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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외국의 인물

한국과 트루만 대통령

지송나무 2015. 6. 13. 10:06

한국과 트루만 대통령

 

 

半世紀가 넘어도 分斷의 傷處는 아물지 못하고, 無心한 歲月만 흘러 갑니다..
살아서 제발 統一의 平和로운 祖國을 볼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잊지맙시다
6.25의 뼈저린 記憶을!! 避難가던 記憶이 지금도 生生한 6.25 絶對로 잊을수
없죠.. 어릴때 當한 苦生은... 想起하고 想起합시다..^*^^**錫雲


2013년은 6.25 南侵 63주년이다. 6.25가 일어난 가장 큰 원인은 駐韓美軍이 철수하고- 韓美동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美國은 연150만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보내 우리를 구해주었던가? 美 군부는 <한국은 지킬 수도 없고,

지킬 필요도 없는 곳>으로 판단하고 주한미군을 1년전에 철수시켰었다.
그런데 왜 軍隊를 다시 보내 5만4000명을 죽게 하는 血戰을 벌인 끝에 '알지도 못하는 ! 조그만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국민들' 을

공산침략으로부터 구출했던가?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했는가? 우리 역사상 한민족 전체의 운명이 단 한 사람의 외국인에 의해 결정된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그는 누구인가? 맥아더 장군이라고? 아니다, 맥아더를 한국 戰線으로 보낸,

즉 美軍의 참전을 결단했던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다. 6월24일 미조리 인디펜던스


1950년 6월24일 트루먼 대통령(당시 66세)은
週末을 고향에서 보내고 .있을때...
딘 애치슨국무장관이 걸어온 전화였다.
“각하, 매우 심각한 소식입니다.
북한군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무초대사의 보고에 따르면 그 전에 있었던
총격전과는 다른 본격적인 공격입니다.
UN사무총장에게 안보리 소집을 요청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일설에 의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합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결정을 하는 데 10초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트루먼은 전화를 받고 돌아오면서 매우 격앙되고
걱정스런 표정이었다고 한다.

 


3차大戰의 서막이 오른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하는것 같았다고 한다
정오 직전-무초 대사가 보낸 電報가 그에게 건네졌다.
<공격의 양상으로 보아 한국에 대한 전면적인
공세임이 분명해졌다>
그는 ...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트루먼은 말했다.
“하느님께 맹세코 그 자들이 代價를 치르도록 해주겠어”
러스크 국무차관은 “5년간 한국에 주둔했던 미국으로서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한반도가 공산화된다면 이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匕首(비수)가 될 것이다”고 했다.


셔먼 해군참모총장과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해공군만으로도
남침을 저지할수있다면서 육군의 투입을 반대했다
트루먼은 -도쿄의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원수는 최대한 빨리
한국측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할 것,
미 공군력의 엄호 아래 駐韓美國人을 철수시킬 것.
제7함대는 필리핀으로부터
대만 해협으로 전개하여 중국의 공격에 대비할 것 등..
이날 회의는 미군을 사용한 한국 방어를 결의하고
밤 11시에 끝났다


참석자들은 기자들을 피해 뒷문으로 빠져 나갔고,
대통령은 함구령을 내렸다
“육군도 보내라” 다음날(서울 6월26일, 워싱턴 6월25일) 트루먼 대통령은.
두 번째 긴급 각료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한국전 개입 결정이 공식화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을 돕기 위해 海, 空軍力을 사용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다음날은 .-6월27일- 북한군 탱크가 서울에 진입했다는
뉴스가 일제히 나갔다
오전 11시30분 의회 지도자들, 국무장관, 국방장관,
합참의장 등 40명의 요인들이
백악관 西館 각료실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은 - 대통령의 고유권한으로-
전쟁을 지도하라는 충고를 받았다.
의회가 --별도로-- 전쟁 결의안을 낼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上下院 합동회의도 이날 315 대 4의 압도적 표차로 징병기간을
1년 연장하는 결의를 했다.!


UN 안보리는. 1950년 6월30일 새벽 3시 美 국방부는
한국전선을 시찰한 맥아더의 電文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해공군뿐 아니라- 육군이 투입되야
북한군을 저지할 수 있다고 보고했다.
타이밍이 핵심이다 지체 없는 명확한 결정을 바란다.
"프랑크 페이스 육군장관이 백악관으로 전화 건 시각은
새벽 4시47분...
페이스 장관은 맥아더가 우선 2개 사단의 투입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트루먼 그는 한국으로 지상군을 파병하는 결정이
가장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일본에 원자탄 투하하는 결정보다도 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는 이날 일기에서 -모택동은 무슨 짓을 할까,
러시아의 다음 행동은 무엇일까”라고 썼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나중에 이렇게 평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결정하는 것이다-
트루먼 대통령은 결정했다>
이렇게 하여 “알지도 못하는 나라의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하여”
미국의 젊은이들이 한국으로 파병된다


3년간 戰場에서 -5만명이 죽고 -10만명 이상이 다쳤다
우리 역사상 한국인의 운명이 외국인 단 한 사람에 의해서 결정된 것은 이 경우가 처음이었다
당시 美軍部는, -한국은- 미국이 싸워서까지 보호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려 놓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트루먼의 파병 결정은 극히 예외적인 조치였다


그는 陸士에 들어가고 싶어 했었다.
1차 대전이 터지자 -나쁜 視力을 속이고
자원입대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포병장교로 용감히 싸웠다.
그런 트루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6.25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른다는
19세 이상 成人 인구가 15%, 약500만명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트루먼을 기억하게 하는-
공원 이름이나 거리 이름이 없다
트루먼 동상은 -판문점 근방- 잘 안 보이는 곳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서울 번화가나 -대형공원에 동상을 건립하고- 트루먼 거리 하나쯤 명명하여
그분의 고귀하고 -숭고한 정신에 늦고 작으! 나마
- 오래오래 기렸으면 합니다
본 내용에 대하여 -많은 분들께 알리는것도-
애국의 길이요 보은의 일이 될것입니다.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