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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마음의 양식/시사

최만리 등의 상소문

지송나무 2015. 6. 26. 16:30

출처 : http://blog.daum.net/barkyh/33

편집 : http://cafe.daum.net/1st-Birthday/QFbY/25

 

최만리 등의 상소문

 

앞 장에서 <훈민정음 서문>을 살펴보았는데,

정말로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진 것인가에 대해

이 상소문을 통해 다시 알아보자.

 

더불어, 이 상소문의 반박문이라 할 수 있는

<정인지의 후서後序>도 함께 살펴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훈민정음의 정체나 목적은 훈민정음의 서문에 나와 있고,

서문만으로도 그 정체나 목적을 알 수 있는 것이 당연하겠으나,

현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어버렸다.

 

이른바 강단학계 즉, 주류학계의 나태함과 뻔뻔함,

교만함과 거짓말이 그렇게 만들어버렸다.

 

 

 

그래서, 필자가 이렇게 붓을 들어 이 상소문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소문의 해석을 보고서도 그들은 끝까지 거짓말을 계속할 것이다.

 

 

 

<동국정운서문>이나 <홍무정운역훈서문>, <훈몽자회범례> 등이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있지만,

한번 눈이 가린 저들은 쉽게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이 상소문을 살펴봄으로서 훈민정음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왜곡된 동국東國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상소문은 실록에 기록된 것이지만,

해석함에 있어 실록 보다는 한글과 관련된 다른 기록이나 서적들을,

주主로 참조하여 해석을 시도한다.

 

왜냐하면, 실록은 필자의 주장과 반대되는 내용들이 많기 때문이다.

필자의 해석이 틀렸다면,

이 상소문과 실록의 다른 부분들은 서로 반대되는 내용이 아니다.

 

 

그러나, 이 상소문을 필자가 올바로 해석하였다면,

학자들이 해석한 실록의 내용 중에서

이 상소문과 상반相反되는 부분들은,

그 해석이 틀렸거나 변조된 것이다.

 

 

실록은 그 권수卷數가 분명하여 마음을 먹으면 변조가 가능하지만,

다른 서적들은 그 권수나 존재여부를 알 수가 없어 변조를 시도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동국정운서문이나 홍무정운역훈서문, 훈몽자회범례 등을 주로 참조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상반되는 실록의 부분은 참조하지 않았다.

물론, 상반되지 않는 부분들은 당연히 참조하였다.

 

사실, 실록을 검증檢證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일부에서 강력히 주장하고 있지만,

강단학계에서는 침묵으로 덮으려하고 있는 일이 있는데,

바로 조선왕조실록이 변조되었다는 사실事實이다.

<이 내용은 자료와 근거를 제시할 부분으로 생각됩니다>

실록에서 상반되는 내용들이 있다면,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이는 분명히 어느 한쪽이 변조된 것이다.

 

이른바 민족주의자들, 민족주의자들이

실록을 어찌해볼 위치에 있어본 적이 없었고

어찌해볼 능력도 없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는 부분들은 변조되지 않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실록을 변조할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있었던 이들 즉,

일제日帝나 그 하수인이 실록을 변조하였다면

우리에게 유리하게 변조할 가능성은 없기 때문에,

이 상소문의 내용은 변조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상소문과 상반되는 실록의 부분들은,

해석이 잘못되었거나 일제에 의해 변조된 것이다.

 

 

이 상소는 1444년 2월 20일(음력)에 있었던 일이고

훈민정음이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 것이 1446년 9월이라,

시기적으로는 이 상소문이 서문 보다 더 앞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애초의 ‘세종의 뜻’이 반영된 것이 서문이고

그 ‘세종의 뜻’에 반대하는 것이 이 상소이니,

서문이 이 상소문 보다 앞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상소는 서문에 대해 반대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서문이 실린 예의편은 반포시에 써진 것이 아니라

1443년 12월에 써진 것으로 보는 데에 이견이 없다.

그래서, 필자가 서문을 먼저 해석하고 이 상소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 상소문을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알아두면 좋은 것이 있는데,

세종과 최만리 등을 비롯하여 당시의 사람들 모두에게 있어

보편적 가치라 할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상소문 전체에 전제前提되어 있는 옛것과 사대모화이다.

옛것은 단순히 오래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 즉, 모범이나 기준을 의미한다.

사대모화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되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나 조직, 개인에게 있어 추구되는 보편적 가치이다.

 

 

이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임금인 세종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지금의 ‘민주주의’가 공산권 국가나 독재국가,

심지어 군주제 국가에서도 보편적 가치로 여겨지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따라서, 그 누구도 옛것이나 사대모화 그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떤 행위에 있어 그 행위가 옛것이나 사대모화에 들어맞는 것이냐 어긋나는 것이냐의 다툼이 있을 뿐이다.

 

 

 

이 상소문을 보면서,

독자들은 학자라는 이들이 얼마나 나태懶怠하고 거짓말을 잘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밥벌레라는 욕을 얻어먹어도 싸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이렇게,

필자와 같은 범부凡夫도 쉽게 알 수 있는 것을 왜 몰랐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혹자는, 필자를 대단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한문에 대해 잘 알아서 이렇게 이 상소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학창시절에 한문과목은, 한문과목도 낙제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붓을 들 수 있는 것은,

필자에게 밥벌레라는 욕을 먹고 있는 이들이 다 이루어 놓은 것에

숟가락만 담그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필자 마음대로 자의적으로 막 갖다붙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기본에 충실하여,

기존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뿐이다.

 

필자가 많이 배웠다면,

자신의 지식이나 능력을 믿고 오히려 자의적이고 엉뚱한 해석을 하였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학자라는 이들은 ‘訓’을 단순히 ‘(새로운 것을) 가르치다’라고 해석하고 있지만,

필자는 당시에 그렇게 쓰였고 현재에도 그렇게 쓰이고 있는

‘訓’의 올바른 뜻인 ‘바로잡다’로 해석하였다.

 

 

순우리말인 ‘가르치다’는 ‘새로운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잘못을 고치어 바로잡는 것’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은,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조그마한 국어사전만 뒤져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 순우리말을 한자로 옮겨서,

 

 

새로운 것을 알게 해주는 것이 교敎이고

잘못을 고치어 바로잡는 것이 훈訓이다.

 

 

즉, 새(新) 것을 알려주는 행위는 교敎이고

바른(正) 것을 알려주는 행위는 훈訓인 것이다.

 

 

이처럼 기본에 충실하고 오류만 바로잡는 것뿐이다.

또, 학자라는 이들은 기존의 역사지식에 맞추어 원문原文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였는데,

필자는 해석을 먼저하고 그 해석에 맞게 역사적 사실을 추론하고 있을 뿐이다.

 

강단이나 재야나 둘 다, 헤매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며 둘은 알아도 셋은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강단은 동국과 중국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으며,

재야의 일부(대륙조선론)는 동국과 중국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강단이나 재야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동국과 중국이 하나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 글로 인해 진실이 조금이나마 자리 잡길 바랄 뿐이다.

 

 

이 글이 역사학계나 국어학계에 일대 파란을 몰고 올 수도 있지만,

그저 그런 일개의 설에 불과한 평가를 받고 조용히 묻힐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실이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아니, 진실이 이기는 경우가 더 적은 것이 세사世事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진실을 알아버린 촌놈이,

촌놈이지만 거짓이 판을 치는 것을 그냥 묵과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양심에 찔린다.

 

 

===>출처 :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庚子/集賢殿副提學崔萬理等上疏曰: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 然以臣等區區管見, 尙有可疑者, 敢布危懇, 謹疏于後, 伏惟聖裁.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최만리(崔萬理) 등이 상소하기를,

“신 등이 엎디어 보옵건대, 언문(諺文)을 제작하신 것이 지극히 신묘하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혜를 운전하심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오히려 의심되는 것이 있사와 감히 간곡한 정성을 펴서 삼가 뒤에 열거하오니 엎디어 성재(聖栽)하시옵기를 바랍니다.

<===

 

학계는 상소문의 첫 구절부터 엉터리로 해석을 하고 있다.

그냥 모든 것을 설렁설렁하고 있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여기의 ‘언문제작諺文制作’을

 ‘한글(ㄱㄴㄷㄹ... ㅏㅑㅓㅕ...)을 만들다’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처럼 잘못된 해석이 따로 없다.

 

 

국어사전이나 실제 쓰임을 살펴보면,

제制는 ‘~의 틀을 만들다, ~로 틀을 만들다’이고

작作은 ‘만들어진 ~’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의미의 ‘만들다’는 製를 쓴다.

制는 주로 ‘공적公的인 만들기’를 의미하여 제도나 법률, 형식 등을 정定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언문제작은

‘언문의 틀을 만들다, 언문으로 틀을 만들다 + 만들어진 언문’이 되므로

결국, ‘언문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된다.

 

 

정리하면, 언문제작諺文制作은

‘언문을 만들다’가 아니라 ‘언문을 이용한 운서나 언해서적’을 가리킨다.

 

운서나 언해서적은 공적인 만들기 즉, 언문을 제도화한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언문을 만들다’로 해석하려면 制가 아니라 製가 쓰였어야 한다.

 

‘창물운지’의

창물創物은 현대의 용어로 발명發明에 해당되고

운지運智는 발견發見과 같은 개념의 단어라 할 수 있다.

 

창물운지가 천고에 뛰어나다는 것은,

언문을 이용하여 한문서적을 언해하려는 것과 운서의 발음표기를 언문으로 하려는 것이,

당시까지 세종 말고는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최만리 등이 보기에,

언문을 문자의 발음표기나 한문서적의 역譯에 이용하려는 것이

정말로 기발한 재치(아이디어)이나,

그 결과인 언해서적과 언문운서에 문제가 있어 보여서

이렇게 상소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상소를 올리게 된 사정이 어떠한지, 상소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자.

훈민정음과 관련된 기록이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은,

실록의 1443년 12월 30일 두 번째 기사이자 마지막 기사로서,

이 기사의 뒤는 여백으로 남아 있다.

