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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서희 장군

지송나무 2015. 6. 11. 15:58

 

서희 장군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간건 아니지만 우연히 이 길(지방도 365)을 지나다  안내 이정표를 접하고 그 유명한 서희 장군을 그냥 지나 칠 수 없어 들려 보게 되었습니다.

여주군 산북면의 산북초등학교 앞에서 우회전 하여 이포대교 쪽으로(지방도 365도로) 약1km를 못가서  도로 옆에 서 있는 서희 장군 묘역(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후리(일명 뒷골)) 안내 이정표를 따라 350m를 들어가면 야트막한 능선에 자리잡고 있는 묘역을 보고 서희가 누구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되엇습니다.

 

 

고려 성종왕은 거란장군 소손녕의 위세에 겁을먹고 서경(지금의 평양)을 때어 주려 했으나,

서희는"지금 적의 세력이 강성함을 보고 급히 서경 이북을 떼어 넘겨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삼각산 이북도 역시 고구려의 옛 땅인데,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요구해 온다면 그대로 다 내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지금 땅을 떼어 준다면 진실로 만세의 수치가 될 것이옵니다.

원컨대 도성으로 돌아가시어 신 등으로 하여금 한 번 싸우게 한 뒤에 의논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서희가 국서를 받들고 거란 진영에 들어가 세기의 담판을 하게 된다

 

 

 


당시의 국제 정세

 

당시 서희는 거란침입의 본래 목적이 영토확장이 아닌 고려와 친교하여 송을 견제하는데 있다는 것을 간파한 서희는 소손녕의 80만 대군을 상대로 조금도 기죽지 않고 세치혀로 담판을 벌여 나라를 구하였다는 서희는 문관으로 정치가이고, 외교가이자, 전략가요, 장군이기에  국방부에서도,  외교부에서도 섬기며 모시고 있으며,서희의 본관 지이자 그의 무덤이 있는 이천시에서도 기념물과 동상들을 볼수 있다.

  

내가 서희장군의 무덤을 찾았을 때는 뻐꾸기 소리만이 들리는 한적한 곳에 누워 천년의 세월이 지낫음에도 더욱빛나는 서희 같은 인물이 분단 조국에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인물이 아닌가 생각해 봄니다. 

 

 

 

 

 

 

 

 낙엽송 같은 적송 소나무 숲이 우거진 모퉁이를 돌면 바로 서희장군 묘역이 나온다

 

 

좌우에 문신과 무신이 지키는 당시만 해도 왕의 무덤에 버금가는 무덤 이였다

천년 고색이 짙은  묘역이다

 

서희장군 묘는 부인묘와 쌍분을 이루고 있으며 직사각형의 돌로 

2단 호석을 두른 직사각형의 묘이다.

 

 고려 성종 묘정에 제향되고 덕종 때 태사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장위(章威)이다.

 

묘역 전경 

 

 

 

 서희 장군 묘역에서 서북쪽으로 여주군 산북면 면소재지가 눈에 들어 온다

 

서씨 가문을 빛낸 인물이라 이천 서씨 문중에서 세운 비석과 서희장군의 사당 상산재가 입구에 있다.

 

 

그러면 서희 장군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찾아 보자!

 

서희 (942(태조 25, 943?)∼998(목종 1))

 

고려 초기의 정치가이며 외교가. 본관은 이천이고 자는 염윤이다.

 

1. 가계와 관직

 

내의령을 지낸 필의 아들이다. 조부인 신일때까지는 이천지방에 토착한 호족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버지에 이어서 서희 자신도 재상위에 올랐고, 다시 그의 아들 서눌·서유걸이 수상인 문하시중과 재상인 좌복야를 지냈을 뿐더러, 특히 서눌의 딸은 현종의 비가 되어 외척가문의 하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과 아울러 그는 스스로의 재능으로 평탄한 출세의 길을 걸었다.

