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떨어진 책과 무뚝뚝한 돌이 있는 서재'라는 뜻으로
맞으니 자유분방하다고 표현한다." 추사의 글씨에 대하여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묘를 참으로 깨달은 서예가란 법도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에 구속받지 않는 법이다. 글자의 획이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하여, 종횡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있어 울림이 강하고 추사체의 파격적인 아름다움이 잘 드러난다.
'판전'은 추사가 세상을 떠나기 3일 전에 쓴 대자 현판으로 고졸한 가운데 무심의 경지를
따지지 않는다는 추사체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은 천재성의 발로가
아니라 판서를 지낸 아버지 김노경과 그 선조들, 그리고 청나라 고증학이 합해져서 가능해진 것이다. 여러차례 바뀌었다.
(스물네 살에 연경을 다녀온 후)에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골기가 적었다는 흠이 있었다. ... 만년에 제주도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게 되니 神이 오는 듯 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계기가 된 시기는 제주도 유배생활. 완당은 55세때인 1840년 10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에 하는 형벌)되는 유배의 형을 받게 된다. 서가 창암 이삼만을 만난 얘기다.
원교의 글씨를 본뜬 창암의 글씨는 속칭 유수체라 하여 그 유연성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그 흐름이 도도하지 못하여 그래서 꾸밈없고, 스스럼없는 천진스러움의 진국을
이삼만의 '운학유천'. 시골서생의 순수함이 있다.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원교글씨. 만든 붓 등 최고의 붓과 종이로 글씨를 쓴 '스타일리스트'였기 때문에 창암의 개꼬리를 훑어내어 만든 붓으로 쓴 글씨를 보고 일순 당황했을 성 싶다. 노인이었다.
창암의 글씨를 보면서 완당은 한동안 말이 이렇게 말했다 한다.
"저사람이 글씨는 잘 아는지 모르지만 조선 붓의 헤지는 멋과 조선 종이의 스미는 절마당에서 대웅전을 바라보니 '大雄寶殿' 네글자가 원교의 글씨였다. 완당은 초의선사를 만난 자리에서
글씨를 안다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것을 걸고 있는가!"하고 紙筆墨을 가져오게 해 힘지고 윤기나며 멋스러운 글씨로 대웅보전 네글자를 써주며 나무에 새겨 걸라고 했다.
완당은 붓을 잡은 참에 '무량수각'이라는 현판 횡액을 하나 더 써주었다.
써준 것이다. 획이 기름지고 윤기가 난다. 가늘면서 힘과 멋이 함께 들어있다. 제주도 유배시절 글씨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원교의 글씨를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 동안 누렸던 특권층의 삶과는 거리가 먼 척박하고 고독한 유배생활 8년3개월을 보내면서 예스러운 멋과 회화적 조형미를 동시에 보여주는 '入古出新'의 세계를 갖추게 된다.
더 이상 어깨가 올라가는 일도 없어지며 추사체의 면모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다시 들러 떼어내리게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을 다시 걸게 했으며, 전주에 들러 창암 이삼만을 찾았으나 그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개성미, 이른 바 괴(怪)가 완연히 드러남을 실감할 수 있다.
글자의 구성에서 디자인적인 변형이 대담해지고 서체를 넘나들며 자유로운 조형미를 보여준다.
붓끝에는 힘이 실리고, 획에 금석기가 있으며 필세에 생동감이 있는 등 추사체의 참 멋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유명한 단계벼루,차 끓이는 대나무 화로, 그리고 시를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뜻하는 것으로
이 현판 글씨는 글자의 구성미,즉 디자인은 대단히 멋스럽고 획의 흐름에서 리듬조차 감지된다 라는 작품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작은 창으로 밝은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랫동안 앉아 있게 하네' 라는 뜻이다.
이 현판글씨는 구성미가 아주 뛰어나다.그리고 글자에 유머와 파격을 주어 추사체의 '괴'가 곳곳에 드러나 있는데, 앉을 좌(坐)를 흙 토(土)위에 네모 두 개를 그려 마치 땅에 앉은 궁둥이처럼 쓴 데서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그것도 한쪽 궁둥이를 슬쩍 들고 비스듬히 앉은 듯 네모의 양감이 다르다.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결국 완당이 살아온 인생의 종착점이 어디였는가를 말해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생강과 나물 大烹豆腐瓜董菜 아들딸과 손자 高會夫妻兒女孫 평범성에로 회귀하는 모습을
추사 김정희는 1786년(정조10년) 오늘날추사고택이라고 부르는 경주 김씨 월성위 집안의 향저에서 태어났다. 10년간의 학예 연찬기 20년간 중년의 활동기 8년간의 만년기. 여러 가지 책을 널리 읽었으며, 금석문과 그림과 역사에 깊이 통달했고, 초서 해서 전서 예서에서 참다운 경지를 신기하게 깨달았다. ... 나기도 했으니 그를 송나라의 소동파에 비교하기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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