 

혹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나중에 추가된 기사가 아닐까라고 추정하는데,

필자는 ‘기자방고전, 훈민정음’이라는 말 때문에 나중에 추가된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于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여기에서도, 製가 아니라 制가 쓰였다.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制諺文二十八字’는 언문28자(ㄱㄴㄷㄹ...)를

세종이 창제創製했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아닌 세종이 직접 제안하여

언문28자를 제도화制度化(공적公的으로 사용使用)하였다는 뜻이다.

 

 

즉, 세종의 아이디어로 언문을 운서나 언해에 이용하였다는 뜻이다.

 

운서나 언해는 국가의 정책이고 국가적 사업이다.

그렇기 때문에, ‘制’라는 글자를 쓰고 있는 것이다.

 

‘범우문자급본국리어凡于文字及本國俚語, 개가득이서皆可得而書’는

언문의 쓰임새 즉, 언문을 운서나 언해에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于文字及本國俚語’는

‘문자에서 본국의 리어까지’라는 뜻으로서

그 쓰임새의 주主는 운서(한자의 발음표기)이고

언해(한문서적의 한국어 번역)는 부副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是謂 訓民正音’이라 하여

한자의 발음표기가 훈민정음의 목적임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기존의 지식인 세종이 28자를 창제했고 한국어표기가 주목적이며

운서 등에 이용된 것은 부수적인 것이었다라고 한다면, 위 기사와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于文字及本國俚語라는 말 때문이다.

 

及은 ‘미치다, 닿다, 이르다, 함께, 더불어, 및, 와 등’의 뜻을 가지고 있어

결국, ‘于~ 及~’은 ‘~에서 ~까지’라고 해석된다.

 

‘문자에서 본국리어까지’는 언문의 쓰임새를 그냥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문자와 리어가 서로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문자가 주목적이고

리어가 부목적 또는 부수적인 효과라는 의미이다.

 

이 구절(于~及~)은 병렬식으로 나열된 것이 아니며 분명히,

언문을 문자文字에 쓰는 것이 주主이며 리어俚語에 쓰는 것은 부副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부분만으로도, 기존의 지식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문자(한문, 한자)를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이라,

남의 것을 빌렸다고 여기는 태도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기존 학계의 주장은

훈민정음의 목적이 ‘한국어 표기’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于文字及本國俚語는

훈민정음의 목적이 ‘문자의 발음표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 장에서 살펴보아 알고 있듯이, 훈민정음은 문자의 발음표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나, 한자발음표기를 위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것은 너무 과하게 공들인 것이며,

지금처럼 한국어표기에 널리 이용되기에는 인과관계가 부족하다.

 

 

따라서, 한글이 한자발음표기나 한국어표기를 위해서 ‘창제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즉, 한글은 창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었다는 말이 되고

그 당시의 명칭이 바로 ‘언문’이라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본국인 동국에서 이미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언문을

공식적으로 천하에서 사용하겠다는 것이 훈민정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품어야 한다.

왜 리어俚語라는 표현 대신 본국리어本國俚語라는 표현을 사용했는가?

 

그에 대해 궁구窮究해야 함에도,

학자라는 이들은 아주 가볍게 넘어간다.

 

리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동국어(한국어)를 가리킨다.

그런데, 리어라는 표현도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국어國語, 국지어음國之語音 등의 표현을 다 놔두고 왜 리어라는 표현을 사용했을까?

왜 한국어를 리어라 하였을까?

 

설사, 리어라는 단어를 사용함이 이상하지 않다 하더라도,

왜 굳이 본국리어라 하였을까?

 

여기의 본국은 동국 즉, 지금의 한국을 가리키는데,

동국東國이나 조선朝鮮, 아국我國 등의 표현을 쓰지 않고 왜 본국이라 하였는가?

강단이나 재야를 막론하고

학자라는 이들이 이런 기초적인 의문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 화나게 한다.

 

 

 

 

다시 한 번 더 언급하지만,

본국本國은 지류支流 즉, 지나支那를 거느리고 있기 때문에 쓸 수 있는 표현이다.

 

지류支流 즉, 종속국從屬國을 거느린 종주국宗主國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본인本人, 본좌本座, 본토本土 등도 다 같은 형태의 단어이다).

 

 

본국本國은

자기 자신의 나라를 스스로 지칭하거나 어떤 대상의 고국故國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근현대에 들어와서 그 뜻이 왜곡되어 사용된 것뿐이다.

실록은 천하天下를 경영經營하는 과정이나 결과를 조정朝廷의 입장에서 기록한 기록물이다.

 

그리고, 훈민정음은

조정에서 중국으로 즉, 천하에 내려 보낸 것이다.

따라서, 조정의 입장에서 훈민정음의 쓰임새가

동국 즉, 본국의 말을 표기하는 데까지 사용되니 본국이라 한 것이며,

훈민정음이 내려진 중국의 방언方言과 구별하기 위해서 리어라 한 것이다.

 

 

본국리어는 동국東國이 본국이라는 뜻이며

본국의 언어를 가리켜 리어俚語라 부른다는 말이다.

 

12월 중에 세종이 언문을 제도화 하겠다고 발표를 하고 신하들과 논쟁을 했다면,

1443년 12월이나 1444년 1월에 그 내용이 실렸을 것인데,

조용히 있다가 두 달이 지나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아무래도,

이전부터 쌓여왔던 것이 있었는지 몰라도

2월 16일에 있었던 운회를 언문으로 번역하게 한 일이,

상소하게 된 계기로 추정된다.

(여기의 번역이라는 것은 한자의 발음을 언문으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 즉, 반절식 표기를 언문으로 대체하는 것을 의미하지, 한문을 우리말로 풀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12월의 친제언문은

세종이 번뜩이는 재치로, 언문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최만리를 비롯한 언문반대론자들은

세종이 언문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몰랐을 것이다.

 

 

또, 사관史官들도 언문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두 달 정도가 흐르면서 언문을 어떻게 이용하려는 것인지 알게 되고,

운회를 번역하게 하는 일이 발생함으로서,

논지를 모아 4일 뒤인 2월 20일에 상소를 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상소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상소 이전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어느 정도의 논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훈민정음의 서문이나 정인지 후서, 상소문, 운서들의 서문, 실록 등을 살펴보면,

세종이 언문과 관련한 무엇을 하는 데에 있어,

비밀리秘密裏에 하였거나 중국의 눈치를 보았다는 느낌은 조금도 받을 수가 없고 오히려,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하였으며,

최만리 등의 반대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반대하는 자는 생길 수 있어서,

그러한 반대는 ‘예측 범위’의 안에 있는 것인데,

세종에게 있어 최만리 등의 반대는 ‘예측 범위’를 벗어난 뜻밖의 일로 보인다.

 

이 상소문에 있어 첫 번째에 언급된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일 것인데,

그 첫째 항에 ‘字形雖倣古之篆文’이 나와 있다.

 

이는 세종이 먼저 언급한 것이 아니라,

최만리 등이 먼저 시비是非한 것에 대한 세종의 변명이라 할 수 있다.

 

 

즉, 세종이 스물여덟 자의 자형字形에 대하여 스스로 설명을 한 것이 아니라

최만리 등이, 언문제작이 옛것에 위배된다는 시비를 걸고 나서,

세종이 그에 대한 변명으로서 옛것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기자방고전이라 기록된 부분은 이 상소문이 있기 전,

며칠 이내에 있었던 옛것에 대한 논쟁이 없고서는 기록될 수가 없다.

 

 

 

 

‘기자방고전其字倣古篆,

자형수방고지전문字形雖倣古之篆文,

상형이자방고전象形而字倣古篆’은

모두 옛것에 대한 논쟁에서 나온 말이지,

언문이 어떤 문자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설명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제자원리製字原理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기준基準에 대한 얘기이다.

 

 

 

 

만약, 어떻게 만들어진 문자인가에 대한 설명이라면,

훈민정음의 예의나 해례 등에서

그 부분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언급이 되었을 텐데 전혀 없다.

 

결국, 12월의 기사는 이 상소문의 논쟁이 있고 난 뒤인,

세종의 사후에 실록편찬과정에서 추가된 부분이 되는 것이다.

 

 

또, 훈민정음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등장할 수는 없다.

12월 며칠이라 말하지 않고 12월이라 한 것도 이상하지만,

1446년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완성하고 반포하기 전에

훈민정음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맞지 않다.

 

이 상소문에서도 언문이라고 나와 있지

훈민정음의 훈자도 꺼내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이 반포 된 이후에도 계속 언문이라 언급하고 있다.

언문을 친히 만들었다(製)면서 언문을 가리켜 훈민정음이라 한다니,

스물여덟 자의 이름이 언문이라 하였으면서

다시 훈민정음이 이름이라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는 세종 당시에 작성된 사초史草에 기반基盤한 기록이 아니라,

세종 사후에 세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따로 추가 된 것이라 보는 것이 맞다.

 

또 이 기사는,

세종 이전에 언문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언문을 제도화하여 훈민정음이라 이름 붙였다는 것이,

이 기사의 내용이다.

 

 

언문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면,

‘언문28자’를 ‘훈민정음’이라 부르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보이는 대로 읽고 그냥 쉽게 해석하면 된다.

 

그런데, 이것을 자신들의 엉터리 지식에 억지로 꿰맞추려하니,

진실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12월의 기사를 올바르게 해석해 보자.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를 모방하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제도화하였는데,

그 글자는 고전을 본받았고 나누어진 초·중·종성을 합한 연후에 이에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서 본국의 리어까지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다.

이 정책을 훈민정음이라 이른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친제언문親制諺文,

언문제작諺文制作,

아전하창제정음我殿下創制正音 등’을

‘한글을 만들다’라고 해석하여

세종이 28자를 직접 창제하였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크나큰 잘못이다.

 

친제언문은 ‘언문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하겠다는 정책이 임금의 머리에서 직접 나왔다’이고

언문제작은 ‘공적으로 만들어진 언문서적’이라는 뜻이며

아전하창제정음은 ‘정음을 한자의 발음표기에 사용하겠다는 정책을 세종이 독창적으로 시행했다’는 뜻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創製하였다는 말은 맞지만

언문 28자를 창제創製하였다는 말은 틀렸다.

