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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대한민국 독립 운동의 아버지 백범 김구

지송나무 2019. 10. 29. 22:53

 

 

 대한민국 독립 운동의 아버지 백범 김구

 

 

 

 

 

 

-김구 (김창수)  독립운동가
-생애 : 1876년 7월 11일 - 1949년 6월 26일
-가족 : 손자 공무원 김양
-수상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경력 : 1948년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 제창
          1948년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 절대 반대
          1947년 국민회의 부주석 취임
 

 

초년

 

본관은 안동.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본명은 창수(昌洙), 구(龜)·구(九)로 개명했다. 자는 연상(蓮上), 호는 연하(蓮下)·백범(白凡). 아버지는 순영(淳永)이며, 어머니는 곽낙원(郭樂園)이다. 1887년 11세 때 아버지가 집안에 세운 서당에서 한문과 한글을 익혔다. 15세에는 정문재(鄭文哉)의 서당에서 당시(唐詩)와 〈대학〉을 공부하고 과문(科文) 등을 익혔다. 17세때 우리나라 마지막 과거인 경시(慶試)에 응시하기 위해 해주에 갔으나, 매관매직을 보고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와 풍수지리서·관상학·병서 등을 읽으며 훈장을 지냈다.

 

 

 


동학교문활동과 의병활동

 

1893년 동학의 평등주의에 감화되어 입도한 뒤 포덕(布德)에 힘을 기울여 접주(接主)가 되었다. 1894년 황해도 도유(都儒)로 뽑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여기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났으며, 제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라는 첩지를 받는 등 북접계열로 동학교문활동을 했다.

 

 

 

 

 

[백범 기념관에서 발췌]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친일정권은 일본군과 연합하여 농민군을 공격하는 한편, 동학교도 전체를 비적(匪賊)으로 몰아 탄압했다. 귀향길에 농민전쟁을 목도한 그는 그해 9월 삼남에서 올라온 경통(敬通:通文)에 호응하여 해주 죽산장(竹山場)에서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깃발 아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뒤 배신한 우군(友軍) 이동엽(李東燁) 부대의 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군 토벌에 나선 신천(信川) 진사 안태훈(安泰勳:安重根의 아버지)의 집에 은거했으며, 위정척사계열인 유인석(柳麟錫)과 동문인 고능선(高能善)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아 춘추대의(春秋大義)에 입각한 명분론적인 세계관에 몰입하였다.

 

 

 

 

1895년에는 남만주로 건너가 김이언(金利彦)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일본군을 공격했으나 참패했다.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살해되자 충격을 받고 1896년 2월 귀국하여 안악(安岳)으로 오는 도중 치하포(河浦)에서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 를 때려 죽인 뒤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되어 집행되기 직전 고종의 특사로 집행이 정지되었으나,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지 못했다.

 

 

 

1898년 탈옥하여 삼남일대를 떠돌다 하동 쌍계사(雙溪寺)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그해 가을 공주 마곡사(麻谷寺)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서울의 새절을 거쳐 평양근교 대보산(大寶山) 영천암(靈泉庵)의 방주가 되었으나 1899년 환속하였다.

 

 

 

 

애국계몽활동기

 

1900년 강화도로 건너가 개화인사들과 교유하고 교육과 계몽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존중화양이적(尊中華攘夷狄) 사고의 틀을 벗어나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이해 황해도 장연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 백남훈(白南薰)에게 인계하고 공립학교 교원이 되었다.

 

 

 

 

 

 

 

1905년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진남포 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열린 을사조약반대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이동녕(李東寧)·이준(李儁)·전덕기(全德基) 등을 만나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한 뒤, 대한문 앞에서 읍소를 하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는 효과가 없을 뿐만아니라 국민들 또한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건질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사업 등 계몽활동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돌아왔다.

 

 

 

1906년 종산 서명의숙(西明義塾)의 교원이 되었으며, 1907년에는 안악 양산학교(楊山學校)의 교원이 되었다. 1909년에는 재령 보강학교(保强學校) 교장을 겸했다. 1909년에는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를 조직하여 학무총감(學務總監)이 되어 도내 각지 강습소를 다니며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강연 주제는 "한인이 배일(排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것 등이었다. 이때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사건이 발생하자, 사건관련자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불기소로 풀려났다.