 

960년(광종 11) 3월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쳐, 983(성종 2)에는 군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가 되고 얼마 뒤 내사시랑평장사를 거쳐 태보·내사령의 최고직에까지 이르렀다.

 

 

2. 거란과의 외교담판

 

서희장군 하면 뭐니뭐니 해도 거란 소손녕 장군과의 대등한 외교 담판으로 회자 되고 있다

서희의 뛰어난 외교 역량으로 압록강 동쪽 280리 강동 6주 지역은 완전히 고려의 영토가 되었다. 거란 80만 대군의 침입이라는 국난을 당하면서도, 냉철한 국제 정세 인식으로 고려를 지키고 나아가 영토 확장까지 꾀한 서희. 서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든 뛰어난 외교 전문가였다.

 

이와같이 정치적 활동에서도 중책을 맡았으나 외교적으로도 이에 못지않는 많은 업적을 올렸다.

 

972년에 십수년간 단절되었던 송나라와의 외교를 그가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들어온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하여 이를 물리친 일이었다.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동경유수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거란군은 봉산군을 격파한 뒤, “대조(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땅을 차지하였는데 지금 너희 나라에서 강계를 침탈하므로 이에 와서 정토한다.”는 등의 위협을 거듭하였다. 이에 대하여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지금의 평양)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이 우세하였다.

 

그러나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적극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여기에 민관어사 이지백이 동조하자 왕도 이에 찬성하였다.

 

이때 마침 소손녕도 안융진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에게 패하여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서희가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거란의 군영에 도착하여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이 서희에게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하자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며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그대 나라는 신라땅에서 일어나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하였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가지를 들었으나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서희는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지금의 랴오양)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에 도거하여 완악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의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라고 반박, 설득하였다.

 

이와같이 언사와 기개가 강개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하였다. 이러한 서희의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다.

 

그 결과 994(성종 13)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귀화진·곽주·귀주·흥화진 등에 강동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3. 성품과 처사

 

서희는 문무를 겸비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품도 근엄하고 사리에 밝았던 것 같다. 일례로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미행으로 영명사에 가서 놀이를 하고자 하는 것을 상소, 간언하여 중지시켰다.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양하였으며, 다시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를 올리도록 한 사실에서도 그의 면모를 살필 수가 있다.

 

또한 공빈령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시정의 일곱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뜻을 거슬렸으나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에게 돌렸다고 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고 한다. 서희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일신의 영달과 더불어 나라에 큰 공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가 996년에 병으로 개국사에 머물게 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하여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 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정성을 다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개국사에서 요양하던 서희는 998년

(목종 원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장위이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다.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던 당시의 국제정세를 보면

 

 

916년 나라를 세운 뒤 938()’로 이름을 바꾼 거란은 당시 최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중원 전체를 장악할 야망을 가지고 있었던 거란은 960년 건국된 송을 압박하며 고려를 위협했다. 송과 거란의 대치상태에서 고려는 송과 국교를 맺고 거란을 멀리했다. 발해에 대해 적극적인 포용정책을 펴던 고려의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한 거란의 친선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왕건은 거란이 보내온 사신 30명을 섬에 유배 보내고 함께 보낸 낙타 50필을 굶어 죽게 하는 등 반거란 정책을 분명히 했다.

 

왕건이 거란의 낙타를 굶겨 죽이던 942, 서희(942~998)는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종 대의 대쪽 재상 서필이었다. 집안도 좋았지만, 열아홉 살 되던 해 과거에 급제했고 과거 급제 후 차례를 뛰어 넘어 승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학문적으로도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 송이 건국되던 해, 서희는 과거에 급제했고, 12년 뒤 내의성 시랑의 벼슬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962년, 965년 두 차례의 사신 교환이 있었지만, 한 동안 사신 왕래가 두절되었던 터라 쉽지 않은 길이었다. 처음에 송 태조는 이들을 반가이 맞아주지 않았다. 그 동안 고려가 아무런 외교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서희는 여진과 거란이 육로를 막고 있어 그간 외교 사절을 보내지 못했음을 설명했다. 서희의 예의바른 태도와 뛰어난 언변에 송 태조는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 관계를 맺고, 조칙을 내려 광종에게 식읍을 더해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라는 벼슬을 내렸다. 명예직이기는 하나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관직이다. 젊은 시절부터 서희의 외교적 역량이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경험을 통해 서희는 송과 거란이 대치하고 있는 동아시아 국제정세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