 

 

강단학계에서는 언문이 훈민정음의 별칭 중에 하나였다라고 말하고,

재야학계에서는 가림토가 훈민정음의 기원이라 말하지만, 둘 다 틀렸다.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있었다.

곧, 언문을 한자의 발음표기에 이용한 것이 훈민정음이라는 말이다.

 

물론, 언문의 기원이 가림토인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 상소문을 비롯하여 여러 운서, 훈몽자회, 실록 등을 살펴보면,

훈민정음을 얕잡아 보아 언문이라 호칭한 것이 아니라,

스물여덟 자의 원래 이름이 언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언문을 문자 보다 낮추어 본 것은 맞으나,

이는 언문의 쓰임이 문자 보다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언문이라는 이름 자체에 ‘깔보다’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다.

 

 

언諺이란 바로 리어俚語를 가리킨다.

동국이 아닌 곳 즉, 천하天下의 선비는 사士이고,

언彦은 동국 즉, 본국의 선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동국의 선비들이 쓰는 언어인 동국어 즉, 한국어가 바로 언諺이고

그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하여 쓰이는 문자가 바로 언문諺文이다.

 

 

 

언문이 훈민정음을 낮게 보는 훈민정음의 별칭이고

훈민정음 이전에 언문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발견된 한글과 관련된 기록 중에서 첫 기록인 실록의 기사에서,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라고 했는데 이를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없다.

 

28자를 지었으면 그냥 훈민정음이라 하면 될 것을 ‘언문 28자’라 이름할 이유가 없다.

 

이는, 동국어인 언諺을 표기하기 위한 문자인 언문諺文이

이미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諺, 언어諺語, 언언諺言, 언음諺音, 언문諺文, 언서諺書, 언자諺字, 언해諺解, 언간諺簡, 언찰諺札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언諺은 동국어를 가리키는 단어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넓게 많이 쓰인 표현이다.

 

 

===>

一,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1. 우리 조선은 조종 때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스럽게 대국(大國)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中華)의 제도를 준행(遵行)하였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

언문을 창작하신 것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왜곡이 심한 것들 중에,

이 부분이 그 중에 하나이다.

 

 

 

세종이나 최만리 등은 자기 자신의 일을 논쟁하고 있는데,

엉뚱하게 남의 나라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이와 같은 엉터리 해석이 더 있을 수 없다.

 

 

이 부분은, 최만리 등이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조선의 국시國是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국시를 언급하고 국시에 어긋나는 ‘창작언문’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국시라고 하는 것은 보편적 가치로서,

현재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를 국시로 삼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아조我朝는 ‘우리 조정朝廷(朝庭)’이라는 뜻이지 조선朝鮮이 아니다.

아조我朝, 본조本朝, 전조前朝 등은 모두 조정朝廷을 말하는 것이다.

 

아조가 ‘우리 조선’이면

본조는 ‘본래의 조선’이고,

전조는 ‘고조선古朝鮮’을 말하는 것인가?

 

 

 

 

지성사대는 ‘지극한 정성으로 큰 것을 섬기다’이고

일준화제는 ‘하나로 좇아 제도를 꽃피우다’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약자가 강자를 지성으로 떠받드는 경우가 없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소인배도,

기회가 생기면 자신이 모시던 강자를 밟고 올라서려 한다.

 

 

하물며, 조선의 선비가 강자에게 굴종하고 그것도 지성으로 섬긴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가?

 

 

한때 강자를 섬길 수는 있지만,

수백 년을 한결같이 섬기는 것뿐만 아니라 별다른 반대가 없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

 

또한,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라를 보존하기 위해 강자를 섬길 수는 있지만 지성至誠으로 섬길 수 있는가?

 

 

그렇게 강자를 섬기는데,

몽골에 항쟁한 것은 무엇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또 무엇인가?

흉노, 선비, 거란, 몽골, 여진, 일본 등의 이적夷狄은 중국을 탐내는데,

어찌하여 우리나라는 한번도 중국을 탐내지 않는가?

우리나라는 왜 중국만 떠받들고 다른 나라는 이적이라 하며 무시하는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지성사대가 대국인 중국을 섬기는 것이라 해석하고

일준화제가 중국의 제도를 따라하는 것이라 해석하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다.

 

지성至誠과 일준一遵은

처세處世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라

보편적 가치에 대한 추구追求에서 나오는 말이다

 

 

 

사대事大의 대大는 그냥 ‘큰(것)’이라는 뜻이다.

이소사대以小事大이건 이소역대以小逆大이건

원래는 그냥 ‘큰 것’을 의미한다.

 

어느 문장에서 사용되었느냐에 따라,

문맥을 살펴 ‘큰 나라(大國)’로도 해석되고 ‘큰 것’으로도 해석되는 것이다.

사대의 해석과 관련하여 예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맹자의 양혜왕 하편에 나오는

이대사소以大事小와 이소사대以小事大는

교린交隣 즉, 이웃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말한다.

 

 

소국小國인 이웃나라와 문제가 있을 때,

대국大國인 인자仁者는

힘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덕德으로써 소국을 포용함으로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그릇이 된다는 것이 이대사소이다.

 

 

대국인 이웃나라와 문제가 있을 때,

소국인 지자智者는

혈기를 내세우지 않고 대국의 비위를 맞춰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 이소사대이다.

 

 

이소역대以小易大

역시 맹자의 양혜왕 상편에 나오는 말인데,

역시 제선왕과 관련된 일화이다.

큰 동물인 소 대신에 작은 동물인 양으로 바꾼다는 뜻이다.

 

이는 측은지심에 대한 얘기인데, 뒤에 이야기가 더 이어지지만 생략한다.

 

 

예例에서 보듯이,

비슷한 구조의 말인데도

이쪽에서는 나라를 뜻하고, 저쪽에서는 동물을 뜻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소역대以小易大의 출처를 몰라 그 뜻을 모른다면,

이 역시 나라로 해석하여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바꾼다, 작은 나라를 큰 나라로 바꾼다’라고 해석할 것인가?

 

지성사대와 이소사대의 사대事大를 같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또, 위화도회군의 명분인 이소역대以小逆大는

이소역대以小易大와 비슷한 형태인데

역시,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다’로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없고,

회군의 명분에 저런 말도 안 되는 것을 갖다 붙일 수 없다.

 

이소역대는 ‘작은 것이 큰 것을 어긋나게 하다,

작은 일이 큰 일을 그르치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소역대이기 때문에 불가하다는 것은,

작은 것이 큰 것을 어긋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서,

작은 것인 요동의 땅을 직접 지배하는 일 때문에 동국과 중국이 서로 다투어,

큰 것인 천하를 경영하는 일에 차질을 빚어 천하 백성에게 해害를 끼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동국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맞지만

중국을 통해서 다스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대事大는

현대의 우리들도 추구하는 보편적 가치이다.

 

아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이상理想이다.

‘큰 인물이 되거라’,

‘통 크게 살아라’,

‘작은 일에 매이지 말고 크게 보아라’,

‘대범大汎하거라’,

‘대한국大韓國, 대한국인大韓國人’,

‘大+나라=>대한민국大韓民國, 대몽골제국大蒙古帝國,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대영제국大英帝國’, ‘대박’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구나 큰 것을 추구하고 있다.

 

 

설문에서 대大를 ‘惟東夷從大大人也(오직 동이東夷만이 큰 것을 따르니 대인이다)’라 하였고, 동양권에서는 대인大人, 대부大夫, 대장부大丈夫라는 말을 쓴다.

 

우리나라도 임금을 대왕大王, 태왕太王이라 하고

벼슬아치에게 대부大夫라는 이름을 붙인다.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지성사대의 사대가 이소사대의 사대와 전혀 다른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기의 사대를 어찌 ‘큰 나라를 섬기다’로 해석할 수 있는가?

 

 

사事는 ‘일, 섬기다, 부리다, 경영하다, 다스리다, 힘쓰다 등’이므로

사대는

‘큰 것을 섬기다, 큰 것을 부리다, 큰 것을 경영하다, 큰 것을 힘쓰다, 큰 것을 추구하다, 크게 만들다’로 해석해야 한다.

 

 

그래서, 지성至誠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처럼,

지성이라는 말은 아무데나 쉽게 쓰는 말이 아니다.

 

 

이소사대의 사대는,

자신의 힘이 현재 약하기 때문에 강해질 때까지 대국을 섬긴다는 것으로서,

지성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

지성사대는 ‘지성으로 ~을 크게 하다’이다

 

 

일준一遵은

‘하나로 좇아, 꾸준히, 한결같이’라는 뜻이고,

 

화제華制는

‘제도를 빛나게 하다, 제도를 꽃피우다’이다.

 

 

일준화제는

‘꾸준히 ~의 제도를 꽃피우다’이다.

 

사대모화事大慕華는

‘지성사대, 일준화제’의 준말인데,

모慕가 ‘그리다, 그리워하다, 생각하다, 바라다, 원하다, 탐하다 등’의 뜻이므로,

 

모화慕華는

‘꽃을 바라다, 꽃피는 것을 바라다’라는 뜻이 된다.

이를 ‘중국의 문화를 모방하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이는 ‘중국(조선)의 문화가 꽃피기를 바라다’라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지성사대 일준화제(사대모화)’를

이른바 ‘사대주의’라 부르며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무식無識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 올바른 뜻은

‘지극한 정성으로 천하(조선)를 키우고 꾸준히 제도(문화)를 꽃피우다’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사대모화는

치자治者나 유식자有識者라면

그 누구나 지상至上의 목표로서 하여 추구하는 이상理想이다.

 

 

동문동궤同文同軌의

동문은 문자의 통일을,

동궤는 도량형, 규격 등의 통일을 뜻한다.

