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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전통과 역사/역사의 향기

조선 20대 왕 경종

지송나무 2020. 4. 3. 18:40

 

조선 20대 왕 경종

 

경종(景宗,)

1688년 11월 20일(음력 10월 28일) ~ 1724년 10월 11일(음력 8월 25일))은 조선의 제20대 임금이다.

 이(李), 는 윤(昀), 본관 전주(全州), 는 휘서(輝瑞),

시호는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이다.

숙종 옥산부대빈 장씨의 아들이다.

숙종 16년(1689년), 서자인 그에게 원자(왕의 적장자)의 명호를 내리는 원자정호 사태로

기사환국이 발발하였고, 갑술환국 후 그와 그의 생모인 옥산부대빈 장씨의 처우 문제로

노론 소론이 격쟁하여 영구히 절연, 경종이 즉위한 후에 발생한 신임사화 노론의 원한을 얻었다.

숙종의 지병이 악화되자 1717년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1720년 7월 12일(음력 6월 8일)에 숙종이 승하하자 6일 후인 7월 17일(음력 6월 13일)에 즉위하였다.

1720년부터 1722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722년부터 1724년 10월 11일(음력 8월 25일) 붕어(崩御)할 때까지 이복 동생 영조 왕세제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1724년 10월 6일(음력 8월 20일) 밤에 갑자기 배와 가슴이 조이듯이 아픈 증세를 일으키고 극심한 구토와

설사를 하다가 10월 11일(음력 8월 25일) 새벽에 훙서(薨逝)하였다.

특별한 병증이 없이 급서하였기에 독살 의혹이 제기되어

영조의 재위 기간 내내 이인좌의 난 및 크고 작은 난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 경종의 어필입니다.

경종대왕어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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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20대 왕으로 숙종과 희빈 장씨 사이에 태어난 아들입니다.

 태어난지 100일도 안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으며 당시에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던 장희빈의 소생이자 첫 아들이었기 때문에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연잉군과 연령군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숙종의 다른 소생이 없었고(숙빈 최씨 소생의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죽었습니다.) 장희빈과 남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평탄하게 세자시절을 보냈습니다.

 

* 숙종과 영조의 사이에 낀 임금으로 재위기간이 짧다는 점으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왕입니다.

 

* 희빈 장씨가 사약을 받은 14세 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으며, 32세에 왕위에 올랐지만 그 때까지

자손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생식능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논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경종 본인이

고자라고 단정하기는 힘들며, 학자들은 대체로 과도한 스트레스가 원인인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 그 대신 왕후와 함께 양자를 들이려고까지 했으나 노론의 반대로 결국 이복동생 연잉군을 세제로 임명합니다.

어쨌든 끝내 자손은 없었고, 왕위는 왕세제인 연잉군(영조)이 잇게됩니다.

 

* 특히 어머니가 당쟁에 휘말려 죽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였고, 아버지인 숙종과 신하들도 희빈 장씨의

아들이라고 갈궈대는 상황에서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평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죠. 장희빈이

죽으러갈때 경종 걷의긔를 잡아 뜯었다는 야사도 있습니다.

* 노론측 기록을 보면 정신이 맑지않았던것 같기도 합니다. 단암만록을 인용하자면 '세자는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또 한밤중에 계단과 뜰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고 정신도 안정되지 못했으며 지각도 불분명했다. ...... 숙종의 상에도 한 번도 곡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까닭없이 웃기까지 했다.'

 

* 숙종 말년엔 대리청정을 했는데 내리는 비답이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 하겠다"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극도로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기록에 보면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계 신하들이

유의하겠다 유의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고 의견도 내어보시라고 간했는데 경종의 답변은

"유의하겠다"였습니다. 어머니가 사약을 받아서 자신도 아버지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고 연령군, 연잉군이

숙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다가 자신도 정궁의 소생이 아니었기 때문에(따지고 보면 후궁 소생)

언제든지 갈릴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반응할수밖에 없었습니다.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폐세자당할수도

있는 처지였기에, 그야말로 목숨이 걸린 대리청정이었습니다.

* 원래 몸이 약했기 때문에 즉위 후에도 거의 병석에서 지냈으며(하루가 멀다하고 자리보전을 하고 제대로

씻지도 않아서 봉두난발에 냄새가 나기도 했다고 하네요.) 결국 3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습니다. 기간 동안

이렇다할 정치적 업적은 쌓지 못했습니다.