거란 적장 소손녕의 협박, 투항론과 할지론으로 나뉘어진 고려

거란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접한 고려의 성종박양유를 상군사, 서희를 중군사, 최량을 하군사로 임명해 막게 했다. 이들은 북계(현재의 평안북도 지방)에 군사를 주둔하고 적을 방어할 준비를 서둘렀다. 성종도 친히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서경으로 갔다. 이 무렵 소손녕이 다시 공문을 보내왔다. “우리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게 귀순치 않는 나라는 기어코 소탕할 것이니 속히 투항하라. 잠시라도 머뭇거리지 말라.”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압록강 하류 지역의 빈해여진과 그 중류지역에 있던 정안국을 멸망시켜버린 요였다. 송도 거란이 차지한 화북의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가 대패했듯이, 거란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자였다. 그러나 소손녕의 공문을 읽은 서희는 성종에게그들과 화의할 수 있는 조짐이 보인다고 말했다. 고려를 멸망시킬 목적으로 군사를 동원했다면, 일단 치고 내려올 것인데 항복하라고 공문을 보내고 기다린다는 데서 뭔가 감지했던 것일까. 송과 대치중인 상태라 고려와의 전면전이 부담스러울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을까. 

성종은 이몽전을 보내 화의를 청했다. 1차 협상이다. 이몽전이 침공의 이유를 묻자 소손녕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이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 만일 화의를 구하려거든 빨리 와서 항복하라.” 다시 한번 항복하라는 뜻을 전했을 뿐 성과 없는 회담이었다. 이몽전이 돌아오자 고려의 조정은 두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 거란의 요구대로 항복을 하자는 투항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게 주고 화의를 청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었다. 무조건 항복하는 것보다는 땅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성종의 마음이 기울었다. 서경의 창고를 열어 비축해두었던 쌀을 백성들에게 마음대로 가져가라고 했다. 그러고도 많은 쌀이 남자 적들의 군용으로 사용될 것을 염려하여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때 서희가 나섰다. “지금 거란의 병세만을 보고 경솔하게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삼각산 이북 또한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그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어주어야 하겠습니까? 국토를 떼어 적에게 준다는 것은 만세의 치욕입니다. 바라건대 저희들로 하여금 적과 일전을 겨루게 한 뒤 그때 가서 다시 화친을 논의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전 민관(民官, 호조의 수장) 이지백도 이 말에 찬성했다.


 

 

고려의 조정이 이런 논의들로 바빠 회답이 늦어지자 소손녕은 다시 남하해 청천강 이남의 안융진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때 대도수(大道秀)와 유방(庾方)이 거란군을 물리쳐 이겼다. 유목민족인 거란의 부대는 고려의 산악지대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어려움을 느꼈던 듯하다. 소손녕은 더이상 진공하지 않고, 다시 항복을 독촉하기만 했다. 고려는 부랴부랴 합문사인 장영(張塋)을 사신으로 보냈으나 소손녕은 그보다 직급이 높은 대신을 보내라며 허세를 부렸다. 2차 회담은 제대로 시도도 못해보고 실패한 꼴이었다. 성종이 중신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누가 거란 영문으로 가서 언변으로써 적병을 물리치고 만대의 공을 세우겠는가?”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장영이 살아서 돌아오긴 했지만, 대신을 불러 죽이려는 함정일지도 모르는 자리였다. 이때 서희가 자원했다. “제가 비록 불민하나 어찌 감히 왕명을 받들지 않겠습니까?” 성종은 개성 북쪽 예성강가까지 나아가 서희의 손을 잡고 위로하며 전송했다.