 

 

 


1932. 4.26. 백범 선생과 윤봉길 의사
[윤봉길의사 선서문 사진 함께 게재]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는 비밀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0년 양기탁(梁起鐸)이 소집한 비밀회의에 황해도 대표로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무력 항쟁을 하고 만주에는 광복군을 양성하기 위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일제와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安岳) 부호들을 협박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빼앗아 서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려 했다는 소위 안명근(安明根:안중근의 종제)사건의 관련자로 5월에 체포당했다(→ 안악사건). 김홍량(金鴻亮) 등 양산학교 관계자들도 서울에 압송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17년형을 선고받아 복역중 감형되어 1914년 7월 가출옥되었다. 그뒤 양산학교장인 김홍량의 동산평농장(東山坪農場) 농감(農監)이 되어 학교를 세우고 소작인을 교육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압록강을 건너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기

 

상해로 망명한 그는 안창호의 추천으로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으며, 1923년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진로를 둘러싸고 제기된 창조론(創造論)과 개조론(改組論) 등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국민대표회가 분열로 치닫자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하였다. 1924년 국무총리대리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이 되었다. 1927년 약체화된 당시 임정의 처지와 구성원상 국무령제로는 내각 구성조차 어려워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 겸 주석이 되었다.

 


 

 

 

 

이러한 임정활동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배척 반대했으며, 이승만의 외교론과 안창호의 준비론에 대하여는 별다른 비판을 하지 않았다. 1928년 사회주의계열을 제외한 민족주의계열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동녕·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했다. 1932년에는 청년들을 모아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일본인 침략주의자들의 암살사건을 지휘했다.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의 의거가 대표적인 성공사례이다. 이 사건으로 일경의 탄압이 강화되자 상해를 탈출했다. 1933년 난징[南京] 에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광복군 무관양성소 설치와 항일전투방략을 협의했다. 1934년 국무위원직을 박탈당하기도 했으나,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의정원 비상회의에서 국무위원에 재선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의 폭격이 심해지자 임시정부를 장쑤 성[江蘇省]의 전장[鎭江], 후난 성[湖南]의 창사[長沙]로 옮기는 한편, 임정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6단체를 통합하여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했다. 이는 공세를 강화해가는 일본과 최후 결전을 앞두고 여러 갈래로 갈라진 민족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고 결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朝鮮民族革命黨 등도 함께 참가하여 1942년 10월25일 개원된 제34회 臨時議政院 議員들〔「白凡金九全集(5)」(1999)에서〕.

 

 

 

 

 

1940년 이러한 노력의 결실로 민족주의자들의 단일정당조직으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 등 3당을 한국독립당의 이름아래 통합하여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 25일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의 이념적 통합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제정·공포했다. 이것은 통합된 단일정당조직이 단순한 물리적인 결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념적인 융합차원으로까지 진전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정체였다.

 

 

 

한국의 건국정신은 정치 경제·교육의 평등을 보장하는 삼균주의(三均主義)에 있으며, 3·1독립선언에 입각하여 수립된 정부는 민족자력으로 이민족의 전제를 물리치고 5천년 군주정치의 낡은 껍질을 벗겨 새로운 민주제도를 확립하고 사회계급을 타파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건국강령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도입한 좌우합작 타협의 소산물이었다. 이 좌우합작은 전민족적 차원에서 결성된 것이 아닌 김구와 김원봉(金元鳳)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었지만, 좌우연합전선상 매우 귀중한 경험이었다.

 

 

 

 또한 이는 이들을 주체로 민족해방을 쟁취한 뒤 추진할 새로운 국가건설의 가늠자로서 임시정부의 진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이해 가을 충칭[重慶]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참모장에 이범석(李範奭)을 임명하고 일제를 무력으로 몰아낼 계획을 추진했다. 1941년 12월 9일 5개항의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하고 임전태세에 돌입했다. 1942년 7월에는 중국정부와 광복군에 대한 정식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과 더불어 항일공동작전에 나설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에 재선되었으며,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朴贊翊)을 선출하고 결전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나온 학도병을 광복군에 편입시켰으며, 미육군전략처(OSS)와 제휴하여 국내침투를 위한 특수부대로 광복군특공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세우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전격적으로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참전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정국기의 활동
1945년 9월 3일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과 임시정부는 빠른 시일내에 곧 입국할 것 등 14개항으로 되어 있는 '임시정부의 당면정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의 대표자격으로 귀국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11월23일 개인자격으로 김규식 등 임정 국무위원들과 귀국했다. 그뒤 전국을 순회하며 자유·평등·행복의 신한국을 역설하며 국가건설에의 발을 내디뎠다.