 

이를, 조선(동국)의 문자와 도량형을 중국의 것과 똑 같게 맞춘다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하나의 문자, 하나의 규격만을 사용하는 것,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치자治者라면 누구나 제일 먼저 염두에 두는 정책이다.

즉, 동문동궤는 자신이 다스리는 통치구역 내의 통일을 의미하지,

자기 것을 남의 것에 맞추어, 남의 것을 따라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동문동궤의 동同은

‘내(予) 통치구역 내內의 각 지방들 간間의 차이差異를 같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지,

‘내 것을 남의 것에 맞추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 동문동궤는 조선 즉, 구주지내의 통일을 가리킨다.

 

 

 

동문동궤의 원래 출전 즉, 동문동궤의 유래는 중용인데

그 원문은 ‘今天下 車同軌 書同文 行同倫’이다.

 

뜻은 ‘천하 즉, 구주지내의 규격과 문자와 윤리의 통일’을 의미한다.

이것은, 동문동궤가 ‘내 것을 남의 것에 맞추다, 남의 것을 따라하다’가 아니라

‘내 것의 통일’을 뜻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내 것’은 바로 ‘중국대륙의 천하天下’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금 최만리 등은 ‘자신의 천하(중국대륙)’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의 동국’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중국의 경우를 인용하여

동국내東國內의 통일을 의미한다거나 중국의 것에 동국의 것을 맞춘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중국의 것에 동국의 것을 맞춘다고 해석하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어떤 근거로 그렇게 해석하는가?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하는 때를 당하여~’는

자기가 통치하는 구역 내의 통일을 의미하지

남의 것에 맞추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글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우리 조정은 조종 때부터 이래로

지성으로 (조선을) 키우고 꾸준히 (조선의) 제도를 꽃피워서,

이제 (조선의) 문자와 규격을 통일한 때를 맞아’라고 해석해야 한다.

 

이를, ‘작은 나라인 동국이 큰 나라인 중국을 섬겨서 중국의 제도를 따라하여,

이제 문자와 규격을 중국과 같게 하여’라고 해석하면 안 된다.

 

 

그러면, 사대모화의 대상이 중국이 아니란 말인가?

 

그런데, 다 알다시피

화華는 화하華夏, 화음華音, 중화中華라는 단어로 쓰여 곧,

중국을 의미하는 글자로 사용된다.

 

정확히는, 이상적인 중국의 문화(culture, 문물예악文物禮樂)인 문명文明을 가리킨다.

결국, 이 말은 중국이 바로 조선이며 조선이 바로 천하天下라는 뜻이다.

따라서, 동국이 중국을 섬기는 것은 조선을 섬기는 것이며

곧, 동국이 조선을 키우는 것이 바로 사대모화인 것이다.

이것은, 동국이 꽃피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꽃피는 것이다.

동국의 이상理想은 중국을 크게 하고 중국을 꽃피게 하는 것이다.

사대모화의 결과인 중국이 꽃핀 것을 가리켜 중화中華라 하는 것이다. ?????????

 

 

창작언문創作諺文을

‘언문을 창제創製하다’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 역시 큰 잘못이다.

 

창작소설, 창작동요, 창작가요, 창작예술, 창작영화 등의 단어에서 알 수 있듯이,

창작언문의 언문은 스물여덟 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창작은 모방이나 표절, 비슷한 형식이 아닌 독창성이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창작~’은 ‘~’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분야를 가리킨다.

즉, 창작언문이라는 것은

언문이라는 분야를 가리키는 말이지 스물여덟 자를 창제했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창작언문은 언해서적이나 언문운서를 가리킨다.

 

 

 

 

최만리가 굳이 ‘창작’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창작이란 옛것을 본받지 않은 독창성을 지닌 것을 말하는데,

세종의 언문서적이

‘옛것을 저버리고 새것을 좇는 행위, 기준을 어긴 행위’라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

만일 중국에라도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하여 말하는 자가 있사오면,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

 

 

<===

 

이 부분에서 강단학계나 재야학계 모두가 헤메고 있다.

 

심지어, 한문을 일상으로 사용하던 조선시대 때에도 그랬고

특히, 19c 중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같은 오해를 하고 있다.

‘諺文皆本古字 ~ 實無所據’의 전체를 해석해야지

달랑 ‘字形雖倣古之篆文’의 이 부분만을 해석하려 하니

엉뚱한 얘기들만 하고 있는 것이다.

 

 

정인지서의 ‘象形而字倣古篆’도 이 상소문 때문에 나온 말이다.

이 부분을 제대로 해석하려면,

여기의 ‘언문’과 ‘용음합자’가 무슨 뜻인지를 알아야 한다.

 

당왈儻曰은 ‘(세종이) 설혹 말하기를’이라는 뜻이다.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는 세종이 말한 것이지 다른 누가 말한 것이 아니다.

 

여기의 ‘설혹 말하기를’은

‘사실이 아닌 일을 가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하여 가정한 것’이다.

 

 

즉, 전일前日에 있었을 세종과 최만리 등의 논쟁에서

세종이 주장했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세종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이고,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는 세종의 주장이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문제작’과 ‘창작언문’이 언문서적을 뜻한다고 하였으므로,

문맥상 이 부분의 ‘언문’도 ‘언문 28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문서적을 가리킨다.

 

현대의 우리도, ‘한글’이라 하면은

원래 24자모를 뜻하는 것이겠지만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한국어를 가리키기도 하고,

24자모가 합해져 이루어진 한글문장을 가리키기도 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기 위한 문자’라 인식하기도 한다.

또,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을 한글화라 이름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 상소문에 등장하는 ‘언문’들을 무조건 같은 뜻으로 해석하여

‘언문 28자’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사실, 이 상소문은 언문 자체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언문을 공적公的으로 사용하는 것’

즉, ‘언문을 한자의 발음표기에 사용하는 것’과

‘언문을 공문서公文書에 사용하는 것’에 대한 시비이다.

 

 

여기의 언문이 언문서적을 뜻한다고 했는데,

그럼 언해서적일까, 언문운서일까?

 

이 상소문이 있기 바로 전에 운회를 번역하라 하였고,

5항에서 운서를 고치게 하고

그것에 언문을 사용한 것을 특별히 언급하고 있고,

여기 1항에서 용음합자를 거론하고 있으니,

당연히 언문운서를 가리킨다.

 

즉, 1항은 언문운서에 대해 시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이전의 운서와 이후의 운서가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되면,

이 1항은 쉽게 해석된다.

 

 

 

잠깐 이 상소문의 구조를 살펴보면,

1항과 2항이, 3항과 4항이, 5항과 6항이 서로 짝을 이루고 있고

1항, 3항, 5항이 주 내용이고

2항, 4항, 6항은 그 앞항의 내용을 보충하거나 부연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1~4항은 내용적인 면인 실질적인 문제점을 다루고 있고

5, 6항은 절차적인 면인 방법의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상소문을 올리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된 운서에 대한 것을 1항에서 다루고 있다.

 

 

강단은 세종이 직접 언문 28자를 창제創製했다는 전제하에,

‘字形雖倣古之篆文’에서 전篆을

‘소전小篆, 전서체篆書體’라 해석하여

‘한자를 만드는 방법’이나 ‘한자의 구조적 모양’을 모방해서

한글을 창제했다는 등의 말만들기를 하고 있고,

 

재야는 전篆이 가림토를 뜻한다고 해석하여,

가림토를 그대로 모방해서 한글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형수방고지전문’은

뒤에 오는 ‘용음합자진반어고’와 서로 대응하는 말이다.

 

따라서, <‘용음합자진반어고’>를 해석하지 못하면서

<‘자형수방고지전문’>을 해석할 수는 없다.

 

두 문구의 해석이 서로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달랑 ‘자형수방고지전문’만 해석하려 하니,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두 문구의 앞에 오는

‘諺文皆本古字非新字也’가 이 논쟁의 시작인데도,

이 부분은 해석하지 않고 ‘자형수방고지전문’만 해석하려 하니,

웃음 밖에 안 나온다.

 

 

강단의 주장대로 ‘한자를 만드는 방법’을 모방한 것이라 하면,

‘용음합자진반어고’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모양은 한자를 만드는 방법을 따라했는데

용음합자는 ‘한자의 용음합자’를 따라 하지 않았다라고 해석할 것인가?

 

그럼, ‘용음합자’가 무엇인지는 아는가?

또, ‘本古字非新字’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마찬가지로,

재야의 주장대로 골동품인 가림토를 부활시킨 것이라면

용음합자가 옛것에 맞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묻혀있어 쓰지 않던 것인데,

옛것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알고 있는가?

 

 

 

강단이나 재야나

여기의 언문을 한글 즉, ㄱ, ㄴ, ㄷ, ㄹ ... 로 보았기 때문에

올바른 해석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의 언문은 한자 즉, 운서의 발음기호로 사용된

군君, 나那, 두斗, 려閭 ...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최만리 등이 상소를 하게 된 이유는

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문의 쓰임’ 때문이므로,

ㄱㄴㄷㄹ 때문이 아니라 君 那 斗 閭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운서에 있어서 최만리 등에게

ㄱㄴㄷㄹ이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ㄱㄴㄷㄹ이 무엇인지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2항에서, 한자 외에 새로운 문자가 퍼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3항에서는, 언문 때문에 한자가 죽게 되어 문명이 퇴보한다고 말하고 있어,

언문인 ㄱㄴㄷㄹ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훈민정음 이전부터 언문이 이미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추정하건대,

이 상소가 있기 4일 전에

세종이 언문으로 운회를 번역하라는 명을 내릴 때,

운회의 번역에 있어

그 발음기호를 ‘예전부터 운서편찬에 사용되던 글자가 아닌

새로운 글자’인 君 那 斗 閭 등을 사용하는 것은 안 된다고,

최만리 등이 말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세종이 君 那 斗 閭 등은

본래 다 고자古字이지 신자新字가 아니다라고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등은 두 달 동안 지켜봐온 것도 있고 하여,

다른 문제들도 함함께 묶어 이 상소를 하게 되었고,

이 상소문의 1항에서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훈민정음 이전의 운서

즉, 중국의 운서에서 사용된 발음기호는

견見, 니泥, 단端, 래來 ... 등이었다.

