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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해동공자 최충 고려시대 명재상

지송나무 2015. 6. 13. 09:08

해동공자 최충 고려시대 명재상

 

해동공자  최충

고려시대 명재상 '최충'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현종대를 거쳐 덕종, 정종, 문종에 이른 태평성대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사건은 이른바 유학의 융성이다.

이 시기 유학이 융성하게 된 것은 과거제의 시행에다 성종대 이후 유교적 정치이념이 채용되어 유학자들이 꾸준히 배출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최충 같은 인물에 의해 사학의 기풍이 진작되어 후진들이 본격적으로 양성되기 시작했다는 것도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문종대 사학을 진흥시켜 고려 유학을 꽃피우게 한 최충은 984년 해주 최씨 최온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자는 호연이다. 부친인 최온은 향리 출신으로 해주 최씨 시조로도 올라 있을 정도로 문행이 뛰어났던 인문이다. 따라서 문무를 겸비한 최충의 호학적 태도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사실 최충의 일생에 대한 기록은 풍부하지 않아 그의 전 생애를 조망해보기는 어렵다. 다만,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과 지조가 굳건하였으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글짓기를 잘했다는 《고려사》기록으로 보아 특별한 문벌 출신이 아닌 그가 출세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최충은 22세 때인 1005년(목종8)에 과거에 응시. 장원급제한 후 벼슬길에 나가 우습유를 시작으로 한림학사, 예부시랑, 간의대부를 거쳐 형부상서, 중추사, 참지정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현종대에는 ‘칠대실록’ 편수작업에 수찬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문종이 즉위했을 무렵에는 내사시랑평장사에 있었는데 이후 문하시중으로 발탁되어 정치 일선에서의 활약을 예고했다.

최충은 재상이 되자 법률관을 동원하여 재래의 율령을 개정하고 서산을 교정하는 작업과 형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참여하는 등 제도정비에 주력하였다.

 

문종대에 이루어진 수많은 법제도의 정비는 사실상 최충이 재상 시절에 일궈낸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상으로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느낀 최충은 1053(문종 7년) 문종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퇴를 결심했다. 이 때 그의 나이 70세. 그러나 40여 년에 걸친 기나긴 벼슬생활을 마감한 노재상의 앞에 또다시 후진양성이라는 새로운 사명이 놓여있었다.

 

9재학당

 

수십 년간 거란 침입을 겪으면서 고려사회의 교육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지방의 향교는 말할 것도 없고 최고의 교육기관인 국자감마저 들어가면 언제 졸업할지도 모를 정도로 느슨하게 운영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렇듯 국자감의 부실한 교육여건을 목격한 최충은 세인들의 절실한 요구에 부응하여 자신의 집에 사숙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였다. 최충이 사숙을 운영한다는 소문이 나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학도들로 그 학당은 금새 문전성시를 이뤘다.

최충은 학사를 소악산 아래 자하동에 마련했는데 모여드는 학도가 너무 많아 거리까지 넘칠 정도였다. 따라서 이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9재를 설립했다.

 

이 때 세워진 9재는 악성, 대중, 성명, 경업, 조도, 솔성, 진덕, 대화, 대빙 등 9개로 분류되었는데 이것은 진학의 순서와도 관련이 있었다. 초학자는 먼저 악성재에 들어가 6예를 익히고 다음 순차적으로 여러 재를 거쳐 마지막에 대빙재에서 수학함으로써 졸업하는 것이다.

그런 최충이 ‘성명’, ‘솔성’ 등과 같이 9재의 명칭을 《중용》을 바탕으로 유학을 가르친 것이라 하겠다.

9재학당의 교과서는 9경과 삼사였다. 이들 과목을 중심으로 학도들의 최대 희망이기도한 과거시험 교육과 함께 시와 문장을 가르치는 일도 빠트리지 않았다. 최충은 여러 번 지공거(知貢擧:과거고시관)를 거쳤으므로 대체로 과거에 응시하려는 학도는 먼저 최공도에 끼어 공부하기를 소원하였고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의 승방을 빌려 여름학기 강습을 운영해야 될 정도로 그 열기가 뜨거웠다.

 

또한 최충은 간혹 이름난 선비들이 찾아오면 여러 제자들과 더불어 ‘각촉부시’(초에 금을 그어놓고 그 금까지 타기 전에 시부를 짓는 것)라는 시 짓기 대회를 열어 그 성적대로 차례로 앉히고 술잔을 돌리는 행사도 열었다. 각촉부시가 진행되는 동안은 그야말로 진퇴의 절도와 장유의 서열이 분명할 뿐만 아니라 종일토록 수창하는 모습이 질서 정연하고 의식을 갖추었으므로 보는 사람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로써 최충의 9재학당에서 배운 학도들의 명성은 국자감을 능가하여 여기서 공부한 학도들은 최충의 벼슬이름을 따 흔히 ‘시중 최공도’라 일컬어졌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시호를 따라 ‘문헌공도’라고 불리워졌다.

 

사학 12도의 성립

 

최충의 9재학당이 점차 명성을 얻어가자 이를 모방한 사숙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설립된 사숙은 시중 정배걸의 ‘홍문공도’, 참정 노단의 ‘광헌공도’, 좨주 김상빈의 ‘남산도’, 복야 김무체의 ‘서운도’, 시랑 은정의 ‘문충공도’, 평장 김의진의 ‘양신공도’, 평장 황영의 ‘정경공도’, 유감의 ‘충평공도’, 시중 문정의 ‘정헌공도’, 서석의 ‘서시랑도’, 그리고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의 ‘구산도’ 등이 그것이다.

 

 

아무튼 이들 12도 가운데서 역시 원조격에 해당하는 최충의 ‘문헌공도’가 가장 많은 학도수를 자랑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학교가 많이 생기게 되었으므로 최충은 이후 ‘해동공자’라 불리게 되었다.

 

사학의 발달로 국학이 침체일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문종은 “국자감의 학생들이 학업을 포기한 책임을 가르치는 학관에게 있다”며 질타하고 국자감에 들어간 지 9년이 된 자와 율생으로 6년이 된 자들가운데 소정의 학업을 마치지 못한 자들을 모두 쫓아내게 하였다. 이와 동시에 문종은 국자감의 직제를 재정비하여 국학을 부흥시켜려 했으나 이미 사학으로 몰린 학도들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한편, 은퇴한 이후로 사학 발전에 온 힘을 기울인 최충도 노쇠함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8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살아 생전 최충은 평소 두 아들 최유선과 최유길에게 권력보다 학문의 길에 종사하라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했다.

“선비가 세력에 빌붙어 벼슬을 하면 끝을 잘 맺기가 어렵지만 글로써 출세하면 반드시 경사가 있게 된다. 나는 다행히 글로써 현달하였거니와 깨끗한 지조로써 세상을 끝마치려한다”

이같은 최충의 유언대로 최사추 등 자손 수십 명도 이후 모두 학자로서 재상에 올랐으니 최충은 자손들의 교육에도 성공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