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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외국의 인물

한국 전쟁의 영웅이자 은인 맥아더 장군

지송나무 2015. 6. 13. 10:04

한국 전쟁의 영웅이자 은인 맥아더 장군 

 

 

 

  

 

군인의 전형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영원히 사라진 맥아더 장군은 1881년 1월 26일 장군인 아버지 아더 맥아더의 세째아들로 태어났다.

맥아더의 어머니는 매우 엄격했고 항상 책임감을 강조했으며 완벽한 일처리를 몸에 익히게 했다.

 

1899년 6월 미육사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는데 그는 어린시절부터 군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여 동경의 대상이 되어온 웨스트포인트 입학을 위해 5세때부터 준비해 왔다고 한다.

생도시절 그는 매우 열성적이었고 학업과 군사학에 뛰어났다. 그는 동기생으로부터 "이상한 마력을 가졌으며 그가 명령하면 그의 명령에 순순히 따르게 된다"라는 평을 받았다.

4학년 생도때는 생도대를 지휘하는 여단장 생도가 된다. 졸업시 학과성적은 4년 평균 98.14%를 획득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는데 1884년에 획득한 모 생도의 99.78%, 1829년 리 장군이 획득한 99.14%에 이어 세번째의 기록을 세웠다.

 

그는 공병을 택하여 1903년 9월 샌프란시스코의 제3공병대대에 첫 부임을 한 후 그의 화려한 군생활은 시작되었다.

대위시절 그는 자신의 상급자들과 다른 의견을 거침없이 주장하여 참모총장의 관심을 끌었으나 다른 상급자로부터 질투와 시기를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종료시 프랑스 전역에서 미 원정군으로 혁혁한 공을 세운 맥아더는 준장으로 진급, 장군의 대열에 들어섰다.

1919년 6월 12일, 39세의 나이로 최연소 미육사의 교장이 된다. 교장이 된 후 내무반에서 담배 피우는 행위 허용 등 자율적인 장교육성에 노력했다. 맥아더가 가진 여러가지 아이디어는 당시 군내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보적인 것이었다.

1930년 참모총장에 임명되어 5년간 근무한다. 1935년 참모총장 퇴임 후 필리핀에 가서 신생국의 군대창설을 도왔다. 여기서 그는 필리핀 대통령 퀘존에게서 유명한 맥아더의 우글쭈글한 모자와 옥수수 담배파이프를 선물로 받는다.

1937년 12월 31일 소장의 계급으로 예비역에 편입되었다가 1941년 중장으로 진급하여 현역으로 복위하였으며,

 

태평양 전쟁시 1944년 3월 17일 일본군의 공격으로 필리핀의 바탄반도에서 호주로 철수하였으며 그 후 7개월에 걸친 필리핀 탈환작전을 성공하였다.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후 미항모 미주리함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았으며, 그후 6년동안 일본의 군정을 책임졌다.

 

1950년 한국전쟁시 미 군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전세역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였으며, 이 작전은 "현대의 칸네전투"라 불리고 있다. 맥아더는 한국전쟁의 확전을 우려한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었으며, 당시 미 상하양원 합동회의 연설시 "나는 52년의 군대생활을 마치려 한다.... 군가 가사의 한 귀절인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져 갈 뿐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64년 4월5일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