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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전통과 역사/역사의 향기

환관 이야기

지송나무 2015. 6. 4. 10:43

환관 이야기

정보 독점해 皇帝 조종한 '그림자 비서'


환관 이야기|미타무라 다이스케 지음|한종수
 

조선시대 왕과 상류층의 얼굴-관상

 

 
청말 최고 실력자인 서태후가 여러 환관이 든 가마에 앉아 있다.
1908년 이전 사진이다. 환관은 권력자에 밀착해 공식 내각인
관료들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기도 했다.
 /위키피디아

  

중국 청나라 말 1870~80년대
북경을 취재한 영국인 스텐트는
환관(宦官) 지원자를 거세하는 수술 장면을
 상세히 기록했다.
자금성 서문인
서화문 밖 한 건물이 수술 장소였다.
집도(執刀)하는 이가 지원자에게
 "후회하지 않는가" 묻고
 나서 낫처럼 생긴 작은 칼로
성기와 음낭을 잘라낸다.

 

그런 후 나무못을 요도에 삽입하고
 3일간 물을 못 마시게 한다.
이때 갈증과 상처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는다고 한다.

 

사흘이 지나서 나무못을 빼낼 때
 오줌이 쏟아져 나오면 성공이다.
그렇지 못하면 죽음을 맞는다.

 

100일이 지나면 상처가 아물고
이후 1년간 실무를 배운 후
궁정에 들어가 환관이 된다.

 

거세 후에는 신체 변화가 나타난다.
 

 

2~3개월 지나면 수염이 사라지고
 얼굴이 반들반들해진다.
목소리는 여성처럼 가늘어진다.
 어릴 때 수술을 받은 이는
젊은 여자 목소리와 구별하기 어렵다고 한다.

환관은 거세된 남성으로
 궁정에서 일하는 관리를 말한다.

 

 자기 몸에 상해를 입히면서까지
 환관이 되려 했던 까닭은
가난한 서민이 밑바닥 인생을 벗어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능력과 운이 따른다면
 황제의 측근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1623년 결원이 된
 환관 3000명을 모집할 때는
 2만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명 말기
 환관 수는 10만명에 이르렀다.
16세기 명나라 중기 정덕제 때
'황명실록(皇明實錄)'은
"오늘날 환관은
 황제를 배후에서 조종해 권세를 쥐고
그 은혜는 구족(九族)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를 보고 어리석은 백성은
다투어 자기 아들이나 손자를 거세해
 부귀를 꿈꾸고 있다"고 적었다.
 

 

군주들은
 대개 간쟁하는 신하들보다
측근에서 보필하는 환관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피비린내나는 혈투 끝에 천하를 차지하고
대업을 함께 이룬 장수들을 숙청한
 한나라 고조 유방은
 환관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기를 즐겼다.
 

 

후한 영제는
 이른바 십상시(十常侍)로 불리는
 환관 중 최고위직에 있던 장양과 조충을 가리켜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5대10국의 하나인 남한(南漢)의 군주는
 "신하들은 가정이 있어 그들 자손의 일을 고려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군주를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이유가 없다
. 밤낮을 함께 해주는 환관만이
 일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자"라고 했다.
 
군주가 대신을 직접 대면하지 않고
환관이 군주의 명령을 전하게 하면
이는 환관에게 권력을 쥐여주는 일이 된다.

 

 "권좌에 가까울수록 발언권이 커지는 것은
어느 사회든 철칙"이기 때문이다.
 

 

환관은
 때로 군주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기도 했다.
명 만력제 때 환관은
 입궐하는 황제의 사위(부마)를 구타했다.
 

 

사위는 몰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된 채 맨발로 도망쳤다.
명 헌종과 경종은 환관에 의해 살해됐다.  


<인용>불로그 weokok,  meong 님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