 

 

 

 

[전주 학인당을 방문한 김구선생]

 

 

 

그러나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하여 미국·영국·소련·중국 등 4개국이 5년간 신탁통치한다는 신탁통치안이〈조선에 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로 결의되자 반탁투쟁을 주도했다. 이 중심체는 비상정치준비회였다. 이 단체는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치기로 하고 비상국민회의로 개칭하였다. 1947년 2월 14일에는 제2차 비상국민회의전국대회를 열고 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본부를 합칠 것을 결의하고 국민의회로 바꿨다.

 

 

 

이 시기, 그의 정치적 입장은 '삼천만동포에 경고함'이라는 성명에 잘 나타나 있다. 독립진영의 재편성, 새로운 합작위원회의 구성, 신탁통치반대, 미소양군의 철퇴로 38선 철폐, 자주독립정부 수립 등이 그것이다. 그는 즉시 독립을 열망하였으며 이에 따라 민족자주와 반탁을 일치시켜 반탁운동을 맹렬히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겨졌다.

 

 

 

 

[1946년 8월 9일 열린 세계 제패 10주년 기념 행사에서 손기정선수를 격려하는 김구선생]

 

 

 

1947년 11월 유엔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며,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2월 26일 총선거를 감시하려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국을 북한이 거부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 제의가 유엔소총회에서 결정되었다. 이에 그는 단독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에는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1948년 4월 2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진행된 남북협상에서 축사하고 있는 백범선생의 모습]

 

 

 

이미 2월13일 '삼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글에서 "마음 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고 호소하고 "이 육신을 조국이 수요한다면 당장에라도 제단에 바치겠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굳은 의지를 천명한 바 있었다. 이승만과 한민당계열이 선거를 주장하고 준비를 서두르자, "38선을 그대로 두고는 우리 민족과 국토를 통일할 수 없을 뿐만아니라 민생문제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고 하며 이들과 결별하고 민족자주와 조국통일을 위한 시도를 추진했다.

 

 

[평양 4자 회담 당시의 김구 성생과 김일성]
 

 

 

 

그는 1948년 4월 19일 38선을 넘어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 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와 남북요인회담,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자회담에 참석하고 5월5일 서울에 돌아왔다. 도착성명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남조선 단정을 반대하며 미소양군의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5월10일 남한 단정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고, 9월 9일 북한이 정부수립을 선포하는 등 통일이 점차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어갔지만 통일조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38선을 넘기전 기년촬영을 하는 김구선생 일행]

 

 

 

암살되기 한달전 "동족상잔의 유혈과 국토양단의 위기를 방지하고 자주·민주의 원칙하에 조국의 완전독립을 쟁취하려는 나의 주장과 태도는 변함이 없다"고 소신을 밝히고, 이승만과의 합작은 통일정부가 설 때만이 가능하다고 했다. 통일된 자주적 민족국가수립이 그의 최대의 목표였다.

 

 

[1949년 6월 26일,안두희의 총탄에 서거한 백범 김구선생]

 

 

 

1949년 6월 26일 집무실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현역 장교 안두희(安斗熙)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1945년 7월5일의 백범 김구 선생의 국민장 행렬 사진]

 

[崔元奎 글, 수노원 편집]

 

 

김구_민족의 영원한 지도자

 

 

 

다시 한번 마음을 진정하고 반성함으로써 냉정한 이성을 회복하여 한결같은 민족적 양심으로 정성 단결하여 다같이 자주통일의 길로 총 진군 할 수 있는 날에 비로소 이 겨레의 앞에는 통일과 자유의 서광이 비칠 것이다.


- [민성(民聲)] 誌 (1949. 7)에서 -

 

 

 