 

그러데, 세종이 군君, 나那, 두斗, 려閭 ... 등의 글자로 바꾸려 한 것이다.

그러니, 최만리 등이

옛것(古字)이 아닌 새것(新字)을 써서는 안 된다 한 것이다.

 

생각하건대, 운서의 발음기호로 쓰이는 한자는,

가장 널리 쓰이고 가장 발음하기 쉽고 가장 바른 소리를 낼 수 있는 글자일 것이다.

 

 

 

따라서, 운서의 발음기호는 함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발음기호를 바탕으로 모든 한자를 읽게 되는데,

갑자기 발음기호가 바뀌어 버리면 한자를 읽지 못 하거나,

바르게 읽지 못 하는 사람이 생길 수가 있다.

 

 

고자古字는 ‘예부터 써왔던 글자’를 의미하므로,

새로운 글자들에 비해 ‘널리 쓰이는 글자’를 가리키고,

기준이자 표준이 될 수 있는 글자로서 운서에 쓸 수 있다.

 

신자新字는 ‘새로 생긴 글자’를 의미하므로,

고자에 비해 ‘널리 쓰이지 못하는 글자’를 가리키고,

정자正字가 아니기에 운서에 쓸 수 없다.

 

신자新字는 약자略字, 속자俗字 등을 포함해서

답畓처럼 새로 만들어진 글자를 가리킨다.

 

 

 

세종은 스스로 운서에 대한 조예가 상당하다 자부하고 있어,

기존에 쓰이던 발음기호가 아닌 새로운 발음기호를 쓴 것이다.

 

세종은 그 새로운 발음기호가 신자가 아닌 고자라서 괜찮다고 한 것이며,

최만리 등도 그것을 인정하였다.

 

최만리 등이 세종의 주장을, 신자가 아니라 고자라는 주장을 인정한 것이

바로 ‘則字形雖倣古之篆文’인 것이다.

 

자형字形은

한자漢字의 구성요소인 모양(形), 뜻(義), 소리(音) 중의 하나인 모양을 가리키는 것

즉, 같은 한자끼리 서로를 구별하는 의미로서의 모양을 의미하는 것이지,

문자를 만드는 방식(상형문자, 표음문자, 표의문자 등)으로서의 모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논쟁은

운서편찬에 대한 것이므로

당연히, 문자를 만드는 방식이 아닌 한자의 구성요소로서의 모양(形)을 말한다.

따라서, 이 상소에 대한 반론을 담고 있는 ‘정인지 후서’에서의 상형象形도 같은 의미이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방倣을

이른바 ‘모티브를 따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데,

방倣은 글자의 원래 뜻인 ‘본뜨다, 본받다’로 해석하여야 한다.

 

또, 전문篆文이나 전篆을 서체書體(筆體)로 해석하여

소전小篆의 획劃과 한글의 획을 비교하기도 하는데,

전篆이 대전大篆이든 소전小篆이든

여기에서의 전篆은 한자의 기원起源(오리지널)을 의미한다.

 

 

한자의 기원이 갑골문이니 금문이니 하는데,

현재 우리가 쓰는 한자에 대해 당시의 사람들은

대전이나 소전을 그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 말은,

세종 당시의 정자正字의 필체나 획이 소전의 필체나 획과 다르다 하더라도,

그 글자가 나중에 생긴 새 글자가 아니고

그 기원이 소전에 있으면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고지전문古之篆文은 고자古字와 같은 뜻이 된다.

실제로, 바로 앞부분에서

‘儻曰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라고 하여,

분명하게 古字와 新字를 말하고 있어 ‘古之篆文=古字’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결국, 이 부분의 해석은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것이지만 (글자의 소리는 옛것이 아니다)’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눈 뜬 장님들은

篆이라는 글자에 정신이 팔려,

전서체니 가림토니 하며 엉터리 해석을 하고 있다.

 

 

 

기존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하자.

새 문자를 만들었는데 새 문자는 이미 한자漢字와 모양이 다르고,

중국을 배신하고 이적처럼 두 가지의 문자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제자원리가 한자의 제자원리와 같다고 하여,

중국을 배신하고 이적처럼 두 가지의 문자를 가진 잘못이 줄어드는가?

 

한자의 제자원리와 같다는 것이,

한자의 용음합자와 다르다는 것을 덮을 수 있는가?

 

제자원리가 같다는 것이 새 문자 창제의 정당성이 될 수 있는가?

척 보면 한자와 한글이 상관없다는 것을 세 살 먹은 아이도 알 수 있는데,

한자와 한글의 획이 비슷하다고 하여,

한자와 한글의 제자원리가 같다고 하여,

한자와 한글이 서로 연관이 있다며 엮는 것이

중국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한글 창제의 명분이 될 수 있는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을, 너무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운서韻書에서는

발음기호로 쓰이는 한자의 모양(象形)도 중요하지만,

그 발음기호를 사용하여 모든 한자의 음(字音)을 올바르게 발음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즉, 음音이 더 중요하다.

 

그 발음하는 방법이 바로 ‘用音合字’인 것이다.

용음합자를 ‘음을 사용하여 글자를 합하다’라고 해석하여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데,

 

용음합자는 용음과 합자가 별개로서,

용음은 현대식 용어로 ‘발음發音’이고

합자는 현대식 용어로 ‘음소音素를 합해서 음절音節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합자에 있어서

훈민정음 이전까지는 <‘자음字音=자모字母(聲母)+운모韻母+성조聲調’>이었는데,

훈민정음 이후로는    <‘자음字音=초성(字母) + 중성+ 종성+ 성조’>로 바뀌게 되니

즉, 운모가 중성과 종성으로 나뉘게 되니 ‘反於古’라 한 것이다.

 

 

 

용음用音이 옛것에 위배된다는 것은, 자음字音이 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최만리 등이 3항에서 설총의 이두를 거론하니,

세종 역시 설총의 이두를 거론하면서, 음이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薜聰吏讀 亦非異音乎).

 

그 음이 달라지는 것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오주연문장전산고>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세종 이후 4백여 년이 흐른 뒤에 지은 책이라,

현대의 우리들처럼 훈민정음이나 언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낭설이나 추측도 싣고 있다.

 

그런데, 추측 중에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經史篇1 경전류經傳類2 소학小學 훈고訓詁 : 반절反切과 번뉴翻紐에 대한 변증설辨證設’에 나오는 말이다.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반절의 말>은 한(漢) 나라 이전부터 이미 있었으며

<송(宋) 나라 때 심괄(沈括)은

“옛 말에 두 소리가 어울려 한 글자가 되는 것은 이미 있었다.

불가(不可)가 파(叵)가 되고,

하불(何不)이 합(盍)이 되며,

여시(如是)가 이(爾)가 되고,

이이(而已)가 이(耳)가 되며,

지호(之乎)가 저(諸)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 증거가 《주례(周禮)》의 사사(士師)의 오계(五戒)에 있는데

‘첫째, 서(誓)는 군려(軍旅)에 쓰고[用于],

둘째, 고(誥)는 회동(會同)에 쓰며 [用之于],

셋째, 금(禁)은 전역(田役)에 쓰고[用諸],

넷째, 두(紏)는 국중(國中)에 쓰며[用諸],

다섯째, 헌(憲)은 도비(都鄙)에 쓴다[用諸]’ 하여

느리게 발음하면 지우(之于)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저(諸)로 줄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고,

 

 

《소이아(小爾雅)》에는 “저(諸)는 지호(之乎)이다.” 하였으며,

정초(鄭樵)는 “느리게 발음하면 두 음절이 되고 빠르게 발음하면 한 음절이 된다는 것은,

느리게 발음하면 자언(者焉)이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전(旃)이 되며,

느리게 발음하면 자여(者與)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저(諸)가 되며,

느리게 발음하면 이이(而已)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이(耳)가 되며,

느리게 발음하면 지의(之矣)가 되는 것이

빠르게 발음하면 지(只)가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였다.

 

 

 

두 자를 합하여 한 음으로 만든 것은 주(周)ㆍ진(秦) 때부터 있었다.

송 나라 송상(宋庠)의 《국어보음(國語補音》) 행옥이십곡(行玉二十瑴)의 아래에

“상고하건대, 모든 책에 이십(二十)이란 글자를 입(卄)자로 쓴 데가 없고

옛 음에만 입자가 나왔으니, 그렇다면 마땅히 음은 입이어야 한다.

 

안지추의 계성부(稽聖賦)에

“위 나라 여자[魏嫗]는 어찌 그리 많은가?

한번에 애기를 40명이나 배었네.

중산(中山)은 어찌 그리 많은가?

아들이 백이십[百卄]이다.”라고 했으니, 이것이 하나의 증거이다.

 

 

또 30을 삽(卅)으로 쓰는데 음은 소합반(蘇合反)이며,

40을 십(卌)으로 쓰는데 음은 선립반(先立反)이다.

 

모두 진(秦) 나라 때 예서(隸書)가 나온 후에

되도록 간편하게 하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글자마다 따로 음이 있으니,

이것은 대저 빠르게 말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것은 모두 두 자를 한 자로 만든 것으로,

반절과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인용하여 변증한다>

 

~~

 

 

愚以爲翻切法 中原則兩字相摩 以爲聲韻 謂之翻切 我東則二字先去後後去先 合以成音 盖兩字先以東音 而取訓民正音書之 如吽字呼後切 則呼字爲호 先去後<先書字 去下畫 留上畫之謂也> 則只存ㅎ而去ㅗ也 後字爲후 後去先<後書字 去上畫 留下畫之謂也> 則只存ㅜ而去ㅎ也 合前ㅎ後ㅜ 則成후字 音爲后也

 

내가 생각하기에는 번절법翻切法이

중국의 것은 두 글자가 서로 갈리어(相摩) 소리(聲韻)가 되는 것을 번절이라고 하나,

우리나라는 두 글자 중에 앞의 것은 뒤를 버리고,

뒤의 것은 앞을 버린 후 합하면 소리(音)가 되는 것인데,

대개 두 자를 먼저 우리 소리(東音)로 한 다음 훈민정음을 취하여 쓰는 것이다.

