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후 굳어진 미국 중심 자유주의 질서 붕괴되나
브렉시트 파장, 세계질서 지각변동 예고서구 가치 일방 주입 곳곳서 파열음빈부 격차, 종교 갈등, 민족주의 횡행
중앙일보 이동현 입력 2016.07.02. 00:48 수정 2016.07.02. 07:26
“자유민주주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는 2012년 미국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역사의 미래(The Future of History)’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후쿠야마 교수는 “규제 철폐와 자유시장 원칙에만 몰두한 결과 2008년 세계 금융위기와 유로존(유로화를 쓰는 유럽 19개국) 위기가 발생했고 자유민주주의의 기반인 중산층이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또 “급격하게 진행된 중산층의 몰락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종말이 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후쿠야마 교수는 1989년 저서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최종적이고 영구적인 승리를 선언했다. 그런 그가 자신의 주장을 뒤집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쿠야마 교수의 경고가 다시 세계인의 이목을 끌고 있다. 예상치 못한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Brexit· 브렉시트)가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서구 언론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구축된 국제적 가치와 질서, 이른바 ‘포스트 1945’ 질서가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나 중국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서구 가치의 한 축이었던 영국이 민족주의와 같은 구(舊)질서의 가치에 끌려 EU를 이탈했다는 데 충격을 받고 있다.
스티븐 월트 하버드대 교수는 지난달 26일 미국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FP)에 기고한 ‘자유주의 세계질서의 붕괴’에서 “전체주의와 공산주의를 잇따라 물리치고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질서를 구축한 미국과 동맹이 내부로부터 무너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출범 이후 92년 EU 탄생에 이르기까지 ▶민주적 정치체제 ▶통합된 시장 ▶법치주의 ▶열린 국경 등의 실현은 유럽인의 이상이었다. 1000년 유럽 역사 동안 숱한 전쟁을 겪었고 20세기에만 두 차례 세계대전의 전장이 됐던 유럽은 이상적인 사회와 항구적인 평화를 원했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가 주창한 ‘영구평화론’을 구현하려 한 것이다.
월트 교수는 “미국이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전파하는 ‘하드 파워’라면 통합된 유럽은 ‘소프트 파워’로서 동등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게 유럽의 가치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인들은 이상적(理想的) 가치보다 자유로운 주권 행사, 국경 통제권 같은 구질서에 끌렸고 ‘위대했던 과거’ 같은 향수에 현혹됐다”고 분석했다.▷여기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월트 교수의 분석대로 미국과 동맹들은 전후 70년 동안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경제·안보 ‘블록’ 구축에 힘써 왔다. 90년대 공산주의와의 이념 대결에서 승리한 뒤론 이 ‘블록’이 전 지구적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란 자신감이 팽배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로 대표되는 양자·다자간 안보동맹은 물론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대표되는 경제동맹도 영역을 넓혔다.
하지만 서구적 가치의 일방적 주입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냈다. 21세기 들어 미국과 동맹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민주 정부를 세웠지만 분쟁은 멈추지 않았다. 헌법 제정이나 정당 설립, 자유 선거 같은 껍데기보다 중요한 건 이 같은 가치가 구성원에게 스며드는 것이란 게 월트 교수의 지적이다. 빈부 격차, 종교 갈등, 다원주의와 민족주의 발호 등을 간과한 결과 반세기 넘게 구축된 세계질서 자체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도 브렉시트 충격 속에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는 비(非)자유주의 국가들의 움직임에 주목했다. NYT는 지난달 25일 “브렉시트는 단순한 영국의 EU 탈퇴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전후 질서 전반을 흔드는 신호탄이 됐다”고 분석했다. 서구사회의 통치 방식(governance) 자체가 위협받고 있다는 의미다.
기존 질서에서 소외돼 있던 중국·러시아가 부상하고 시리아·아프가니스탄 등 국가 기능이 붕괴된 지역에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며, 폴란드·헝가리 등 유럽 지역에서조차 구시대적 민족주의가 발호하게 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는 것이다.NYT는 브렉시트 이틀 만인 지난달 25일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인프라개발은행(AIIB) 총회에 주목했다. NYT는 “대표적 비자유주의 국가인 중국이 주도하는 경제 블록이 주도권을 빼앗아 올 기회를 얻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영국이 여전히 나토의 주요 회원국이지만 브렉시트 이후 공동 안보를 위한 군사비 지출을 꺼릴 가능성이 높아 유럽 안보동맹의 와해 가능성도 있다”고 우려했다.
NYT 칼럼니스트 로저 코언은 “자유주의 질서가 아시아의 빈곤을 해결했지만 동시에 유럽 중산층의 일자리를 줄어들게 했다”며 “분배와 균형을 간과한 자유주의가 세계를 어떻게 분열시키는지 보여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자유주의 체제의 약점이 악용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FP는 “도널드 트럼프나 장마리 르펜(프랑스 극우정당 국민전선(FN) 창립자) 같은 극우 정치인들은 자유민주 질서가 제공한 자유를 이용해 사회를 납치했다”고 꼬집었다.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도 “부유한 엘리트와 그렇지 못한 대다수 사이의 빈부 격차가 두 세대 넘게 지속되면서 각국의 정치를 지배하게 됐다”며 “국가 지도자들이 효과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만 할 때”라고 지적했다.
“러시아·터키·태국 등 27개국 권위주의 국가로 회귀”
전문가들은 서구 민주주의가 내재적 모순으로 위기를 맞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개인과 정부라는 전제 자체가 틀릴 수 있다는 의미다.
래리 다이아몬드 스탠퍼드대 교수는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민주주의의 쇠퇴’란 칼럼에서 “2000~2015년 러시아·터키·태국·케냐 등 27개국이 권위주의 국가로 회귀했다”고 지적했다.
비(非)자유주의 국가인 중국이 경제와 안보 모두 영향력을 확대한 것도 근거가 됐다. 이코노미스트 기자 출신인 존 미클스웨이트와 에이드리언 울드리지가 쓴 2014년 베스트셀러 『제4의 혁명(The Fourth Revolution)』은 ‘포스트 1945’ 질서에 대한 회의에서 출발했다. 미클스웨이트와 울드리지는 국민 국가의 탄생과 자유주의 국가의 형성, 복지 국가로의 전환 등 세 차례의 혁명에 이어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가 됐다고 주장한다.
보편적 복지에 집착하는 좌편향 정부나 자유시장을 맹신하는 우편향 정부 모두 ‘관료주의적인 큰 정부’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분석이다. 이들은 싱가포르를 예로 들면서 “서양인들에게 싱가포르는 현명한 수호자 계급이 은(銀)과 동(銅) 계급을 돌보는 플라톤의 공화국처럼 보이지만 직접적 영향을 준 건 정부가 가장 똑똑한 인재를 뽑는 중국의 ‘만다린 전통’”이라고 주장했다.
이동현 기자 offram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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