타락한 과거제도에 실망, 동학군의 선봉장이 되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 7. 11(음)~1949. 6. 26)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 백운방 텃골(基洞)에서 부친 김순영과 모친 현풍 곽씨 낙원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으로 창암(昌巖), 창수(昌洙), 두래(斗來), 구(龜), 구(九), 자는 연상(蓮上),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이다. 선생의 가문은 경순왕의 자손으로서 ‘김자점의 난’으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자 서울 부근에 이사하였다가 다시 황해도 해주로 이주, 양반의 신분을 감춘 채 11대에 걸쳐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선생의 부친은 가난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강한 자존심과 저항정신의 소유자였고 어머니는 한번도 자세를 흐트린 적 없는 강한 신념과 인내심을 지닌 대표적인 한국의 어머니였다. 이러한 가정에서 태어난 선생은 선천적으로 강인한 체질과 대담 솔직한 성격이었으나 말동무나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다는 외로움과 가난이라는 굴레는 훗날 과묵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4세 때에 당시 열에 아홉은 사망하였다는 천연두를 앓았으나 천행으로 목숨을 건졌으며 9세가 되던 해에 비로소 가난과 양반들의 속박 밑에서 국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는 길만이 양반들로부터 모욕과 천대, 멸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사랑채를 서당으로 만들고 이생원(李生員)을 초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다. 16세 때에 당시(唐詩), 대학(大學), 과문(科文)을 익혀 17세(1892)가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매관매직으로 타락한 과거에 실망을 느꼈다. 이후 풍수, 관상에 관한 책과 손무자(孫武子), 오기자(吳起子), 육도(六韜), 삼략(三略) 등의 병서를 섭렵했다. 이듬해(1893) 동학에 입도하여 황해도 도유사(都有司)의 한사람으로 뽑혔으며 1894년 충북 보은에서 최시형 대수주(大首主)를 만나 팔봉도소접주(八峰都所接主)란 첩지를 받고 동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아래 동학군의 선봉장으로서 병사를 지휘하여 해주성을 공략, 탐관오리들을 추방하려 했으나 관군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결심 

1895년 동학의 기강이 점점 무너져 규율을 잃고 백성들의 원망을 사게 되자 선생은 연소의 몸으로 이를 수습하기 어려움을 깨닫고 신천군에 사는 진사 안태훈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였다. 당시 그의 아들 안중근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부친을 따라 동학군 토벌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의 만남은 매우 미묘한 것이었으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이곳에서 선생은 당시 명망이 높은 해서(海西) 거유(巨儒) 고능선(高能善)의 지도로 한학을 배웠다. 하루는 고선생이 아래와 같이 말씀하였다.

“예로부터 흥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고 망해 보지 않은 나라도 없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는 데는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 있고 더럽게 망하는 것이 있다. 의(義)로써 싸우다가 힘이 다하여 망하는 것은 거룩하게 망하는 것이요, 또 백성이 여러 패로 갈려서 한 편은 이 나라에 붙고 한 편은 저 나라에 붙어서 망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다. 이제 왜의 세력이 궐내까지 침입하여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일사보국(一死保國)하는 길밖에 없다.”

이에 선생도 비분에 못이겨 “망하는 나라를 망하지 않도록 붙들 도리는 없습니까?”라고 물으니 고 선생은 “청국이 갑오싸움에 진 원수를 반드시 갚으려 할 것이니 우리 중에 상당한 사람이 그 나라에 가서 국정을 조사하고 그 나라 인물과도 사귀어 두었다가 뒷날 기회가 오거든 서로 응할 준비를 하여 두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니 선생도 이에 동감을 표시하고 청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이리하여 선생은 하직 인사차 안진사에게 들렀다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같이 평양, 함흥, 갑산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임강, 환인을 거쳐 관전에서 임경업 장군의 비각을 보고 삼도구에 다다라 그곳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고 있던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선생은 김이언 의병진의 소속으로 1895년 동짓달 초에 고산리 승리의 여세를 몰아 강계(江界)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게 되자 할 수 없이 고향을 향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며 헌신할 것을 다짐한 선생은 해서 거유 고능선 선생의 말을 듣고 청국을 조사하기 위해 떠나기로 한다. 인사차 진사 안태훈(안중근의 아버지)에게 들른 선생은 그곳에서 만난 김형진과 함께 길을 떠났다가 의병장 김이언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선생의 사진(왼쪽)과 임시정부 주석 시절에 선생이 서명한 태극기(오른쪽)

  

 

일본 중위 쓰치다(土田讓亮)를 국모시해죄로 처단하다 

 

