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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외국의 인물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지송나무 2019. 8. 29. 14:19

아이스크림 장군 밴 플리트

 

애국심 투철했던 김종필 중령,기발한 아이디어로 중공군 잡아와

  •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중공군은 6.25 전쟁 기간 내내 한국군을 ‘먹잇감’ 정도로 봤다. 만만한 상대 정도가 아니라 때리면 아무 말 없이 맞고 도망치는 존재로 여겼다. 실제 여러 전투에서 채록한 한국군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군은 수저를 들고 밥을 먹다가도 “중공군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밥과 함께 모두를 내팽개치고 줄행랑을 치기에 바빴다고 한다.

    치욕스러운 이야기지만 사실이었다. 우리가 싸움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드는, 용기 없는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개인으로 보면 한국군은 중공군에 비해 밀리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도 없지 않았다. 단지 그들을 조직하고 훈련할 여유와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한국군의 방어 지역을 노리고 덤벼드는 경우가 많았다. 미군의 방어지역은 가능한 한 피했다. 강력한 공격력과 방어력을 모두 갖춘 미군에게 덤벼들면 피해가 막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과의 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국군의 방어지역은 따라서 중공군의 출현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내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2군단을 재창설하고, 당시 우리의 형편으로는 보유할 수 없었던 155㎜ 중화포로 무장을 하면서 현대화한 군단의 ‘격’을 갖춰가고 있던 1952년 5월에도 마찬가지였다. 중공군이 재창설 2군단의 전면에 모여든다는 정보가 날아들고 있었다.
    적진을 향해 퍼붓는 아군의 포격 장면.
    적진을 향해 퍼붓는 아군의 포격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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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정(敵情)을 확인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일은 적을 포로로 잡아들이는 것이었다. 전면에 중공군이 모이고 있다는 첩보에는 밴 플리트 사령관 또한 매우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특공작전을 벌이기로 했다. 각 부대의 요원들을 뽑아 특공훈련을 시킨 뒤 적진으로 침투시키기 위해서였다. 밴 플리트는 현장에 직접 찾아와 그런 특공훈련을 지켜보면서 각종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군단 예하의 6사단이 당시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기억나는 대목은 대대장 김종필 중령(전 국무총리)의 활약이었다. 그는 아이디어가 풍부했다. 단순한 군인이라기보다 문학적 감성이 퍽 발달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상상력 또한 발달했음인지, 다양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휘하의 장병들을 보내 중공군 포로 다수를 붙잡아 왔다. 당시 김종필 중령이 내게 준 인상은 애국심이 강했고, 매사에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업무에서의 충실도가 아주 높다는 느낌도 줬다.

    김종필 중령의 맹활약

    곧 각 사단은 전선 전면에서 적지 않은 중공군 포로를 생포했다. 우선 두드러졌던 특징은 그 포로들의 출신이 아주 다양하다는 점이었다. 소속이 각기 달랐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면에는 아주 많은 중공군이 집결했다는 얘기와 같았다. 나는 즉각 이 사실을 밴 플리트가 있던 미 8군 사령부에 보고했다.

    웬만한 미 사령관은 그런 보고에 즉각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좀 더 신중하게 적정을 파악한 뒤 행동에 나서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는 즉각 판단을 내렸다. 아주 단호한 내용이었다. 밴 플리트는 “즉각 포격을 개시하라. 사전에 적을 제압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탄약은 아끼지 마라. 필요하다면 제한 없이 포탄을 사용하라”고 말했다.

    흔쾌함이었다. 아무런 주저도 없었다. 공산주의 중공군을 상대하는 그의 일관된 태도였다. 그는 미군의 지휘관 중에서는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한국을 돕고, 나아가 공산주의 군대를 물리치는 일에서는 아주 적극적이었다. 밴 플리트의 그런 태도에 대해서는 미군의 반대가 적지 않았다.

    특히 밴 플리트의 명령에 따라 내가 군단 예하의 포병단장 메이요 대령을 불러 그 내용을 전하자, 그는 난색(難色)부터 표시하고 나왔다. 그는 포병으로서 오랫동안 생활한 노련한 장교였다. 미 포병학교인 포트 실에서 교관으로 오래 근무했던 까닭에 탄약 사용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정확하게 목표 지점과 대상을 측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포격하는 일은 규범에 맞지 않는다”면서 “더 관측을 벌인 뒤에 차분하게 포격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밴 플리트 사령관의 명령이다. 지시대로 이행하라”고 말했다.