 

 

가령,

吽(후, 우, 음, 흠)자가 호후절呼後切이라고 한다면,

호呼자는 ‘호’가 되므로,

앞의 글자는 뒤의 것을 떼어 버리라고 했으니

<먼저 쓴 글자의 아래 획을 떼어 버리고 위의 획만 남겨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ㅎ’만 남고 ‘ㅗ’는 없어지며,

 

후後자는 ‘후’가 되므로,

뒤의 글자는 앞의 것을 떼어 버리라고 했으니

<뒤에 쓴 글자의 위의 획을 떼어 버리고 밑의 획만 남겨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ㅜ’만 남고 ‘ㅎ’은 없어지는 것인데,

앞 자의 ‘ㅎ’과 뒷자의 ‘ㅜ’를 합하면 ‘후’자가 되고 소리는 후后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 정리해보자.

예를 들면,

훈민정음 이전의 반절은 ‘之乎切, 之于切’이 ‘諸/저/’이지만,

훈민정음 이후의 반절로는 ‘之乎切, 之于切’이 ‘諸/조/, 諸/주/’가 되어 발음이 달라지는 것이다(저=>조, 주).

 

즉, 훈민정음

이전의 반절법은

두 글자를 빠르게 발음하는 방식으로 ‘기+아=갸’가 되고,

 

이후의 반절법은

‘기’의 과 ‘아’의 ‘’를 합쳐 ‘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훈민정음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중국이나 동국 둘 다 훈민정음식의 반절이 이미 자리를 잡아,

이규경도 당시에는 이를 확인할 수 없었고

단지, 예전 방식의 흔적을 옛 서적에서 읽은 것이다.

 

 

그래서, 세종의 운서편찬에 있어

발음기호는 옛것을 썼지만,

그 발음과 음절 만드는 방식이 옛것과 다르다고, 최만리 등이 주장한 것이다.

 

분명한 것은, 1항은

언문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언문이 발음기호로 사용된 운서의 편찬 방식에 대한 논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훈민정음과 운서의 편찬방식을 정리해 보자.

세종이 무엇을 하려고 한 것이며

최만리 등이 무엇을 반대한 것인지 알아보자.

 

훈민정음 직전直前에는,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데에 있어 반절법이 보편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운서를 편찬하는 데에 있어 기본적인 방법은,

모든 한자를 사성四聲으로 나누고

다시 운韻으로 나누고

다시 성모聲母로 나누어 반절식으로 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 이후의 동국정운을 비롯한 주요主要 운서들도

훈민정음 이전의 편찬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훈민정음 이후에 달라진 것은 바로 반절식 표기법이다.

즉, 기존의 반절법을 훈민정음으로 대체하겠다는 것,

한자의 발음표기를 한자가 아닌 언문으로 대체하겠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발음기호를 한자에서 언문으로 바꾸겠다는 발상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東 德紅切 => 東 동 諸 之乎切 => 諸 저].

 

이렇게 바꾸면,

한자를 읽기가 매우 편해질 뿐만 아니라

한자의 발음이 변하는 것도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東이라는 한자의 발음이 변하는 것에는,

東 자체의 발음이 변하는 것도 있지만

德이나 紅의 발음이 변해도 변하고, 德과 紅의 발음이 변하지 않았다고 해도

두 글자를 반절하면서, 풍습風習이나 기습氣習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그런데, 언문을 익혀 발음하게 되면,

언문의 발음이 변하지 않는 한 한자의 음이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문은 애초부터 표음문자이기 때문에,

언문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단절되지 않는 한,

발음기호 그 자체의 발음이 변하지는 않는다.

 

물론, 발음하기 어려운 발음을 간략히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A라는 한자의 발음이 ‘삻’이라고 할 때,

‘삻’을 발음하기 어려워 ‘살’로 그 발음을 바꾸더라도,

그 한자의 발음이 변한 것이지, 표기법으로 쓰이는 문자(한글)의 발음이 변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반절법을 언문표기로 바꾸는 데에서, 기존의 발음이 변하게 된 것이다.

물론, 동국정운이나 홍무정운역훈 등에서,

36자모字母(聲母, 初聲)를 23자모 또는 31자모로 바꾸어 한자의 발음이 달라진 것은,

이 논쟁과는 상관없다.

 

 

이전의 반절법은

두 글자(德紅)를 빠르게 읽어서 한 글자(東)처럼 발음되게 하는 방식인데(/덕+홍/ => /동/),

 

이후의 방식은

기존의 반절식으로 표기된 발음기호(德紅)를,

앞글자의 성모聲母인 초성(ㄷ)과

뒷글자의 운모韻母인 중성·종성()을 합하여 언문으로 바꾸어 표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이 주장하는 바는,

같게 발음되는 /동/이라도 /덕+홍/과 /ㄷ+/은 다르다는 것이다.

 

‘東 德紅切’ 같은 경우는 발음이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諸 之乎切, 之于切, 之於切’ 같은 경우는 /저/에서 /조, 주, 저/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만약, 빠르게 발음해서 발음되는 음을 언문으로 표기했다면,

이 부분(用音)을 최만리 등이 시비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인데,

세종은 일률적一律的으로 ‘앞글자의 초성+뒷글자의 운모’라는 방식으로

한자음을 언문으로 표기한 것이다.

 

사실, /덕+홍/을 정확히 /동/이라고 할 수는 없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따라, /덩/으로 들릴 수도 있고 //으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세종이 일률적으로 ‘앞 글자의 초성 + 뒤 글자의 운모’라는 방식을 택한 것일 수 있다.

세종 스스로 음성학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

 ‘한자의 발음’에 있어 혁명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합자合字가 옛것에 반反한다는 것은 이러하다.

東의 발음을 한자로 표기하는데 있어,

기존의 방식은 ‘德紅’이지만

언문으로 표기하게 되면 ‘斗洪業’이 되어, 2자에서 3자로 합자의 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이다.

 

우리말을 표기하는 데에는

‘초성+중성, 초성+중성+종성’이라는 오늘날과 같은 표기법을 쓰고 있는데,

한자음표기에는 ‘초성+중성+종성’의 방식만을 고집하고 있다.

 

합자合字라는 것은

문자를 만드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자의 발음을 표기하는 것, 음절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용음과 합자는

둘 다 한자의 발음에 대한 얘기이고 운서의 편찬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한 것일까?

초성(ㄱㄴㄷㄹ...)을 표기하기 위해 동국정운은 23개, 홍무정운은 31개를 만들었으면,

운모(      ...)를 표기하기 위해

동국정운 같은 경우 91운이니, 91개의 문자를 만들지,

왜 이렇게 3개가 합하는 방식으로 만든 것일까?

 

이유는,

언문이 이전부터 존재했었고 동국어(俚語)를 표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언문을 훈민정음에 이용한 것이지,

리어를 표기하기 위해 훈민정음을 만들고

그 훈민정음을 한자음표기에도 이용한 것이거나,

애초에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문맹퇴치나 우리말표기를 위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면,

한자음표기에 그렇게 공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다면서,

한글전용은 못할망정 한자음표기에 ‘3자字 합자合字’의 방식을 고집하여,

순우리말표기와 한자어표기가 서로 동떨어지게 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문맹인 백성에게 한자를 배우게 하기 위한 것도 아니면서,

배우게 한다 하더라도 중국식 발음을 배우게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모든 백성을 중국화 하기 위하여 3자합자라는 어려운 방식,

발음하기 어려운 표기방식을 고집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리고, 무지렁이 백성을 위해 한문서적을 언해하는 것이라면,

언해서적의 한자음에까지 꼭 3자합자로 하여,

중국식 발음을 고집할 이유가 있었을까?

 

이렇게 한자음표기에 공을 들인 것은,

애초부터 훈민정음의 목적이 한자음표기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두 가지의 목적을 동시에 가지고 훈민정음을 만든 것이라면,

한자음표기나 순우리말표기나 동일한 방식으로 하지

굳이, 따로 따로 다른 방식을 택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고,

표음문자를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한자의 발음표기까지 연구했다는 것,

거기다가 중국의 발음까지 따라 하기 위해 고민하고 연구했다는 것은,

더구나 속국의 왕이 그런 일을 하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세종 이전에 언문이 동국에서 한창 잘 사용되고 있었고,

훈민정음은 그 언문을 이용하여 한자음을 표기하기 위해 만든 것이며,

그 훈민정음이 중국에 내려졌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若流中國’을

‘만약 (동국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만약 (동국이 한글을 만들었다는 소문이) 중국에 흘러들어,

만약 (한글 서적들이) 중국에 흘러들어 등’으로 해석하는데,

이 역시 잘못된 해석이다.

 

유流를 ‘방랑하다, 떠돌다, 표류하다, 흘러들다 등’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유流는

‘흐르다(水行), 퍼지다, 펴다(布), 전하다(傳), 내리다, 내치다, 흘리다, 흐르게 하다,

귀양 보내다 등’의 뜻을 가진 글자로서,

원래 가장 기본이 되는 해석은 ‘흐르다’이다.

 

‘흐르다’는 물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것으로서,

약류중국은

‘만약 중국에(으로) 흐르면, 내리면, 내려지면, 내려 보내면, 퍼지면, 펴면, 전하면, 흐르게 하면’으로 해석해야 한다.

 

동국에서 중국으로 내리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유流자를 쓰는 것이다.

 

유流는 능동적인 행위이지 수동적인 행위에 쓰는 단어가 아니다.

즉, 유流를 ‘어쩌다 중국에 알려지다’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떠돌다’나 ‘흘러들다’로 해석되는 경우는

표류漂流, 유랑流浪 등이지만,

이때는 표漂와 랑浪 때문이지 유流 때문이 아니다.

이 부분은, ‘만약 (언문운서를) 중국에 내려 보내면’으로 해석해야 한다.

