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목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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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소련의 생존과 자존심을 우주전쟁은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대통령 때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폴로 프로그램(Apollo project)은 NASA가 추진한 휴먼 우주비행 계획 중 세 번째 프로젝트였고 첫 번째는 이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대통령시절 수행되어 미국 최초로 사람을 우주로 보내는 것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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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프로그램(Apollo Project)은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행정부 때 한 사람을 저궤도에 올려 보내는 ‘머큐리 프로그램(Project Mercury)’의 후속으로 1960년 처음 구상되었지만, 3명을 우주로 보내고 달에 착륙시켜 다시 돌아오는 거대한 프로젝트에 지원되는 자금을 감당할 길이 없어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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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가 미국의 대통령에 취임했고, 1961년 그가 취임한지 3개월 만에 소련에 ‘유리 가가린(Yurii Gagarin)’이 인류최초로 지구궤도를 돈 우주비행사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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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1957년 인류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Sputnik)’가 미국 본토에 소련의 핵탄두를 쏘아 보낼 수 있음을 증명한 이후 또 다시 소련이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을 앞섰음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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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시초프(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공산당서기장은 가가린(Yurii Gagarin)을 “새로운 크리스토퍼 콜룸부스(Christopher Columbus)”라고 부르면서 이것을 계기로 소련 인민의 우수성과 공산주의 강력함이 이제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전 세계에 각인시키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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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는 식의 이런 거만한 태도는 미국의 젊은 대통령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가가린의 지구궤도 유인비행 성공 8일 만에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우주개발위원장인 존슨(Lyndon B. Johnson)부통령을 백악관으로 불러들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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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주에 실험실을 설치하는 것, 달을 여행하는 것, 달에 착륙하는 것, 사람들 달에 보내는 것 등을 통해 소련을 이길 기회가 남아있는가? 극적인 승리를 보장해 줄 우주개발 프로그램은 없는가? 추가로 얼마만큼의 비용이 소요되는가? 기존의 프로그램들에 전력투구하고 있는가? 기대한 성과는 거두고 있는가? 등에 대해 최대한 빨리 답변을 해달라”고 적혀있는 메모를 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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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는 했지만 인명을 우주에다 내버려두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시도인데다가 성공여부의 불확실성 때문에 아무도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1969년 아폴로 프로그램이 성공하기까지 10여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국은 240억 달러라는 막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고 40만 명에 이르는 각계 전문가들과 2만 여 개의 민간 기업과 대학들이 매달려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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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월 27일에는 아폴로 1호(Apollo-1) 테스트를 하던 중 조종공간인 캐빈에 화재가 발생해 탑승자 버질 그리섬(Virgil Grissom), 에드 화이트(Edward White), 로저 채피(Roger Chaffee) 3명 전원이 사망하는 안타까운 헌신이 있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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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의 결정에 대해 “이는 통신, 기상학, 군사정찰, 미래의 군사적, 과학적 이득과 연관되어 잘 진행되고 있는 여러 국가적 프로젝트들 중에서 하나를 쏙 빼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도입니다. 게다가 달에 최고의 우선권을 부여하는 일은 분명 바보같은 짓입니다.” 라는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전 대통령의 비판은 상당히 뼈아픈 지적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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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일자리 창출, 과학적 발견, 새로운 방어체계 같은 많은 이유들을 열거했지만 솔직히 누가 보아도 정말 불확실한 일에 대해 ‘영감’만으로 추진하는 것 같아 보였고, 아무도 실현되리라 생각하지 못하는 프로젝트를 들고 다니며 미국 국민들을 설득하고 미의회에 가서 달 프로젝트에 대한 협조를 구하는 연설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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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인들은 리더가 하나의 목표에 모든 열정을 쏟을 때 그리고 구성원 전체가 그 열정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진짜라는 걸 알게 될 때 일어 날 수 있는 놀라운 결과를 경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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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소련의 미사일 방어시스템과 우주개발에 대항하기 위해 약 30%의 자금이 더 지원되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가 공언한 10년의 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1969년 7월20일, 아폴로 11호는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버즈 올드린(Buzz Aldrin),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를 태우고 마침내 인류의 염원인 달 착륙에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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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결단은 구소련이 더 이상 우주개발계획은 물론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미국의 적수가 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국민의 취업률을 올려서 경제를 살렸고, 국민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주면서 하나로 단합시키는 결실을 얻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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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이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하늘에 띄운 이후로 66년 이란 짧은 시간 만에 달 표면에 발자국을 남긴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이 밑받침 되었지만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의 결단과 흔들림 없는 목표의식이 없었다면 분명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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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하게 결단하고 그 결단에 흔들리지 않는 진짜 열정을 가진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그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역사상 가장 큰 꿈과 희망을 준 결단의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