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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年 시진핑의 토굴생활 7년이 낳은 '實事求是(실사구시·사실을 통해 진리를 구함)'

지송나무 2015. 6. 1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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靑年 시진핑의 토굴생활 7년이 낳은 '實事求是(실사구시·사실을 통해 진리를 구함)'

[1] 文革때 쫓겨내려간 량자허 르포

량자허에 下放당한 12명 중 끝까지 남은 건 시진핑뿐

-아버지 실각 이후 절치부심
16세에 황토 高原의 땅으로
벼룩, 거친 잡곡, 고된 작업, 思想… '4대 관문'과 싸우며 大國경영 꿈

쌀밥만 먹던 '베이징 도련님'… 힘겨운 토굴 생활 견디며 자신감·인내의 정신 키워
대외 정책에 적극 반영

 
1972년 산시성 옌촨현으로 하방했을 때의 시진핑. /신화망
지난 25일 시진핑(習近平·61) 중국 국가주석이 1969년부터 7년간 머물렀던 산시(陝西)성 옌촨현 량자허(梁家河)촌의 야오둥(窯洞·토굴) 입구. 평일 낮 황토 협곡에 파묻힌 산골인데도 고급 승용차가 줄지어 도착했다. 문화대혁명 시절 시진핑 주석이 하방(下放) 생활을 했던 발자취를 되짚어 보려는 방문객의 행렬이다.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의 장남인 시 주석은 '베이징 도련님'으로 자랐지만, 아버지가 실각하면서 16세 때 황토 고원의 토굴로 쫓겨갔다. 한 방문객은 "베이징의 고관 자제가 산골 토굴에서 7년을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시 주석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현재 시 주석의 토굴을 새로 단장하는 량자허의 공사는 마무리 단계다. 40년 전에 없었던 전깃불이 들어왔고, 시 주석 어록과 당시 사진을 담은 액자가 한쪽 벽면을 채웠다. '시진핑 하방 박물관'을 조성하려는 듯 바로 옆 토굴에는 40년 전 쓰던 농기구와 호롱불, 물통, 책상 등이 전시됐다. 촌민위원회 등 공공건물과 마을 주택은 신·증축 공사가 한창이다. 인구 400여명의 이 농촌 마을에는 100여명 이상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식당도 들어섰다.

산시성 정부는 시진핑의 주석 취임이 유력했던 2009년부터 '량자허 개조' 사업에 들어갔다. 마을 인근에는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량자허 톨게이트'가 생길 것이라고도 한다.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황톳길은 이미 아스팔트가 깔렸다. 량자허를 '시진핑의 성지(聖地)'로 만들려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시진핑이 하방 생활을 버텨낸 토굴 안은 10㎡(3평) 남짓이다. 황토 산비탈을 파낸 흙벽에는 '나는 황토의 아들'이란 제목으로 시 주석이 중국 매체와 인터뷰했던 기사 내용이 걸려 있다. 당시 시 주석은 "량자허에서 벼룩과 음식, 고된 작업과 사상(思想)이라는 4대 관문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먼저 그는 벼룩과 사투를 벌였다. 여름철 량자허의 벼룩은 지독했다. 시 주석은 벼룩에게 물린 가려움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물집으로 부풀어 올랐다. 시 주석은 "2년쯤 지나니까 뭐가 물어도 달게 잘 수 있었다"고 밝혔다.

둘째는 음식이었다. 쌀밥만 먹던 '도련님' 시진핑에게 거친 잡곡은 넘기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배급받고는 비계를 날로 입에 넣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위 사진)1993년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을 다시 찾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을 주민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6세 때인 1969년부터 7년간 머물렀던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 토굴의 모습. 당시 아버지 시중쉰의 실각으로 하방한 그는 훗날“이곳에서 실사구시와 인내를 배웠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위 사진)1993년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을 다시 찾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을 주민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6세 때인 1969년부터 7년간 머물렀던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 토굴의 모습. 당시 아버지 시중쉰의 실각으로 하방한 그는 훗날“이곳에서 실사구시와 인내를 배웠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바이두·안용현 특파원
날마다 쏟아지는 고된 작업량이 셋째 관문이었다. 시 주석은 덩치가 컸지만, 이전까지 노동을 해본 적이 없어 무거운 짐을 동네 아주머니보다도 나르지 못했다. 그러나 2년 뒤에는 밀 50㎏을 지고 4㎞를 가뿐하게 걸어 다녔다고 한다. 특히 시 주석은 "량자허에서 사상의 관문을 통과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인내(忍耐)를 배웠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집권하고서 당 간부들에게 '군중 노선'을 강조하고 있다. 군중 입장에서 생각하고, 일하라는 것이다. 마을 주민 한(韓)모씨는 "시 주석은 량자허 경험 덕분에 직접 공산 혁명을 했던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만큼 중국 민중의 상황을 잘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시 주석이 량자허에서 얻은 '자신감'은 중국의 대외 정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까지 덩샤오핑의 외교 전략대로 '도광양회(韜光養晦·숨어서 힘을 기른다)'에 충실했다. 하지만 시 주석은 지난해 말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등 주권·영토와 관련된 문제라면 미국·일본과도 충돌을 피하지 않는 모양새다.

한반도 전략도 마찬가지다. 과거 중국은 북한과의 전통적 관계를 중시하며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작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공개적으로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량자허 토굴에는 시 주석의 공산당 입당 허가서와 량자허 생산대대(노동 단위) 지부 서기 임명장도 붙어 있다.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
시 주석은 하방 초기에 토굴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베이징으로 도망간 적이 있다. 하지만 "대중을 의지하는 사람만 앞날이 밝다"는 당 간부 출신 이모부의 꾸지람을 듣고 량자허로 돌아왔다. 같이 하방당한 12명 가운데 끝까지 남은 건 시 주석뿐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반당(反黨) 분자로 몰렸지만, 공산당의 문을 10번이나 두드려 1974년 2월 입당했다. 그해 12월에는 량자허 생산대대 지부의 책임자가 됐다. 서기 시절 시 주석은 새 연료로 메탄가스를 보급하기 위해 공사를 하다가 똥물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시 주석은 1975년 옌촨현에 배당된 칭화대학교 입학 허가서 2장 가운데 한 장을 거머쥐었다. 이후 시 주석은 아버지가 복권되면서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시 주석은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당서기 시절이던 1992년과 이듬해인 1993년 량자허를 다시 찾아와 주민들과 재회했다. 70대 마을 주민은 "시 주석이 여기 경험을 잊지 않고 중국을 다스리기 바란다"고 말했다.


☞하방(下放)

중국에서 당(黨)·정부·군 간부의 관료주의를 방지하고 지식인들의 사상을 다진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일정 기간 낙후된 산골 벽지나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했던 운동을 말한다. 1949년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10년 새 중앙 간부들에게 지나친 관료화 경향이 나타난다고 느낀 마오쩌둥(毛澤東)이 1957년 도입했다. 1976년 문화혁명 종결과 함께 사실상 막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