1895년 일제가 궁궐을 침입하여 국모를 시해한 을미사변 이후로 한민족의 분노는 전국적인 의병항쟁으로 분출되었고, 을미사변에 뒤이은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으로 의병항쟁은 더욱 거세게 불타 오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은 한반도를 둘러싼 정국의 변화를 관망하기로 하고 안악으로 되돌아 오던 중에 1896년 2월에 치하포 주막에서 변복한 일본인 쓰치다(土田讓亮)을 만나게 되었다. 선생은 보통 무역이나 장사를 하는 일본인 같으면 이렇게 변복하고 다닐 까닭이 없으니 이는 필시 국모를 시해한 삼포오루(三浦梧樓) 놈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의 일당일 것이요, 설사 이도 저도 아니면 우리 국가 민족에 독균임이 분명하니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국가의 수치를 씻어 보리라 결심하였다. 선생은 그가 차고 있던 칼을 빼앗아 그를 찔러 죽이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놈을 죽였노라’라는 내용의 글과 함께 ‘해주백운방기동 김창수(海州白雲坊基洞 金昌洙)’라는 서명까지 한 후에 이 포고문을 길가에 붙이고 유유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3개월 후(1896. 5. 11) 철퇴와 철편을 든 수십 명이 선생의 집에 난입하여 ‘내부훈령등인(內部訓令等因)’이라는 체포장을 내어 보이고 선생을 쇠사슬로 포박 후 해주옥에 가두었다. 선생은 동년 7월에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어 경무관 김윤정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선생은 방청을 감시하는 일인 경관 도변(渡邊)에게 “소위 만국공법 어느 조문에 통상화친하는 조약을 맺고서 그 나라 임금이나 황후를 죽이라고 하였더냐, 이 개 같은 왜놈아 너희는 어찌하여 감히 우리 국모 폐하를 살해하였느냐 내가 살아서는 이 몸을 가지고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맹세코 너희 임금을 죽이고 너희 왜놈들을 씨도 없이 다 없애서 우리나라의 치욕을 씻고야 말것이다”하고 소리 높여 꾸짖자 도변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김 경무관은 사건이 중대하다고 판단하고 감리사 이재정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케 하여 감리사가 심문을 개시코자 함에 선생은 먼저 그를 향해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나 김창수는 산촌의 일개 천생이나 국모께옵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서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아직 우리 사람으로서 왜왕을 죽여 국모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거늘, 이제 보니 당신네가 몽백(국상으로 백립을 쓰고 소복을 입었다는 뜻)을 하였으니 춘추대의에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는 몽백을 아니 한다는 귀절을 잊어버리고 한갓 부귀영화와 총록(임금님의 총애와 봉급)을 도적질 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요?”

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의 모습

1942년 중경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측되는 선생의 모습

 

 

그러자 감리사, 경무관, 기타 청상에 있는 관원들이 말을 듣는 기색을 살피건대 모두 낯이 붉어지고 고개가 수그러졌다. 이때 감리사는 선생에게 하소연 하듯 “창수(昌洙)가 지금 하는 말을 들으니 그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반면에 황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비길데 없소이다. 그러나 상부의 명령대로 심문하여 올려야 하겠으니 사실을 상세히 공술해 주시오.”하고 경어를 쓰니 옥 사정들의 대우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선생은 옥중에 있으면서 중국에서 발간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탐독하여 신학문에 눈을 떠 서양이란 무엇이며 세계형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아는 동시에 선생 자신과 우리나라에 대한 비판도 하게 되었다.

 

 

사형 직전 고종의 특사로 형집행이 정지되다

 

사형은 면하였지만 석방은 되지 않자, 선생은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는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들어가 법명 원종으로 출가하게 된다. 사진은 마곡사의 모습

사형은 면하였지만 석방은 되지 않자, 선생은 탈옥을 감행한다. 그리고는 충남 공주의 마곡사에 들어가 법명 원종으로 출가하게 된다. 사진은 마곡사의 모습

 

선생은 1897년 7월 사형을 언도 받고 동년 8월 26일 사형집행이 확정되었으나 광무황제의 특사로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짐에 따라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선생이 사형을 면하고 살아 난 데에는 두 번의 아슬아슬한 일이 있었다. 법무대신이 선생의 이름과 함께 사형죄인 명부를 가지고 입궐하여 황제의 칙재를 받았다. 황제께서는 다 재가를 하였는데 그 때문에 입직하였던 승지 중의 하나가 선생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서 이미 재가된 안건을 다시 가지고 나아가 임금께 보인 즉 황제께서는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 직전에 목숨을 건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승지의 눈에 ‘국모보수’라는 네 글자가 아니 띄었더라면 예정대로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전화가 인천에 가설되고 감리서에 개통된 것이 사흘 전이었다고 한다. 만일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 개통이 늦게 되었던들 황제의 명령이 인천에 도착하기 전에 벌써 사형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광무황제의 특지로 사형은 면하였으나 일제의 눈치 때문에 석방이 되지 않자 선생은 왜놈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는 탈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1898년 3월 9일 밤 탈옥하여 수원, 목포를 거쳐 함평에 도착, 그곳에서 15일간 묵었다. 그리고 보성, 화순, 순창, 담양을 거쳐 올라와 충남 마곡사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모든 세상의 잡념이 식은 재와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 출가(법명: 원종(圓宗)하게 되었던 것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예불법이며 천수경, 심경을 외우고 보각서장을 배웠다. 다음 해에 평양의 영천암의 주지가 되었지만 출가생활은 은신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므로 선생의 본색이 들어나 반년도 못되어 환속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진력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선생은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고 1900년 다시 방랑길에 올라 강화에서 김두래(金斗來)란 이름으로 바꾸고 생활하였다. 그 뒤 김창수라는 본명으로 행세하기가 곤란하여 이름을 거북 구(龜)자 외자로 하고 자를 연상(蓮上), 호를 연하(蓮下)라고 고쳐 지었다. 1901년 12월 부친께서 돌아가신 후 숙부 준영을 도와 농사일을 하며 지내다 교육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장연읍으로 이사하여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오순형과 함께 아동교육에 힘썼다.

