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은문(迎恩門)과 독립문(獨立門)
독립문은 언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세웠을까요?
독립문이 마치 항일투쟁의 정신적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상징물입니다.
1896~1897년에 완공한 독립문은 조선이 중국의 청나라로 부터의 속국을 벗으난 독립을 기념하기 위하여,청국사신을 영접하든 영은문(迎恩門)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독립협회 중심으로 독립문을 세웠다.
그런데 매국노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다고 하니 아이러니 하다.
이에 앞서 조선에서 동학란(1894년 5월)이 일어나자, 자체적으로 진압하지 못한,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군대 출병을 요청하게 되고, 일본은 교민 보호를 핑게로 파병하니 청일 전쟁의 단초가 된다. 이렇게 되어,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한판 전쟁(1894.07.25~1895.04월)을 벌인다. 이 청일 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자 시모노새끼 조약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에서 독립된 것인데, 이때 일본은 "이또히로부미"를 축하사절로 보내자, 세계정세에 어두워 일본의 속셈도 모르고, 독립협회는 일본과 이또에게 순진하게도 감사를 표했다니,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승냥이의 굴에서 벗어나, 호랑이 굴로 들어 가는 형국이다.
- 꽹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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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은문(迎恩門)은 중국(청나라)에서 오는 사신을 맞이하던 문이다. 오늘날의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에 있었다.
1896에 독립협회가 이 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다. 헐리고 남은 주춧돌은 사적3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79년에 도로공사로 인해 현재의 위치로 이설되었다.
독립문 네거리 독립공원 입구에 서 있는 독립문. 그 뒤로 서재필 동상이 멀리 보인다
독립문 건립 경위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던 그 해, 조선정부는 일본의 지원 하에 3차에 걸쳐 갑오개혁(갑오경장)을 단행했습니다. 조선정부 내에서 갑오개혁을 추진한 주체들은 개화파 관료들로 이들은 이를 통해 권력의 주체로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그 무렵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하여 귀화한 뒤 컬럼비아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활동하고 있던 서재필(徐載弼, 1864~1951, 미국명 필립 제이슨)이 과거의 동지인 개화파들의 잇따른 귀국 종용으로 1895년 12월말 12년만에 귀국했습니다.
귀국 직후 1896년 1월 서재필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는데, 그와 개화파들은 국민계몽과 정부의 개화정책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정부의 재정지원(4,400원)과 각계의 도움을 받아 1896년 4월 7일자로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는 이를 기념하여 4월 7일을 ‘신문의 날’로 정함)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기념 첫 사업으로 ‘나라의 독립을 기념하는’ 독립문 건설을 주창하였는데, 위로는 왕실에서부터 아래로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에 서재필, 윤치호 등은 개화파들의 지원 하에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를 모태로 독립협회를 결성(1896. 7. 2)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서재필은 고문으로 선출되었으며, 이밖에 회장에 안경수, 위원장에 이완용, 위원에는 김가진, 김종한, 이상재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습니다. 이들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이듬해 11월 중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으며, 인근에 있는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독립문 완공 직후 모습. 독립관 주변으로 초가들이 있고, 독립문 뒤로 인왕산이 둘러처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이들이 주장하는 ‘독립’은 누구(어디)로부터의 독립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시다시피 독립문이 세워진 1897년 당시 조선의 국운이 기울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나라의 주권을 상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 체결(1905년)은 그로부터 8년 뒤의 일이며, 1910년의 국권상실은 그로부터 13년 뒤의 일입니다. 그러면 이 때 ‘독립’ 얘기는 대체 왜 나온 것일까요? 다음 두 가지에서 우리는 그들이 주장한 ‘독립’이 누구(무엇)로부터의 ‘독립’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립문을 세운 위치이며, 다른 하나는 독립문 건립이 결정된 날 독립협회가 보인 자세입니다. 우선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독립문이 세워진 자리는 도심 한가운데인 광화문 자리도 아니고 서울의 관문이랄 수 있는 남대문 자리도 아닙니다. 과거 중국 사신들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헌 바로 그 자리입니다. 결국 이는 일본도, 미국도, 러시아도 아닌 바로 중국(당시는 청나라)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이 점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독립문이 일제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세운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보다 더 분명한 증좌가 있습니다. 독립문 건설이 결정된 날 독립협회는 "조선이 몇 해를 청(淸)의 속국으로 있다가 하느님의 덕으로 독립하였다."며 기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통해 조선이 '청의 속국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려는 것이었고, 그런 연유로 독립문 건립 위치를 대중(對中) 사대의 상징이었던 영은문 자리로 잡은 것입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한 뒤 1895년 일본과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종주권 포기'를 공식 천명한 바 있어 독립협회가 언급한 ’하느님‘은 결국 일본인 셈입니다.