 

 

 

‘或有非議之者’를

‘혹시 (동국이 한글을 만든 것을)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으로 해석하는데,

과연 이것이 대한민국의 학문을 책임지는 전문가들의 해석인지, 놀라고 또 놀랄 일이다.

 

‘비난非難’과 ‘비의非議’가 같은 뜻인가?

 

동의同義는 ‘같은 뜻’이라는 뜻으로서 ‘엄마와 어머니는 동의어同義語이다’처럼 쓰이고,

동의同意는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서 ‘어떤 것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다’처럼 쓰이고,

동의同議는 ‘의견意見이나 주의主義가 같은 의론議論’이라는 뜻으로서

‘여러 사람의 모아진 의견意見’처럼 쓰인다.

 

동의同意가 누구나 인정할 수 있게 객관화가 되면 동의同義가 되는 것이고,

동의同意가 모아지면 동의同議가 되는 것이다.

 

 

3항에 나오는 정의正議는 ‘바른 동의同議’라는 뜻으로서,

단순히 의견이 모아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의견이 모아진 것을 말한다.

 

 

즉, 동의同議는 ‘정부의 A라는 정책을 지지하는 국민의 동의同議가 있었다’처럼 쓰인다.

따라서, 비의非議는 그 반대의 뜻으로서 ‘정부의 A라는 정책에 비의非議하는 국민들이 있었다’처럼 쓰이는 것이다.

 

즉, 비의非議는 ‘아니라고 말하는,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의론議論’을 말하는 것으로서,

현대식 용어로 바꾸면 ‘반대여론反對輿論’ 정도가 될 것이다.

 

 

따라서, 혹유비의지자或有非議之者를 ‘(우리나라가 한글을 만들었다는 것을) 혹시 비난하는 자가 있다면’으로 해석하는 것은,

양심을 저버리고 대중을 속이는 행위이다.

 

바로 앞 구절에 나와 있듯이,

비의자非議者가 생기는 것은

‘진반어고盡反於古, 실무소거實無所據

(다 옛것에 위배되어, 실로 근거根據할 바가 없다)’ 때문이지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든 것 때문이 아니다.

 

언문운서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만드는 방식이 규범規範에 어긋나기 때문에,

혹시 비의자가 생길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만리 등의 주장이고 실제로 비의자가 생길지는 미지수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기 위해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들었는데,

중국인이 비의非議할 일이 뭐가 있는가?

비난非難을 했으면 했지, 비의를 할 이유가 없다.

 

오랑캐처럼 한자 외에 다른 문자를 갖는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들지 말라는 반대여론이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이유가 언문이나 언문운서를 만든 것 때문이 아니라,

만드는 방식이 규범에 어긋나기 때문이란다.

 

이것은, 언문운서를 동국에서 중국으로 내려 보내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동국이 상국上國이고 중국이 하국下國이라는 뜻이며,

동국이 아버지이고 중국이 아들이며,

동국의 왕이 회장會長이고 중국의 왕이 사장社長이 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豈不有愧於事大慕華’를 강단은

‘어찌 대국을 섬기고 중화를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사오리까’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역시 웃음 밖에 안 나온다.

 

한문이나 국어에 평생을 바쳐 공부하고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이 정도의 수준 밖에 안 되다니,

이 나라가 이 정도나마 굴러가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괴愧는 ‘부끄럽다’라는 뜻 말고는 없다.

괴愧는 5항에도 나오는데, 역시 중국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죄나 허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마음 작용을 참慚,

자신의 죄나 허물에 대하여 남을 의식하여 부끄러워하는 마음 작용을 괴愧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말 ‘부끄럽다’는

자신과 대등하거나, 자신 보다 아랫사람을 상대로 사용하는 말이다.

자신 보다 윗사람에게는 사용하지 않는다.

 

아직 한창 부모의 보살핌을 받는 어린 아이가 잘못을 했을 때,

부모에게 혼날까봐 걱정하고 부모에게 죄송한 것이지,

부모에게 부끄러워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잘못이 부모에게 부끄러우면 그는 이미 어른이다.

부모가 잘못을 하면 자식에게 부끄러운 것이고

스승이 잘못을 하면 제자에게 부끄러운 것이며,

상관이 부하에게 부끄러운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잘 키울 책임이 있어서,

자식에게 모범이 되고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

좋은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모범이 되지 못하고 해로운 것을 주고 나쁜 것을 가르쳐서,

자식이 부모에게 ‘부모님, 어찌하여 제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십니까?

 

부모님, 제게 밥을 주셔야지 어찌 불량식품을 주십니까?’라고 했을 때,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을 부모가 어디에 있는가?

 

사대모화가 중국을 섬기고 중국의 문화를 모방하는 것이라면,

어찌 중국에 부끄러울 수가 있는가?

사대모화를 못 했으면 중국에 죄송하고 황송한 것이 아닌가?

중국의 속국이나 다름없는데 중국에게 부끄럽다는 말을 쓸 수 있는가?

 

 

기불유괴어사대모화豈不有愧於事大慕華는

‘어찌 사대모화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어찌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는 데에 부끄럽지 않겠습니까?’로 해석해야 한다.

 

 

1항에서 최만리 등이 주장하는 바는,

언문28자 자체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언문을 이용하여 만드는 운서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며, 그 잘못된 운서를 중국에 내려 보내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를 학자라는 이들은,

언문창제에 반대하고 중국의 눈치를 살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다.

 

 

 

===>

一, 自古九州之內, 風土雖異, 未有因方言而別爲文字者, 唯蒙古、西夏、女眞、日本、西蕃之類, 各有其字, 是皆夷狄事耳, 無足道者.

 

1. 옛부터 구주(九州)의 안에 풍토는 비록 다르오나

지방의 말에 따라 따로 문자를 만든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고(蒙古)·서하(西夏)·여진(女眞)·일본(日本)과 서번(西蕃)의 종류가 각기 그 글자가 있으되, 이는 모두 이적(夷狄)의 일이므로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

이 상소문에서 세종이나 최만리 등은

자기자신의 일을 논하고 있지 남의 일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남의 경우를 예로 들어 자기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기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의 ‘구주지내九州之內’가 남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종이나 최만리등은 동국인東國人이고 정책을 펼치는데 있어 그 대상이 중국이므로,

동국의 책무는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논하고 있는 것은 자기자신의 ‘구주지내’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방언方言을 단순히 ‘사투리’로 알고 있지만,

방언은 중국 즉, 천하의 지방어(사투리)를 뜻하는 고유명사이다.

그리고, 방언에 상대되는 동국의 용어는 리어俚語이다.

 

어떻게,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동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는가?

무슨 근거로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가?

이 부분은, 세종과 최만리 등이 서로 논쟁하고 있는 대상이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뿐이다.

 

같은 실록에서,

이곳에서는 일본을 동이東夷라 하고

저곳에서는 우리나라(한반도)를 동이라 부르고 있다.

모순이 되는 내용이 함께 실려 있는데,

이는 실록이 변조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상소문에서는 일본이 동이라 말하고 있다.

여러 정황상,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동이가 일본을 가리키는 단어로 쓰였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나라를 동이라 부르는 부분은 변조된 것이다.

 

실록을 살펴보면, 기록의 주체가 둘 이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즉, 두 개 이상의 기록물을 합쳐 놓은 것 같다는 말이다.

실록이 변조되었다는 것은, 내용상으로도 외형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다.

 

이 부분은, ‘구주지내

즉, 중국은 옛부터 방언을 핑계로 지방마다 따로 문자를 만든 경우가 없었고

하나의 문자로 통일되어 있었는데,

지금 훈민정음(언문)을 중국에 내려 보내면

중국에 두 가지의 문자가 존재하게 되어,

중화의 중국이 이적夷狄과 같이 두 개의 문자를 갖게 되는 것이다’라고

최만리 등이 주장하는 것이다.

 

사실, 최만리 등뿐만 아니라 모든 치자에게 있어 언어나 문자, 도량형 등의 정책은,

하나의 언어 하나의 문자 하나의 도량형으로 통일하는 것이 기본이다.

 

따라서, 최만리 등의 ‘하나의 문자’ 정책은 당연한 것이고 옳은 것이다.

다만, 최만리 등이 간과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표의문자와 표음문자의 차이에 대한 것을 놓친 것이다.

 

당시에 표의문자니 표음문자니 하는 그러한 개념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에도 문자(표의)와 언문(표음)의 차이점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표의와 표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문자는 없다.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시, 그런 문자가 발명된다면 모를까,

어떤 사회이든지 간에 하나의 문자만 가질 수는 없다.

 

이 부분을 최만리등은 놓친 것이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한글전용과 같은 하나의 문자만을 갖기를 희망하나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부분은, 중국에는 하나의 문자만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중국이 하나의 문자만을 가지고 있으니

우리나라도 하나의 문자만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그렇게 해석하려면,

강대국인 중국을 떠받들고 모방하는 것이라면

그냥 ‘중국이 하나의 문자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도) 이적처럼 두 개 이상의 문자를 가지지 말고

하나의 문자만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면 될 것이다.

 

굳이, ‘옛부터’라는 말을 하고

풍토와 방언을 들먹여 중국의 내력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의 문자를 가지게 될 당사자가 중국이기 때문에

중국의 내력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세종 당시까지 풍토나 방언이 달라 언어나 문자의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을 중국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하나의 문자만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두 가지의 문자를 가지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

<傳>曰: “用夏變夷, 未聞變於夷者也.”

 

옛글에 말하기를,

‘화하(華夏)를 써서 이적(夷狄)을 변화시킨다.’ 하였고,

화하가 이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

 

이 부분 역시,

중국에 대한 얘기이지 동국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이적이 중국을 따라하면 따라했지,

중국이 이적을 따라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문명文明에 대한 최만리 등의 기준 중에 하나는 바로, 동문동궤이다.

이적은 미개하기에 통일성이 없고 임시방편의 편리만을 좇기 때문에

여러 문자를 갖게 되어, 결국에는 혼란스런 사회인 비문명에 놓이게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는 하나의 문자만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를, 이적을 변화시키는 중국을 모방하여

동국도 하나의 문자만을 가져야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전혀 없다.