 

선생이 장연에서 교육사업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 국내사정은 서구 열강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으로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제는 1904년 러일전쟁을 야기시킨 후 ‘한일의정서’, ‘한일협정서’ 등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상의 자주권을 박탈하는 등 침략의도를 드러냈으며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이 <황성신문>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하여 알려지게 되자 선생은 진남포 예수교 교회 청년회의 총무자격으로 서울 상동교회에서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석하여 이준, 이동녕 등과 함께 을사조약 폐기를 상소하는 등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교편 생활 시절의 선생(맨 뒷줄 오른쪽 첫 번째)의 모습. 해서 교육총회 학무총감 재임 시 광진학교에서 촬영한 것이다

 

 

 

상소투쟁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한 선생은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청소년의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황해도로 내려와 문화권 초리면의 서명의숙과 안악의 양산학교에서 교원을 지냈으며 최광옥이 세운 면학회 사범강습소 강사, 재령의 보강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여 교육 구국운동의 일선에서 계몽운동에 몰두하였다. 또한 1908년 최광옥과 함께 해서교육총회를 조직하여 학무총감에 추대되기도 하였다.

 

 

미천한 백정(白丁)의 ‘백’과 범부(凡夫)의 ‘범’을 따서 호를 삼다

1908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맹렬한 구국운동을 전개하던 중 1910년 국권이 침탈당하자 신민회의 황해도 간부로 서울 양기탁의 집에서 이동녕, 안창호, 이시영, 안태국 등과 함께 비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일제가 서울에 총독부를 두었으니 우리도 서울에다 도독부를 두고 각도에 총감이라는 대표를 두어서 국맥을 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하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세워 무관학교를 창설하여 광복전쟁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하고 각도 대표를 평안남도에 안태국, 평안북도에 이승훈, 강원도에 주진수, 경기도에 양기탁, 황해도에 선생을 선정하였다. 대표들은 각각 맡은 지방으로 돌아가서 황해, 평남, 평북은 각 15만원, 강원은 10만원, 경기는 20만원을 15일 이내로 준비하기로 결정하였다. 안약으로 돌아온 선생은 기부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1911년 1월 5일 일제는 소위 보안법을 적용하여 신민회원들을 일망타진하게 됨에 따라 선생도 일경에 피체되어 서울 경부총감부로 압송되어 2년 형을 언도 받았으며 수감 중에 안명근 사건에도 관련되었다고 하여 15년 형이 병과되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옥중에서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바꾸었다. 이름을 고친 것은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한다는 뜻이고 백범이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미천하고 무식한 백정(白丁)의 백(白)과 범부(凡夫)의 범(凡)자를 따서 호를 삼은 것으로 천한 백정과 무식한 범부까지 전부가 적어도 선생 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는 뜻으로 우리동포의 애국심과 지식의 정도를 그만큼 높이지 아니하고는 완전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망명길에 올라 본격적으로 뛰어든 임시정부 활동

1919년 3월 1일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되찾기 위하여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선생은 국내에서는 활동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재목상과 좁쌀 장사로 가장, 사리원, 신의주를 거쳐 중국 안동에 도착하여 영국 국적인 이륭양행 배에 몸을 싣고 4일만에(1919. 4. 13) 상해 포동나루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하자 마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던 중 내무총장인 안창호를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하자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나이를 고려하여 경무국장에 임명하였다. 경무국장은 농공상국, 지방국, 비서국 등과 함께 내무총장의 보좌기구로써 소관업무는 경찰업무와 도서출판, 저작권 그리고 위생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또한 왜의 정탐활동을 방지하고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침투해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업무도 병행하였다. 같은 해 선생은 서병호, 안정근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이사에 피선되어 활약하였으며 1920년 11월 9일에는 상해 대한인거류민단 의원에 피선되기도 하였다.