영은문을 헌 자리에 세운 독립문. 가운데 한옥은 모화관을 개조한 독립관이며, 원내는 영은문 주초(柱礎)임
한 가지 의문인 것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왜 그때는 조선의 ‘독립’을 원했을까 하는 점입니다. 운양호사건을 빌미로 조선 침략의 마수를 드러낸 일본은 1876년 조선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약 제1조에서 놀랍게도 '조선은 자주 독립국'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이 이후 시모노세키조약(1895년)에서 ‘조선은 자주독립국’임을 명시(아래 박스 내용 참조)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속셈은 오랫동안 중국의 손아귀에 있던 조선을 중국(청나라)에서 떼어놓는 것이 1차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20년 전, 즉 '운양호사건'(1875년) 때부터 이를 심모원려(深謀遠慮)하였던 것입니다.
1883년 미국방문길에 나선 개화파 일행. 앞줄 오른쪽 두번째부터 서광범, 민영익, 맨 왼쪽이 홍영식.
뒷줄 왼쪽 네번째는 유길준
1.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할 것 1.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짐
2. 타이완[臺灣]을 일본에게 할양함 2. 조약 체결후 20개월내 부산 등 2개 항 개항할 것
3. 청국은 일본에 배상금 2억 냥을 지불함 3. 개항장 내에 조계(租界)를 설정할 것
그당시, 독립협회를 이끈 개화파 세력들은 일제의 이같은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의 정적이랄 수 있는, 친청파(親靑派) 명성황후와 청나라간의 유대를 차단하는 데만 급급했던 것입니다. 개화파들의 이런 정치적 의도는 묘하게도 일본과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개화파들은 일본에게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요청하였고, 일본은 청나라와 결탁한 명성황후 세력을 제거할 목적에서 개화파를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개화파가 주도한 갑신정변(1884년)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으며, 김옥균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일본은 김옥균 일당에게 피신처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완용이 썼다는 '독립문' 현판 글씨. 왼쪽 한자는 무악재 쪽이며, 오른쪽 한글이 시내쪽임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과 개선문을 본떠 만든 독립문
일제강점기엔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등 ‘독립’ 두 글자만 들어가도 순사들이 눈알을 뒤집고 잡아가든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절에도 독립문은 '독립' 두 글자를 달고도 온전히 살아남았습니다. 탄압은커녕 오히려 당국의 보호와 배려를 받앗습니다. 총독부는 1928년 10월 경성부(현 서울시)를 통해 독립문 상단부에 대해 보수공사를 해주었으며, 8년 뒤인 1936년 5월엔 독립문을 아예 '고적 제58호'로 지정하기도 했습니다. (* 영은문 주초는 '고적 제59호'로 지정됨)
'독립' 두 글자라면 알레르기반응을 보이던 일제가 대체 왜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서재필 등 개화파들이 주도해서 세운 ‘독립문’은 처음부터 일제(일본)가 타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독립문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상징물입니다. 따라서 현재 독립공원 입구에 있는 독립문이 마치 항일투쟁의 정신적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게다가 ‘독립문’에는 매국노 이완용의 ‘흔적’이 너무도 짙고 또 깊게 배어 있습니다.
독립문에 배어 있는 이완용의 ‘흔적’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립문 건립에 이완용이 크게 기여한 점이며, 다른 하나는 독립문의 상징인 현판을 그가 썼다는 점입니다.
이완용은 당시 친미성향의 '정동파'의 핵심멤버로 독립협회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는 독립협회 창립총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초대회장 안경수에 이어 제2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독립협회 운영비 전체 모금액 510원 가운데 100원을 그가 내는 등 협회의 재정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회장이 된 후에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협회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독립협회 자체가 사실상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 구성된 단체였던만큼 이완용은 독립문 건립의 최대 공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이런 공로(?) 때문인지 <독립신문>은 1997년 11월 11일자 1면 논설에서 이완용을 '대한의 몇 째 안가는 재상'이라며 칭송하기도 했었습니다.)
이완용이 독립문 현판을 썼다고 기록한 <동아일보> 기사(1924. 7.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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