    미군은 항상 그랬다. 자신의 의견을 들어 문제를 지적하다가도 역시 상관의 명령에는 복종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냥 겉으로만 명령을 이행하는 게 아니라 나설 때에는 최선을 다 하려고 했다. 그는 내가 다시 명령을 내리자 “옛 써~!”하면서 포격 태세를 취했다.

    오후 3시 무렵이었다. 군단 포병 7개 대대와 3개 사단 휘하 3개 포병대대가 일제히 적진을 향해 불을 뿜었다. 보병부대의 박격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군단이 늘어선 동서 약 20여㎞에서 동시에 강력한 포격이 벌어졌다. 이는 사흘 동안 이어졌다. 군단이 발사한 당시의 포탄은 모두 2만 여 발에 달했다.

    중공군의 반격은 없었다. 포격의 효과라고 나는 믿고 있다. 당시의 포격이 어떤 효과를 나타냈는지를 증명할 길은 없다. 단지 중공군은 당시 국군 2군단 전면에 새카맣게 모여든 뒤 공세를 벌이려 했다는 정황은 명확했고, 우리의 포격 뒤 중공군은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1년 여 뒤 이곳에서는 중공군의 최후 공세가 펼쳐진다. 전선의 북쪽이 적을 향해 불쑥 솟아올라 있는 ‘돌출부’를 이루고 있어서, 적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선 관리에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적은 이 ‘돌출부’를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이었고, 재창설한 2군단의 전면은 그런 중공군의 강력한 공세가 벌어지기에 가장 알맞은 장소였다.

    ‘밴 플리트 탄약량’의 탄생

    나는 포격을 끝낸 뒤 관측 초소로 갔다. 그곳에서 망원경을 들어 적진을 살폈다. 적의 참호는 거의 “뒤집어져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막심한 포격의 피해를 입었다. 아래에 있던 흙이 전부 나와 위를 덮고 있었다. 화약으로 인해 흙의 상당 부분은 흰색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나는 현대전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중화포의 위력을 새삼 실감했다. 적은 그렇게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나는 약 3개월 반 동안 재창설 2군단장을 맡았다. 군단을 현대화하기 위한 작업이 주를 이뤘으나, 중공군의 머리에 퍼부은 포격이 남겼던 인상은 매우 강렬했다. 전에도 중공군에게 밀리다가 부분적으로 승리를 이루기는 했으나, 국군이 현대화한 장비와 화력을 갖추고 본격적으로 중공군에게 위력적인 ‘한 방’을 먹인 사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용어는 이전에 소개했다. 미 8군 사령관에 부임한 밴 플리트가 탄약 재고량 등과는 상관없이 적진을 향해 아주 많은 탄약을 소모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용어다. 그 말이 만들어진 중요한 계기가 바로 2군단 전면의 중공군 포격이었다. 그 때 본격적으로 미 의회 등에서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의 1일 탄약 소모량이 지나치게 많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다.

    나중에 다시 밴 플리트 사령관을 만났을 때 인사부터 전했다. 나는 “장군 명령 덕분에 중공군을 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미국 조야에서 ‘밴 플리트 탄약량’으로 곤경을 당하고 있던 그를 위로할 심산에서였다. 그러자 밴 플리트는 내 심중을 짐작했는지, 우선 씩 웃었다.

    이어 밴 플리트는 “중공군에게는 강하게 나와야 한다. 적의 기선(機先)을 꺾었으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한국군이 중공군에게 계속 밀리면 곤란하다. 한국군 전면에 나타나는 중공군을 강하게 때릴 수 있어야 한다. 이번에는 그 점을 잘 보여준 것 아니냐? 그 뒤로 중공군의 움직임이 없다. 탄약을 많이 썼다고들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 정도 비용으로 이 정도의 효과를 거뒀다면 훌륭하지 않으냐?”고 말했다.

    국군 2군단은 일약 화제의 부대로 떠올랐다. 현대화한 전력을 제대로 갖춘 국군의 출발이라는 점, 미군이 향후 한국전선에서 철수할 경우 한국군의 전력증강을 어떻게 꾀해야 하는가를 보여줬다는 점, 미군 전력 이양의 모범적 케이스란 점 등에서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왔다. 리지웨이 후임으로 도쿄 유엔총사령관으로 부임한 마크 클라크 대장,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영국군 원수와 그리스 육군참모총장 등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도 이때의 경험이 매우 소중했다. 미군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을 어떻게 현대화하느냐에 관한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줬기 때문이었다.

    <정리=유광종, 도서출판 ‘책밭’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