거란과의 3차 회담, 서희가 나서다

그렇게 제3차 회담이 시작되었다. 서희는 국서를 가지고 소손녕의 영문으로 갔다. 기를 꺾어 놓을 심산이었던 듯 소손녕은나는 대국의 귀인이니 그대가 나에게 뜰에서 절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거란의 군사가 가득한 적진에서 서희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신하가 임금에게 대할 때는 절하는 것이 예법이나, 양국의 대신들이 대면하는 자리에서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소손녕이 계속 고집을 부리자 서희는 노한 기색을 보이며 숙소로 들어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은 물론 나라의 운명이 달린 자리였으나 서희는 한 나라의 대신으로서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 거란이 전면전보다 화의를 원하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행동이었다. 결국 소손녕이 서로 대등하게 만나는 예식 절차를 수락하면서 첫 번째 기싸움은 서희의 승리로 돌아갔다.

 

서희와 소손녕은 마주서서 서로 읍한 후 당상으로 올라와 서쪽과 동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본격적인 담판이 시작되었다. 먼저 소손녕이 물었다. “당신네 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나라에 소속되었는데, 어째서 당신들이 침범하였는가?” 광종이 여진의 땅을 빼앗아 성을 쌓은 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소손녕이 제기한 이 물음은 이번 정벌의 명분에 대한 얘기로누가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는 것이 정당한가하는 매우 중요한 논점이다. 서희는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는 바로 고구려의 후예이다. 그러므로 나라 이름을 고려라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것 아닌가.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는데 어찌 거꾸로 침범했다고 하는가?” 한치의 틈도 없는 서희의 논리에 소손녕의 말문이 막히면서 고구려 후계론 논쟁은 일단락 지어졌다.

거란의 의도를 꿰뚫어본 서희의 외교술

마침내 소손녕이 정벌의 본래 목적을 얘기했다.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면서 바다 건너에 있는 송나라를 섬기고 있는 까닭에 이번에 정벌하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하리라.” ‘국교의 회복,’ 그러니까 송나라를 섬기지 말고 거란을 섬기라는 의미이다. 송과 손을 잡고 있는 고려를 자신들의 편으로 돌아 앉혀 혹시 있을 송과의 전면전에서 배후를 안정시키는 것, 그것이 거란의 본래 목적이었다.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이 그 중간을 점거하고 있어 육로로 가는 것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왕래하기가 더 곤란하다. 그러니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 탓이다. 만일 여진을 내쫓고 우리의 옛 땅을 회복하여 거기에 성과 보를 쌓고 길을 통하게 한다면 어찌 국교가 통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알았지만, 바로 그 답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서희의 탁월함이다. 서희는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며 조건을 내걸었다. 소손녕이 회담의 내용을 거란의 임금에게 보내자 고려가 이미 화의를 요청했으니 그만 철군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리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영토를 개척하는 데 동의한다는 답서도 보내왔다.

 

비록 그들의 요구대로 국교를 맺어 이후 일시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지만, 싸우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내고, 오히려 이를 전화위복 삼아 영토까지 얻었으니 우리 역사상 가장 실리적으로 성공한 외교라 칭찬받을 만하다. 송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거란의 국제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또한 안융진전투 이후 산악지대에서의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읽어낸 통찰력, 논리 정연한 언변, 예의 바르면서도 당당한 태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듬해부터 서희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 뒤 흥화진(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 등의 강동 6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소손녕과의 담판 이후 서희는 평장사를 거쳐 종1품 태보내사령에 임명되었으나 996(성종 15)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오랫동안 치료와 요양을 했다. 이때 성종이 직접 문병을 와 어의 한 벌과, 말 세 필을 사원에 나누어주고 개국사에는 곡식 1천 석을 내렸다. 개국사에서 요양하던 서희는 998(목종 원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거란이 협상에 나선 데는 까닭이 있었다.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거란은 중원을 지배하던 송나라와 대립관계였다. 고려를 침공한 것도 송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작용했다. 서희는 이 같은 판세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마침 오랜 행군과 안융진에서의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거란군에 철군의 명분을 제공하니 받아들일 수밖에.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혜안과 상대의 약점을 활용하는 외교력을 통해 자칫 평양 이남으로 쪼그라들 뻔했던 영토를 지켜낸 것이다.