* 사실 노론과 숙종이 그를 집요하게 공박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어머니의 죽음을 목도했기에 제2의

연산군이 탄생할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연산군과 달리, 어머니가 사망할 당시 상황을

대부분 제대로 알고 있던 상태여서인지 성격 탓인지 몰라도 왕이 된 후에도 연산군처럼 정치를 하려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 한편 형제 간에 우애는 좋아 자칫 정치적 라이벌이 될 수 있는 동생 연잉군을 소론의 공격에 필사적으로

지켰다거나, 항상 동생을 찾아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경종

본인은 매우 선량했다고 보입니다.

 

*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경종이 병색이 완연해져 자리보전을 하고 있을 때 연잉군이 병문안을 들자,

아픈 와중에도 경종이 "창문을 열어라, 세제가 덥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박상검이 일으킨 역모사건 이후 속으로는 동생을 매우 불신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노론과 소론의 갈등으로 경종의 치세는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노론은 경종을 무력화시킬 요량으로

경종이 병약하니 국사를 제대로 돌볼수 없다며 세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게 하자고 주장합니다. 이를

받아들이자 소론은 노론의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대리청정을 거두라는 주청을 빗발치게 올렸고 경종은 다시

친정을 하게 됩니다.

* 사실 이건 노론의 정치적 무리수입니다. 원래 대리청정은 감히 신하들 입장에서 내세울수있는 주장이

아니며, 왕이 하자고 해도 미친듯이 반대해야하는게 맞는겁니다. 아마 태종때였다면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측은 하나 남김없이 멸문지화를 당했을겁니다. ㅡㅡ

 

* 대리청정 논란은 결국 끔찍한 사태를 부르고 마는데 1722년, 목호룡이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을

옹립하려 한다라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김일경을 중심으로 한 소론 강경파들은 이를 빌미로 노론

숙청을 주장했고 경종은 별수 없이 이를 허락해야 했습니다. (어쩌면 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제기되긴 합니다.) 대리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김창집,조태채,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약으로 사사되고, 노론측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뒤(신임사화) 경종 말년까지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며

노론의 씨를 말리는 피의 나날들이 이어집니다.

 

* 경종 역시 독살설에 휘말린 왕중 하나입니다. 그 유명한 게장과 생감 사인설인데, 이 독살설은 근거가 좀

부족하다고 합니다. 왜냐면 의학적으로 게장과 감을 같이 먹으면 몸에 안 좋기는 한데, 죽을 정도는

아니라네요.  하지만 독살설의 배후라는 의혹을 받고있는 영조 본인도 어느 정도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비전문가이면서 어의의 처방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했다는 겁니다다.

 

* 하지만 이 독살떡밥은 정조 독살설만큼이나 당시에는 퍼져 있었던 이야기로서 영조연간에도 임금 행차때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임금을 독살한 개새ㄲ"이런 욕을 했다는 야사가 있습니다. ㅡㅡ

* 그의 죽음과 경종이 죽기 직전에 벌어진 행동으로 비주류로 몰린 소론과 남인 세력 등에게 큰 떡밥이 되었고

영조는 즉위 내내 형을 죽이고 왕이 되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역설적으로 영조가

한솥밥 먹던 노론에 의지하게 되어 말기에는 노론이 득세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로 인한 대표적인 사건이

이인좌의 난과 사도세자의 변 이죠.

* 능은 서울 성북구 석관동에 있는 '의릉'입니다. 아래쪽에 선의왕후 어씨가 묻혀 있고 위에 경종이 묻혀

있습니다. 경종은 죽어서도 참으로 안습했는데 이 자리에 중앙정보부가 들어섰을 때 정줄놓은 중정 직원들이

능 앞에다 자기들 놀이터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로, 무덤앞에다 연못과 계곡을

만들고 거기다가 비단잉어를 풀어놨었다고 하네요. 실제로 연못을 밀어내기전만해도 의릉 매표소에서는

잉어먹이를 팔기도 했습니다. ㅡㅡ 물론 지금은 다 밀어냈죠. 현재 이 자리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있으며

옛날 중앙정보부의 강당으로 쓰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이 건물은 등록문화재 제92호로 지정되었고 여기서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

 

 

 

동원상하릉형의 의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