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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산시성 옌촨현으로 하방했을 때의 시진핑. /신화망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의 장남인 시 주석은 '베이징 도련님'으로 자랐지만, 아버지가 실각하면서 16세 때 황토 고원의 토굴로 쫓겨갔다. 한 방문객은 "베이징의 고관 자제가 산골 토굴에서 7년을 버틴 것도 대단한 일"이라며 "시 주석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현재 시 주석의 토굴을 새로 단장하는 량자허의 공사는 마무리 단계다. 40년 전에 없었던 전깃불이 들어왔고, 시 주석 어록과 당시 사진을 담은 액자가 한쪽 벽면을 채웠다. '시진핑 하방 박물관'을 조성하려는 듯 바로 옆 토굴에는 40년 전 쓰던 농기구와 호롱불, 물통, 책상 등이 전시됐다. 촌민위원회 등 공공건물과 마을 주택은 신·증축 공사가 한창이다. 인구 400여명의 이 농촌 마을에는 100여명 이상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식당도 들어섰다.
산시성 정부는 시진핑의 주석 취임이 유력했던 2009년부터 '량자허 개조' 사업에 들어갔다. 마을 인근에는 고속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량자허 톨게이트'가 생길 것이라고도 한다. 국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황톳길은 이미 아스팔트가 깔렸다. 량자허를 '시진핑의 성지(聖地)'로 만들려는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시진핑이 하방 생활을 버텨낸 토굴 안은 10㎡(3평) 남짓이다. 황토 산비탈을 파낸 흙벽에는 '나는 황토의 아들'이란 제목으로 시 주석이 중국 매체와 인터뷰했던 기사 내용이 걸려 있다. 당시 시 주석은 "량자허에서 벼룩과 음식, 고된 작업과 사상(思想)이라는 4대 관문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먼저 그는 벼룩과 사투를 벌였다. 여름철 량자허의 벼룩은 지독했다. 시 주석은 벼룩에게 물린 가려움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온몸이 물집으로 부풀어 올랐다. 시 주석은 "2년쯤 지나니까 뭐가 물어도 달게 잘 수 있었다"고 밝혔다.
둘째는 음식이었다. 쌀밥만 먹던 '도련님' 시진핑에게 거친 잡곡은 넘기기 어려웠다. 오랜만에 돼지고기를 배급받고는 비계를 날로 입에 넣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 (위 사진)1993년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을 다시 찾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마을 주민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아래 사진)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16세 때인 1969년부터 7년간 머물렀던 산시성 옌촨현 량자허촌 토굴의 모습. 당시 아버지 시중쉰의 실각으로 하방한 그는 훗날“이곳에서 실사구시와 인내를 배웠고, 자신감을 얻었다”고 회고했다. /바이두·안용현 특파원
시 주석이 량자허에서 얻은 '자신감'은 중국의 대외 정책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중국은 후진타오(胡錦濤) 주석 시절까지 덩샤오핑의 외교 전략대로 '도광양회(韜光養晦·숨어서 힘을 기른다)'에 충실했다. 하지만 시 주석은 지난해 말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등 주권·영토와 관련된 문제라면 미국·일본과도 충돌을 피하지 않는 모양새다.
한반도 전략도 마찬가지다. 과거 중국은 북한과의 전통적 관계를 중시하며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정책을 폈다. 하지만 작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중국은 공개적으로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량자허 토굴에는 시 주석의 공산당 입당 허가서와 량자허 생산대대(노동 단위) 지부 서기 임명장도 붙어 있다.
시 주석은 1975년 옌촨현에 배당된 칭화대학교 입학 허가서 2장 가운데 한 장을 거머쥐었다. 이후 시 주석은 아버지가 복권되면서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다.
시 주석은 푸젠성 푸저우(福州)시 당서기 시절이던 1992년과 이듬해인 1993년 량자허를 다시 찾아와 주민들과 재회했다. 70대 마을 주민은 "시 주석이 여기 경험을 잊지 않고 중국을 다스리기 바란다"고 말했다.
☞하방(下放)
중국에서 당(黨)·정부·군 간부의 관료주의를 방지하고 지식인들의 사상을 다진다는 명분으로 이들을 일정 기간 낙후된 산골 벽지나 공장으로 보내 노동에 종사하게 했던 운동을 말한다. 1949년 공산 정권이 수립되고 10년 새 중앙 간부들에게 지나친 관료화 경향이 나타난다고 느낀 마오쩌둥(毛澤東)이 1957년 도입했다. 1976년 문화혁명 종결과 함께 사실상 막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