 

국제 정세를 간파한 서희의 외교력


후삼국을 통일한 지 50여년이 지난 무렵인 10세기 후반, 고려는 서북방에서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거란의 위협에 직면했다. 역사적으로 오랜 원한도 있고, 중국 대륙까지 넘보던 거란은 993년 소손녕을 대장으로 하여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해 왔다. 놀란 고려 조정은 서경(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분할해 주자는 주장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 '솔군걸항(率軍乞降·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항복을 하자)'의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 거란과의 외교적 담판을 주장하고 자신이 직접 회담의 대표로 나서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서희(徐熙·942∼998)였다. 담판 결과는 거란의 80만 대군을 돌려보냈을 뿐 아니라, 거란이 자신의 땅이라고 주장하던 압록강 유역의 강동 6까지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는 예상외의 엄청난 수확을 얻었다. 어떻게 이러한 협상이 가능했던 것일까? 당시 서희와 소손녕의 회담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거란의 소손녕은 고려가 국경을 맞대면서 왜 송나라에 하는 것처럼 거란에 조공을 바치지 않느냐고 서희를 윽박질렀다. '조빙(朝聘)'이라는 말을 쓰면서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맺고 예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것은 거란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태도에서 한발 물러선 것으로서 거란이 고려와 외교 관계를 맺자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서희는 이 제안을 바로 수용하지 않고, '환아구지(還我舊地)', '고려의 옛 영토를 돌려 달라'는 것을 협상 카드로 내세운다. 거란과 국교 수교의 전제 조건으로 압록강 일대 강동 6주를 고려 영토로 인정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가 제시한 조건을 거란의 왕에게 알리고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중국 송나라와의 외교 단절과 거란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워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자행된 거란의 고려 침입을 묘사한 그림.

당시로나 지금의 입장에서 봐도 거란에는 불리하고 고려에는 매우 유리한 이 조건을 거란이 수용한 것에는 당시의 국제관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당시 거란은 원래 한족이 세운 송나라의 영토인 북경 지역까지 차지하고 있었다. 여세를 몰아 중국 본토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거란과 북경 지역을 회복하여 거란의 침공을 차단하려는 송은 운명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거란의 주된 공격 대상은 송나라였고, 고려에 파견한 군사를 뽑아 송나라 침공에 '올인'해야 했다. 그런데 압록강 주변에는 고려 군대의 성이 곳곳에 있어서 거란 군사의 퇴각은 만만치가 않았다. 더욱이 장기전에 들어간다면 거란군은 완전히 포위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송나라 대군이 거란을 침입해 올 가능성도 있었다.

결국 거란은 고려와 '평화적인' 외교를 수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고, 거란의 이러한 의중을 서희는 정확히 파악했던 것이다. 실제 거란은 고려의 정복보다는 고려가 송과 연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를 침공한 측면이 컸다. 따라서 고려로부터 송과 연합하지 않고 거란과 국교를 맺겠다는 서희의 약속을 받아낸 이상, 자신들이 관리하기에도 힘든 압록강의 강동 6주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카드였던 셈이다. 서희는 고려와의 국교를 목표한 거란의 심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당당히 강동 6주를 요구했고, 이를 성공시켰던 것이다.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의 전투를 그린 '사진검격도'()와 조선군의 투항 장면을 그린 '양수투항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