 

 

상해임시정부 경부국장 시절의 가족사진(1919~1922) 가운데가 맏아들 김인이며, 오른쪽이 부인 최준례 여사이다

상해임시정부 경부국장 시절의 가족사진(1919~1922) 가운데가 맏아들 김인이며, 오른쪽이 부인 최준례 여사이다

 

 

 

1922년 7월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주비회의 알력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독립자금 횡령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선생은 안창호, 김덕진, 신익희, 차이석 등 여러 지사들과 동년 7월 시사책진회를 조직하고 최선의 방책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의 위기를 타개코자 노력하였다. 또한 1922년 10월에는 조상섭, 김인전, 손정도, 양기하 등과 회합하여 조국독립에 필요한 실력준비로 군인양성 및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노병회(勞兵會)를 조직할 것을 협의하고 발기인이 되어 동월 28일 한국노병회 발기총회를 열어 이를 조직하고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한국노병회는 한국독립의 쟁취를 위하여 향후 10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勞兵)을 양성하고 100만원 이상의 전쟁비용을 조성하여 독립군과 전쟁비용이 목적한 수준에 달하면 독립전쟁을 개시하되, 그 전이라도 국가 또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개시한 때에는 이에 참가하여 출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였다.

 

1923년 5월 국민대표회의 윤해, 신숙 등 소수인이 대표회의 이름을 팔아 임시의정원의 직권과 체면을 손상케 하니 동년 6월 6일 선생은 내무총장으로부터 내무부령 제1호를 발포하여 국민대표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그 내용은 “소위 만민대표회에서 6월 2일 연호 및 국호를 정한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모반이다. 2, 3차 귀순을 권유하였으나 일향 고집하여 이와 같이 헌법을 제정함은 조국의 존엄한 권위를 침범함이다. 본 내무총장은 2천만 민족이 공동 위탁한 치안의 책임과 4천년 유업의 신기를 보유할 직권으로서 소수인의 집회 등 6월 2일 이래 일체의 불법행위를 엄금하고 대표회 자체의 즉시 해산을 명한다”라 하였다.

 

동년 12월 26일에는 상해교민단 의용대의 고문에 추대되었으며 1924년 4월 9일 국무총리 노백린이 사임하자 내무총장과 국무총리 대리를 겸임하였다가 동월 24일 이동녕이 국무총리로 취임함에 따라 동년 6월 2일에는 노동국총판을 겸임하였다. 1926년 3월 20일 한국노병회 이사장직을 사임하고 동년 12월 14일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게 되자 윤기섭, 오영선, 이규홍으로 신 내각을 조직한 후 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여 국무령제를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정하여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 후 임시 정부는 일본의 극심한 탄압, 젊은층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에의 심취, 자금난 등으로 시련을 겪게 된다.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여 이봉창 의사 등을 파견하다

1928년 3월 25일 선생은 이동녕, 안창호, 송병조, 차이석, 조완구, 조소앙, 엄항섭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으며 1929년 8월 9일 상해교민단장에 피선되었다. 당시 침체에 빠져 있는 임시정부와 한국독립운동계의 활성화를 위해,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서는 날로 팽창되어가고 있는 일제에 대항해서 싸울만한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인물난과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는 임시정부로써는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특무공작이라고 결정하였다. 이에 한 몸을 나라에 바칠 애국투사를 선정하여 적의 주요 인물을 제거하거나 중요기관을 파괴하고자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특무공작에 필요한 모든 권한을 국무위원으로서 재무장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선생에게 위임하였다.

 

 

선생(앞 중앙)과 한인애국단원 사진(1932년으로 추정)

선생(앞 중앙)과 한인애국단원 사진(1932년으로 추정) 

 

 

그리하여 1932년 1월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이봉창 의사를 동경에 파견하여 동경 앵전문 밖에서 일왕을 저격하게 하여 국내외를 놀라게 하였으며 동년 4월 29일에는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의거를 일으켜 일군 사령관 백천의칙(白川義則) 대장 등 다수의 장성 및 고관들을 폭살케 하여 세계를 경악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다.