 

이 부분은, 중국이 이적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데,

두 개의 문자를 가지는 것은 중국이 이적으로 변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용하변이用夏變夷’는 속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뜻은 ‘동국東國(天國, 天毒, 天竺)이 중국인 하夏를 써서

온 세상(주변의 이적夷狄)을 문명에 이르게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화하華夏=중국中國’이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하夏는 역대 중국 중에 최초의 중국(왕조)으로 알려져 있다.

중화는 문명에 이른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화하華夏는 중화(문명)에 이른 하夏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지

중국을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또, 역대 중국 중에 ‘화하’처럼 화華를 붙여서 부르는 중국은 없다.

즉, 화하는 중화의 좋은 본보기로서 모든 중국의 롤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 상소문은 1항부터 6항까지 전부 다 중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

당연하지만,

남의 나라인 중국에 대한 얘기이거나 우리나라인 동국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우리나라인 중국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동국에 대한 얘기라고 착각하고 있고,

중국의 속국인 동국이므로,

중국을 롤모델로 삼은 동국이므로 중국의 경우를 예로 들어 언급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이 상소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한문공부를 하기 전에 국어공부나 독서량을 늘려 독해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

필자가 이 상소문을 해석하면서 느낀 것은,

한문 실력이 이 상소문의 해석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독해력 즉, 한국인이 한국어를 이해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부분, 하夏를 써서 이夷를 변하게 한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얘기이지,

‘롤모델인 중국’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동국도 중국을 따라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중국을 따라서 동국도 그러해야 한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지,

필자는 도저히 모르겠다.

중국에 대해 얘기하고 있고 ‘중국이 어떠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대들은 눈 뜬 장님인가?

 

===>

歷代中國皆以我國有箕子遺風, 文物禮樂, 比擬中華. 今別作諺文, 捨中國而自同於夷狄, 是所謂棄蘇合之香, 而取螗螂之丸也, 豈非文明之大累哉?

 

역대로 중국에서 모두 우리 나라는 기자(箕子)의 남긴 풍속이 있다 하고,

문물과 예악을 중화에 견주어 말하기도 하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이른바 소합향(蘇合香)을 버리고 당랑환(螗螂丸)을 취함이오니,

어찌 문명의 큰 흠절이 아니오리까.

<===

 

이 부분은 어떻게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지,

어떻게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는지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歷代中國皆 ~ 文明之大累哉’는

한 문단으로서 그 내용이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이어져야 하고,

앞부분에 이런 말이 나왔는데 뒷부분에 저런 말이 왜 나오는지에 대한 의문이 없어야 한다.

 

학자라는 이들이 저렇게 해석을 해놓고 저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된다고 하니,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중국이 우리나라를 칭찬해준 것’과 ‘중국을 버리는 것’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지,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이 왜 중국을 버리는 것이며,

중국을 버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소합향과 당랑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이 부분은,

‘歷代中國皆 ~ 比擬中華’와

‘今別作諺文 ~ 文明之大累哉’의 두 문장으로 되어있다.

 

먼저 앞 문장을 살펴보자.

역대중국개歷代中國皆가 전체 문장의 주어이고

비의比擬가 전체 문장의 서술어이며

문물예악은 ‘文物禮樂, 比擬中華’라는 작은 문장의 주어이다.

 

 즉, 比擬는 ‘역대중국개’의 서술어이면서 동시에 ‘문물예악’의 서술어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문장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제일 중요한 글자는 ‘以’이다.

 

어떤 것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 기본은,

일반적이고 상식적이며 이해하기 쉬운 해석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하고 나서 그 해석이 자연스럽지 않고 잘못되었다 생각될 때,

의역을 한다던지 역사적 지식 등을 대입시킨다던지 하여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럼, 여기의 以를 어떻게 해석해야 될까?

 

以는

‘~써, ~로, ~로써, ~를 가지고, ~를 근거로, ~에 따라, ~에 의해서, ~ 때문에, ~까닭에, ~로 인하여 등’이 기본적인 뜻이다.

 

 以를 이러한 뜻으로 해석을 하여 전체 문장과 융합되는지를 살펴보고 나서,

문제가 있을 시 다르게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순서다.

 

따라서,

이아국以我國은

‘아국으로써, 아국을 가지고, 아국에 의해서, 아국 때문에, 아국으로 인하여 등’으로 먼저 해석해야 한다.

 

결국, 이 문장은

‘역대 중국 모두가 기자유풍이 있는 우리나라에 의해

문물예악이 중화에 이르렀다’

 

또는

‘역대 중국 모두가 우리나라에 의해 기자유풍이 있어서

문물예악이 중화에 이르렀다’가 된다.

 

즉, 중화에 비의되는 것은 동국이 아니라 중국인 것이다.

/////////////////////////////////////////////////////////////////////?? 

비의比擬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견주어 비기다’인데, 이것과 저것의 차이점을 드러내는 비교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의 닮은 점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미국에 비의된다’ 처럼 쓰여

(미국이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 전제하여)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미국처럼 발달되어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중화中華는 ‘중국이 꽃핀 상태’를 가리키는 단어이지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다.

 

물론, 중화라는 단어가 상황에 따라 중국이라는 나라를 지칭하는 뜻으로 쓰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쓰일 때는 아무 때나 그렇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문화나 문명에 초점을 맞출 때이다.

 

중화의 원래 뜻은

‘이상적인 문화 수준에 이른 중국, 문명의 중국, 중국이 꽃핀 상태’를 의미한다.

 

중화라는 단어는

현대의 ‘선진국, 복지국가, 일류국가 등’의 의미인데,

다른 점은 아무 나라에나 쓰는 말이 아니라

오직 중국에 대해서만 쓰는 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을 중화에 비의하는 것이 맞는 것이지, 동국을 중화에 비의할 수는 없는 것이다.

 

중국은 ‘역대 중국 모두’라고 하였지만 동국은 그냥 ‘동국(아국)’이다.

이것은 중국이 동국에 대해 평가한 것이 아니라

동국이 중국에 대해 평가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아국我國은 조선朝鮮(‘조선’과 ‘조선국’이라는 단어가 언제 어떻게 쓰였는지 연구가 필요하다)이 아니라 동국東國인데,

동국은 우리나라의 특정시기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정체성, 전체 역사에 있어서의 우리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최만리 등은 동국인이고 동국의 입장에서 중국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역대의 중국 모두가 최만리 등의 나라인 동국에 대해,

동국(고조선~근세조선)의 문물예악이 어쩌니 저쩌니라고 언급할 수는 없다.

특정 중국이 동국에 대해 문물예악이 어쩌니저쩌니하며 언급할 수는 있다.

 

다시 말하자면, 특정 중국(중화민국)이 우리나라의 역사(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어쩌구저쩌구할 수는 있어도,

 

역대의 모든 중국이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어쩌구저쩌구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역대 중국 모두가 동국의 문물예악이 중화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혹자는, 명나라는 조선과 그 이전에 대해,

원나라는 고려와 그 이전에 대해,

송나라는 고려와 그 이전에 대해,

당나라는 신라와 그 이전에 대해 평가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각 중국이 그러한 평가를 하였을 수 있다.

 

그러나, 원나라와 그 이전 중국들의 평가는 명나라의 평가로 갈음할 수 있으므로,

‘역대 중국 모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이

중국(명나라)의 평가가 어떠하다고 말하면 될 일이다.

 

설사, 아국을 동국(고조선~근세조선)이 아닌 조선국(근세조선)으로 보더라도 마찬가지이다.

명나라가 조선국을 어떠하다고 평가할 수는 있어도

한나라, 당나라, 송나라 등이 조선국을 어떠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그리고, 동국은 그 정체성 즉, 혈통이나 법통 등이 계속 이어지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다.

역대 중국은 각자 별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한 중국들 모두가 일관되게 동국을 자신들과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국은 중국을 키우고 꽃피우는 것이 목적이므로,

역대의 중국들이 서로 별개일지라도

‘역대 중국 모두가 동국에 의해 중화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상소문의 이 부분과 비슷한 글이 있는데,

바로 於是以吾東國世事中華而語音不通必賴傳譯{홍무정운역훈 서}과

惟我東國世事中華語音不通必賴傳譯{사성통해 서}이다.

 

이를 ‘이에 우리 동국이 대대로 중국과 친교하였으나 (동국과 중국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해야만 했다’와 ‘우리 동국은 대대로 중국과 친교하였으나 (동국과 중국이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의 학자라는 이들의 수준이 이러하다.

 

 ‘東國世事中華’가 어떻게 ‘동국이 대대로 중국과 친교하였으나’라고 해석될 수 있는가?

 

 

세사世事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가?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호칭 중에는 ‘대한민국, 한국, 남한, 남조선, 코리아, 사우스코리아 등’이 있는데, 다 의미가 다르다.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호칭인 ‘한국’만 하더라도,

같은 한국이라는 명칭임에도 대한민국의 줄임말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역사적인 개념으로서의 한국,

민족적 개념으로서의 한국,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개념으로서의 한국,

국가로서의 한국 등의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화도 그러한 명칭인데,

중화中華나 화하華夏를 무조건 중국이라고 해석하는 바보들이

이 나라의 학문을 책임지고 있다니, 할 말을 잃는다.

 

 

이 부분은

‘이에 우리 동국에 의해 세상일이 중화가 되었으나

(천하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해야만 했다’와

 

‘생각건대 우리 동국이 세상일을 중화가 되게 하였으나

(천하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 반드시 통역을 의뢰한다’로 해석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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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문장인 ‘今別作諺文 ~ 文明之大累哉’를 살펴보자.

 

두 번째 문장은 앞 문장에 이어지는 것으로서

서로 내용적으로 연관이 있어야 하고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

 

‘금별작언문今別作諺文’을

‘지금 따로 언문을 만들다’로 해석하고 있는데,

作을 製로 해석해서는 안. . . .

 

 

<이하생략>

<자료출처 : 정론직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