들은 그 산을 날아온 산이라 하여 날뫼(飛山)이라 불렀고 이에 연유하여 비산동이 되었다.
- 내당동(內唐洞)
마을 앞 동남산쪽 산 아래 오래된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는데 마을에서는 이 나무를 당산목(堂山木)이라 하였다. 이 나무를 기준으로 당산나무 안쪽에 위치한 마을은 안땅골, 안당골, 내당곡(內唐谷)이라 불렀고, 반대편의 바깥쪽 마을은 바깥땅골(外唐谷)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내당동은 당산나무 안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이다.
- 반고개
조선조 중엽부터 있어왔던 고개로 강창 및 다사지역 주민들이 성내로 들어오기 위한 주요 길목이었고, 조선말기에 물물교환이 성행할 때 호남지방에 거주하는 상인이 대신동 큰시장(현 서문시장)을 왕래하면서 주로 반고개를 넘어 다녔다 하며 반고개에 풀이 무성하여 상인들이 소(牛)의 봇짐을 내려놓고 먹이고 쉬어 다녔다 한다. 당시 이 지역 일대는 고개가 가파르고 높아 바람이 세찼다 하여 『바람고개』 라고 불리어 왔으며 조선말기부터 일제시대까지는 대구로 장보러 들어오는 강창 및 다사 주민들과 호남상인들이 고개를 넘는 도중 떼강도가 빈발하여 고개를 넘을 때는 100명 정도가 모여야 넘었다고 하며, 밤에는 고개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밤에는 넘지 못하는 고개라 하여 『밤고개』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당시 고개 주위에서는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고 산림이 무성하였으며 50년대 이후 고개가 확정되고 70년초 재 확장하여 현재의 면모를 이루고 있다.
- 감삼동(甘三洞)
감삼동의 지명유래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1)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 고을 현감이 이 곳을 지나다 감이 탐스럽게 열린 걸 보고 매우 감탄하였다. 인사차 나온 마을의 대표가 감을 대접하면서 마을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였다. 현감이 감을 먹었는데 매우 달고 맛이 있어 세 개나 먹었다 해서 감삼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2) 이 지역의 땅 모양을 보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낮은 산줄기가 길게 뻗어 마을 한가운데서 끝나는데 바로 이곳의 땅 모양이 세 장군이 태어날 형상이었다. 이 말이 퍼지게 되면 도리어 마을 사람들이 해를 입게 될 것을 우려하여 이 이야기를 숨기기 위해 그 부군에 샘이 세 곳에서 솟아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 이야기가 있은 지 얼마 안되어 실제로 이 마을에 샘이 세 곳에 생겨서 여름 가뭄에도 샘물이 마르지 않았다 하여 감삼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 본리동(本里洞)
이 일대 농가에 있는 뜸뒤주(쑥대나 싸리, 뜸 따위를 새끼로 엮어 땅위에 둥글게 치고 그 안에 곡식이나 감자 따위 곡물을 채워 쌓은 더미 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고 해서 작촌(鵲村)이라고 불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달성군 성서면 본리리가 되었다가 대구에 편입되어 본리동이 되었다.
- 성당동(聖堂洞)
1)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 불렀는데 그 유래는 두 가지가 전해오고 있다. 성당못을 중심으로 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모습으로 길지로서 인명의 피해가 없는 좋은 땅이란 뜻으로 성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2) 이곳에 일제시대 때 만들어진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곳 성당이 대구지역 독립운동 장소로 발각되어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철거, 폐쇄되었으나, 성당이 있던 곳이라 하여 성당동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1910년부터 성당동으로 불렀다고 하니 근거없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 죽전동(竹田洞)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아주 가난하게 살았었다. 그래서 근처에 많이 나는 대나무로 갈퀴를 만들어 서문시장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판매하였다. 대나무 갈퀴를 많이 생산하는 곳이라 하여 죽박골, 죽전(竹田)으로 불리게 되었다.
- 장기동(長基洞)
이 지역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가지가 있는데 1) 예로부터 구씨와 장씨가 터를 가꾸고 이루어 구씨, 장씨의 터라고 구장터라고 하였다. 그 후 구씨가 패망하고 장씨가 마을을 이끌어왔다고 하여 장씨터라는 뜻으로 장기(長基)라고 불렀다. 2) 이 지역에 옛 장터가 있던 지역으로서 구장터 또는 장기(場基)라 하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한다. 1914년 달성군 성서면에 편입되었다가 대구시로 편입되었다.
- 두류산(頭流山), 두류공원(頭流公園)
1) 옛날 산이 날아다니던 시절, 평지 일대에 산의 밑동이 내려앉아 비산동이 되었고 산의 머리부분은 계속 날아가 두류공원 일대에 떨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산의 머리가 날아와 떨어진 곳이라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2) 두류산 일대의 산의 형상이 사람의 머리와 머리를 땋아 내린 모양을 하고 있어서 두류산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산이 둥글게 펼쳐 있다고 하여 두리산으로 부르던 것을 1930년에 원산(圓山)이라고 표기하다가 나중에 두류산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출처: 대구 텐인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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