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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고려의 문신·학자.해동공자 최충(崔沖)

지송나무 2015. 6. 13. 09:14

해동공자 최충(崔沖)

 

984(성종 3)~ 1068(문종 22).

고려의 문신·학자.

 

9재학당(九齋學堂)을 세워 유학을 보급하고 인재를 양성함으로써 문교(文敎)의 진흥과 사학(私學) 발전에 크게 공헌하여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칭송되었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호연(浩然), 호는 성재(惺齋)·월포(月圃)·방회재(放晦齋).

아버지는 주(州) 향리인 온(溫)이다. 1005년(목종 8)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1011년(현종 2) 우습유(右拾遺)가 되었다.

1013년 국사수찬관(國史修撰官)이 되어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칠대실록 七代實錄〉을 편찬하는 데 참여했다.

그뒤 우보궐(右輔闕)·한림학사(翰林學士)·예부시랑(禮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1033년(덕종 2)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가 되어 〈설원 說苑〉의 육정육사(六正六邪)와 한(漢)나라의 자사육조(刺史六條)를

각 관청에 써 붙이게 했다. 이어 형부상서 중추사(刑部尙書中樞使)를 지내고,

1037년(정종 3) 참지정사 수국사(參知政事修國史)가 되어 〈현종실록〉을 편찬했다.

 1041년 왕명을 받아 판서북로병마사(判西北路兵馬使)로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 등 14곳에 성채를 쌓고 돌아왔다.

1047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율령(律令)과 서산(書算)을 고정(考定)했다.

1050년 개부의동삼사 수태부(開府儀同三司守太傅)가 되고 추충찬도공신(推忠贊道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해 서북면도병마사(西北面都兵馬使)가 되어 농번기의 공역(工役) 및 국가재정의 낭비를 금하도록 상소하여 시행하게 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하여 국방경계를 강화하도록 했다.

1053년 추충찬도협모동덕치리공신(推忠贊道恊謀同德治理功臣)의 호와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문하시중 상주국(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門下侍中上柱國) 훈위를 받았다.

1055년 내사령(內史令)으로 치사(致仕)했다.

당시 고려사회는 현종대를 거치면서 거란의 침입과 숭불정책으로 유학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고

 관학인 국자감의 교육은 부진한 상태였다. 이에 최충은 관직에서 물러난 후 유학의 보급과 유교적 지식에

밝은 관리의 양성을 목적으로 사숙(私塾)을 개설했다. 교사(校舍)를 송악산(松岳山) 아래 자하동(紫霞洞)에 마련하고

 악성(樂聖)·대중(大中)·성명(誠明)·경업(敬業)·조도(造道)·솔성(率性)·진덕(進德)·대화(大和)·대빙(待聘)의 9재(九齋)로 나누어

9경(九經:〈周易〉·〈尙書〉·〈毛詩〉·〈儀禮〉·〈周禮〉·〈禮記〉·〈春秋左氏傳〉·〈春秋公羊傳〉·〈春秋穀梁傳〉)과

3사(三史:〈史記〉·〈漢書〉·〈後漢書〉)를 중심으로 하고 시부(詩賦)와 사장(詞章)도 가르쳤다.

매년 여름철에는 귀법사(歸法寺)의 승방 등을 빌려, 학생 가운데 과거에 급제했으면서도

 아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교도(敎導)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때때로 관료나 학자가 찾아오면 학생들과 더불어 각촉부시(刻燭賦詩)라 하여 초에 금을 긋고 시를 지어

 그 성적을 발표하고 소작(小酌)을 베풀었는데, 진퇴(進退)의 절도와 장유(長幼)의 질서가 분명하여

종일토록 수창(酬唱)하는 모습이 많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최충의 명망과 법도를 갖춘 교육 때문에 과거급제를 목표로 하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9재학당은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곳의 학생은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라고 불렸다. 뒤에는 시호를 따서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불렸다.

다른 저명한 유학자들도 문헌공도를 모방하여 11개의 사학을 개설, 문헌공도를 포함하여

사학십이도(私學十二徒)를 이루었다. 정종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뒤에 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