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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흥신 김유신(金庾信, 595~673)

지송나무 2015. 6. 13. 09:10

 

 

<김유신 장군 동상>

 

흥신 김유신(金庾信, 595~673)은 595년 아버지 김서현과 어머니 만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멸망한 가야 왕손으로 증조 할아버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이며, 할아버지는 관산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무력이다. 어머니인 만명부인은 진흥왕의 아우인 숙흘종의 딸이다.

 

가야의 왕손, 망국의 후예로 자라다

김서현이 길에서 만명을 보고 사랑하여 중매를 거치지 않고 부부관계를 맺었는데, 이를 안 숙흘종이 딸을 가두어놓고 사람을 시켜 지키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신라 왕실의 일원이었던 만명과 가야계였던 김서현과의 혼인은 당시 사회적으로 용납받기 어려운 결합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벼락이 집 문을 쳐서 지키던 사람이 혼비백산한 틈에 만명은 빠져나가,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던 김서현을 따라갔다고 한다. 아마, 만명의 가족들이 결혼을 묵인하고 김서현에게 만노군 태수라는 벼슬을 내렸을 것이다. 만노군은 지금의 충청도 진천 지역으로, 이곳에서 김유신은 태어나고 자랐다.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화랑이 된 김유신은 2년 뒤, 외적을 평정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의 석굴로 들어가 수련했다. 이때 난승이라는 노인을 만나 삼국통일에 쓸 비법을 전수받았다. 또 다음 해에는 홀로 보검을 들고 인박산에 들어가 기도하니, 사흘째 되는 날 허성(북쪽의 넷째 별자리)과 각성(동쪽의 첫째 별자리) 두 별이 환하게 빛나면서 칼에 내려앉았다. 김유신이 소년 시절부터 삼국통일의 뜻을 품었고, 하늘의 도움으로 그 힘을 길러나갔다는 전설적인 일화들이다.

 

 

낭비성 전투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다

김유신이 처음으로 전공을 세워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629년(진평왕 51년)의 일이다. 신라는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공격은 실패하는 듯 보였다. 부상자가 늘어가는 가운데 신라군은 고구려의 기세에 밀리고 있었다. 이때 오늘날의 연대장이라 할 수 있는 부장군 자격으로 출전한 김유신은 그의 아버지 김서현 장군에게 허락을 구한 뒤 혼자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고구려군에서도 장수 한 명이 나와 김유신 앞을 막았다. 그러나 적장은 김유신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별이 김유신의 칼에 내려앉았다는 전설이 전하듯 김유신은 칼을 잘 쓰는 장수였다. 김유신의 칼이 적장의 목을 베는 순간 신라군의 함성은 하늘을 흔들었다. 그 기세로 몰아붙인 신라군은 고구려군 5,000여 명의 목을 베고 1,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그의 명성이 온 나라에 퍼졌다. 그의 나이 서른셋에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며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열다섯에 화랑이 되고 나서, 삼국통일의 비법을 전수받았다는 설화를 생각한다면, 빠른 등장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실 철기문화가 발달했던 가야 왕족 출신의 3대, 김무력과 김서현, 김유신 모두 군사적인 능력이 우수했으나 가문은 점차 쇠락하고 있었다. 김무력은 신라 제1위 관등인 각간에 올랐지만, 김서현은 신라 제3위 관등인 소판에 그쳤고, 김유신도 30대 중반에 부장군에 불과했다. 가야계라는 신분적인 제한이 여전히 김유신의 발목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춘추와 손을 잡고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다

 

<김유신 장군 묘로가는 흥무원,  장군은 흥무대왕으로 봉한되어 왕으로 추앙되었다.>

 

김유신은 이 문제를 적극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 보내 유력한 신라 왕실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이다. 김춘추는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 왕권 계승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골 남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진골 신분인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김유신은 판단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집으로 불러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터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여동생을 불러 옷고름을 달아주게 했다. 이를 계기로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가졌으나 김춘추는 결혼을 주저했다. 역시 가야계라는 게 문제였을 것이다. 김유신은 왕이 남산에 행차한 시간에 맞춰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렇게 왕의 주의를 끌어 결국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김유신이 가진 군사력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된다.

 

김유신은 이 문제를 적극적인 방법으로 해결했다.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 보내 유력한 신라 왕실 가문과 인척관계를 맺은 것이다. 김춘추는 “정사가 어지럽고 음란하다.”는 이유로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로, 왕권 계승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골 남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성골 여성이 왕위를 잇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진골 신분인 김춘추와 힘을 합쳐 훗날을 도모할 수 있다고 김유신은 판단했다.
 
