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ce 2015. 05. 15

불로그에 올린 글이 부족하나마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한국의 인물

[편집국에서] 정도전과 ‘불씨잡변’ / 고명섭

지송나무 2015. 6. 13. 09:17

#1  [편집국에서] 정도전과 ‘불씨잡변’ / 고명섭



고명섭 오피니언부장

★... 1375년 전라도 회진으로 유배를 당한 정도전(1342~1398)은 겨울 어느 날 ‘도깨비에게 사과하는 글’을 썼다.

사방이 을씨년스러운 날 방안에서 홀로 잠을 청하려는데 도깨비 떼가 들이닥쳐 울고 웃고 떠들어댔다. “왜 여기까지 와서 날 괴롭히느냐?” 방 주인이 소리치자 도깨비가 답했다. “인적 없는 이곳은 도깨비가 사는 곳이다. 그대는 사람들 사이에 끼지 못하고 멀리 쫓겨났는데, 우리가 반겨 놀아주니 고마워해야 할 것 아닌가?”

고려 말 권신들의 발호에 할퀴인 젊은 유학자의 울분이 담긴 글이다.

정도전은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8년이나 더 유배·유랑 생활을 했다. 나라를 떠도는 동안 정도전은 왕도정치 이상을 실현할 새 나라의 설계도를 그렸다.

가슴속에서 혁명의 꿈이 자랐다. 유랑 생활 말기에 정도전은 함흥의 이성계를 만나 잘 훈련된 군대를 보았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혁명의 두뇌가 심장을 만난 셈이었다.

1392년 이성계가 정권을 잡음으로써 유랑 지식인의 꿈은 현실이 됐다.새 나라 정치권력의 정수리가 이성계였다면, 이념투쟁의 선봉장은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불교라는 구체제 지배이데올로기에 맞서는 주자학 혁명사상의 수호자를 자임했다.

일찍이 선배 정몽주가 <능엄경>을 읽는다는 소식을 듣고 “이단이 날로 성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며 서둘러 버리라고 을러대던 사람이었다. 그 이념 전사가 벼려낸 ‘비판의 무기’가 불교논박서 <불씨잡변>이다. 조선의 정치적 기틀이 잡혔으니 이제 불교에 일격을 가하여 숨통을 끊어버리겠다고 작심하고 쓴 생애 마지막 저작이다.

정도전은 이 책에서 사치와 방탕에 빠진 불교를 규탄했다. 불당을 꾸미느라 ‘평민 열 집 재산’을 하루아침에 탕진하는 승려들을 “천지의 커다란 좀”이라고 몰아붙였다.

<불씨잡변>은 백성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불교를 그 뿌리까지 파 들어가 쳐내겠다는 근절의 의지로 불타는 책이다. 정도전은 불교의 윤회설·인과응보설을 혹세무민의 거짓 주장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허(虛)와 공(空)에 빠진 삿된 이론이 부자·군신·부부의 인륜을 없애고 사람을 짐승으로 만든다고 분개한다. 정도전은 “난신적자를 주살하는” 심정으로 <불씨잡변>을 쓰고 난 뒤 후배 권근에게 보여주었다. “유학자라면 누구나 불교를 적으로 삼아 힘을 다해 싸워 쳐부수어야 할 것이오.”

정도전의 바람대로 조선은 척불숭유를 국가정책으로 밀어붙였다.

불교는 산중 암자로 쫓겨 들어갔고, 온 나라가 성리학 일색이 되었다.


정도전과 후예들의 집요한 이념전쟁 끝에 불교의 심원한 해방의 사유는 조선의 정신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영원불변의 실체적 자아가 없다는 ‘무아’, 만사가 서로 의존하여 일어난다는 ‘연기’, 모든 존재의 실상이 공(空)임을 밝히는 ‘중관’, 일체 현상이 마음의 작용을 따른다는 ‘유식’, 너와 나와 온 세상이 한마음이라는 ‘일심’, 만물이 불성의 발현으로 장엄한 조화를 이룬다는 ‘화엄’…, 불교의 이런 사상들이 유학의 가르침과 만나 공론장에서 경합하고 치열한 논전을 주고받았다면 조선의 정신이 뒷날 그렇게 옹졸한 모양으로 굳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을 세운 성리학의 이념은 쪼그라들어 권력싸움의 수단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성리학의 자폐적 질서는 바깥에서 불어오는 평등과 자유의 새바람을 능동적으로 맞아들일 기회를 스스로 봉쇄했다.

서학과 천주학은 배척당하고 박해받았다. 성리학 유일지배 500년이 이 땅에 정신의 협량을 유산으로 남겼음을 부정할 수 없다. 편협성이 옹이처럼 박혀 떠날 줄 모른다. 이견을 이단으로 모는 숨막히는 완고함이 한반도의 남과 북에서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불씨잡변>은 여전히 상연 중인 우울한 비극의 탄생을 알린 책이다. 이제 그만 이 비극을 끝낼 때다.고명섭 오피니언부장 michael@hani.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상업적 등)] 
▒☞[출처]한겨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