 

 

장개석 총통을 만나 한인 무관양성소 특설을 협의하다

상해 홍구공원 의거 이후 미국인 피치의 집에 은신해 있던 선생은 일제의 집요한 추적 때문에 가흥의 저보성 집으로 피신하여 광동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던 중 1933년에 장개석 주석의 면회요청을 받고 안공근, 엄항섭을 대동하고 남경으로 가서 중앙군관학교 구내에 있는 공관에서 장개석을 면회하였다. 이 역사적인 회담에서 ①한국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적극 지원할 것 ② 만주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지원 및 교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것 ③중국군관학교에서 한인사관을 양성할 것 등의 조약을 맺고 낙양군관학교에 한인무관양성소를 특설하여 한인교관으로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역전의 명장들을 교관으로 초빙, 한인사관 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도 중, 일 간의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되어 제1기생 25명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당시 독립운동 이념과 노선의 대립으로 대일전선통일동맹(민족주의와 공산주의 합작)이란 단체가 구성되어 국무위원 7인 중 5인이 이에 참가하게 되자 임시정부 운영은 매우 곤란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1935년 11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등 6인이 강소성 가흥에서 의정원 비상회의를 열고 국무위원을 보선하니, 선생은 다시 국무위원에 피선되어 임시정부운영에 심혈을 기울이는 동시에 이듬해(1936) 이동녕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일군의 추격을 피해 임시정부를 진강(鎭江)으로 옮겼다가 1937년에 다시 장사로 이동하였다. 1938년 5월 장사 남목청에서 민족주의 3당 통일회를 개최하고 3당 대표자가 회의를 하던 중 간소배의 사주를 받은 흉한 이운한의 저격을 받아 현익철은 즉사하고 선생은 중상을 입어 생명이 위험하였으나 1개월 동안 입원하여 천우신조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1939년 장사가 위험해지자 광주(廣州)로 갔다가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으로 옮긴 뒤 선생은 임시정부 주석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임시정부가 피난 중이던 시기 가흥에서 촬영한 사진. 중앙의 선생을 중심으로 송병조,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등과 그 부인들이 보이고, 맨 앞줄의 어린이들은 엄항섭의 자녀들이다

임시정부가 피난 중이던 시기 가흥에서 촬영한 사진. 중앙의 선생을 중심으로 송병조, 이동녕, 이시영, 조성환,
엄항섭, 조완구, 차리석 등과 그 부인들이 보이고, 맨 앞줄의 어린이들은 엄항섭의 자녀들이다

 

 

광복군의 국내정진 작전 중 일왕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식을 거행하여 직할 군대를 조직하였으며 임시정부는 기강으로 옮긴 뒤 5월 전당대회를 개최,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그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국사특파단을 섬서성 서안에 상주케 하여 무장부대 편성에 주력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임시정부를 기강에서 다시 중경으로 옮긴 뒤 다시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11월에 중국정부는 한국광복군의 일체 활동을 승인하고 무기와 일체 경비 등을 지원해 주기로 하는 대신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지휘를 받아야 한다는 요지의 ‘한국광복군9개행동준승’을 체결하고, 이어 12월 9일에는 임시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본격적으로 대일항전에 진력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에 임명되었으며 한, 미 간 군사의 합의를 이끌어 이른바 광복군의 국내정진작전을 위한 곤명 주재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군전략 특수공작대) 본부와 ‘한미군사합작 합의사항’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섬서성 서안과 안휘성 부양에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는 한편 미국의 원조로서 본토상륙을 위한 군사기술훈련소를 강소성 정부가 있는 입황(立煌)에 설치하고 특수훈련에 들어갔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함에 따라 이 피나는 노력도 빛을 보지 못하였다. 이때 선생은 “아 왜적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었다기 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라고 [백범일지]에서 술회하고 있다. 자력으로 나라를 찾지 못하였다는 비통한 심정을 잘 표현한 내용이다.

 

동년 11월 23일 선생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6년 2월 비상국무회의가 조직되자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47년 1월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민의회로 개편되어 부주석에 취임하였으며 5월 제2차 미, 소 공위가 열리자 반탁투쟁위원회의 활동을 이승만과 함께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 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 수립안을 지지하였다.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에 다녀오는 등 민족통일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蔣)에서 안두희의 흉탄에 의거 서거하였다. 선생의 유해는 온 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11.3, 맨 앞줄 가운데가 선생)과 선생의 영결식 장면(1949.7.5, 서울운동장)

임시정부 환국기념 사진(1945.11.3, 맨 앞줄 가운데가 선생)과 선생의 영결식 장면(1949.7.5, 서울운동장)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약력

 

 

1908년 신민회 가입 활동
1919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5년까지 임시정부 국무령 역임
1930년 한인 애국단 조직, 의열 활동 지원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