김유신은 김춘추를 집으로 불러 공차기를 하다가 일부터 그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여동생을 불러 옷고름을 달아주게 했다. 이를 계기로 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아이를 가졌으나 김춘추는 결혼을 주저했다. 역시 가야계라는 게 문제였을 것이다. 김유신은 왕이 남산에 행차한 시간에 맞춰 여동생을 태워 죽인다며 연기를 피워 올렸다. 그렇게 왕의 주의를 끌어 결국 김춘추와 여동생의 결혼을 성사시켰다. 이후 김춘추의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김유신이 가진 군사력의 결합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견인차가 된다

 

김유신은 642년 압량주 군주가 되었고, 644년에는 소판에 올랐다. 그해 가을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7개 성을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으나, 백제가 매리포성을 공격하자 가족들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정하여 백제군 2,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개선하자마자 또 다시 서부전선으로 달려가 백제군을 물리쳤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평생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명장이요 전략가였다.
 
선덕여왕의 비호 아래 김유신과 김춘추가 급성장하자 비담과 염종을 비롯한 구세력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하면서 김유신과 김춘추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다. 이 난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덕여왕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진덕여왕마저 재위 8년 만에 죽자, 김춘추가 왕위를 이어 태종무열왕이 되었다. 처음에는 여러 신하가 김알천을 왕으로 추천했으나 그가 사양하며 김춘추를 추천했다고 전하지만, 그 이면에는 막강한 군사력으로 뒷받침한 김유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김춘추는 자신의 셋째 딸을 61세의 김유신에게 시집 보내 두 사람의 혈맹관계를 더욱 다졌다.
 
신라 내부에서 정권을 장악한 김유신과 김춘추는 660년 당나라와 힘을 합쳐 백제 정벌에 나섰다. 나당 군사동맹을 성사시킨 것은 김춘추였고, 김유신은 대장군으로 군사를 이끌었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계백을 무너뜨린 김유신은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공격하기 위해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합류했다. 황산벌 전투가 워낙 치열해 예정보다 하루 이틀 도착이 늦었다. 소정방은 이를 핑계로 신라의 장군 김문영을 목 베려 했다. 신라군과의 첫 만남에서 자신의 위엄을 세우려는 술수였다.
 
그러자 김유신이 도끼를 잡고 “먼저 당나라 군사들과 싸우고 나서 백제를 쳐부수겠다.”며 성난 머리털을 꼿꼿이 세웠다. 소정방은 자신의 주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사비성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김유신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이바지한 공을 인정받아 대각간이 되었다. 신라의 최고 관등인 각간에 ‘대’자를 더한 자리였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죽고 그 아들이 왕위에 올라 문무왕이 되었다. 문무왕은 김유신에게 “과인에게 경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음과 같소.”라며 선왕과 다름없는 믿음을 보였고, 김유신 또한 죽을 때까지 문무왕에게 충성을 다했다.
 
백제부흥군을 평정한 신라는 668년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했다. 74세의 나이로 병을 앓고 있었던 김유신을 배려한 왕은 전장에 참가하는 대신 국정을 살피게 했다. 그 해 9월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 멸망 후 태대각간의 자리에 올랐던 김유신은 673년 7월 1일 79세의 나이로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통일의 영웅인가 음험한 정치가인가

 

이후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이라 봉하고, 그 후손을 왕손으로 예우했다. 또한 [삼국사기]는 10권의 열전 가운데 3권을 내주며 삼국통일을 이룩한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삼국유사]는 김유신이 당대에 ‘성신’으로 추앙받았다고 적고 있다. 고려, 조선시대까지 김유신은 통일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에 나라의 운명이 흔들리던 한말, 신채호는 “김유신은 지용이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하기가 사나운 독수리 같았던 정치가이며, 그 평생의 큰 공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자”라고 비난했다. 당이라는 외세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이유 때문에, 그 책임을 김유신에게 물었다. 당시 시대정신을 반영한 신채호에 의해 김유신은 통일의 영웅에서 음험한 정치가로 평가절하되었다.

 

<김유신장군의 무덤>

<심국사기 옥산서원본 전 50권 가운데 권41의 제1장 김유진  열전 쳇페이지>

 

 윤희진/역사저술가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한국사 인물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