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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세계로 미래로/외국의 인물

진실한 지도자 빌리 부란트

지송나무 2019. 11. 19. 21:28

  

 

 

 

 




진실한 지도자

 빌리 부란트



독일의 옛 수도 본 (bonn)

에는 독일 연방 역사 박물관이 있다. 역사적 사실을 사실과 진실 그대로를 보여주는 너무나 솔직한 박물관이다. 독일의 위대한 점은 진실 앞에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잘못한 사실에 대해 고개 숙여 할 수 있는 나라라는 점이다.




이 박물관을 둘러보는 중에 현대 독일의 부흥과 발전을 이끈 두 지도자를 만난다. 아데나워 전 수상과 빌리 부란트<Willy brant>수상이다.

그 중에서도 빌리 부란트의 잘못한 역사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사진은 “그러지 마시고 일어나세요.”라고 할 만큼 감동을 자아내는 장면이다.


더욱이 산업화 과정에서 공해로 찌든 공기를 마시는 루어(Ruhr)지역의 시민을 향해, 나도 가슴이 쓰려온다고 통곡하면서 부란트는 빈말의 공약이 아닌 대중 앞에 진실 된 약속인 공약을 내건다.
- “루어 지역의 하늘은 반드시 파랗게 되어야 합니다.” 그는 한손을 다시 가슴에 얹고 고통 받는 시민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한다.

“Der Himmel uber Ruhr muf wieder blau werden."


만약 오늘 우리나라에 부란트 같은 진실한 지도자 한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 나라에 더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다.



1,동.서독 통일과정
독일이 다시 하나로 통일되어 민족공동체를 되찾게 했던 기원을 살펴 본다면 무엇보다 1969년 10월에 들어선 빌리 브란트 정부의 동방정책으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당시 브란트 서독 수상은 취임연설에서 "동독의 국제법상 승인을 고려할 수 없으나, 동독의 존재를 독일내의 제2의 국가로 인정하여 동등자격의 기초 위에서 동독정부와 만날 용의가 있다."라는 동방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와같은 서독정부의 제안에 대해 동독정부는 한때 상이한 입장을 취했으나 점차 협상의 동등한 자격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결국 양독관계 정상화발전단계는 이를 기점으로 정상회담까지 진전되는 과정에 진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인 제1차 동서독 정상회담은 70년 3월 19일 동독의 에르프르트에서 서독의 브란트 수상과 동독의 슈토프(Will Stoph) 수상의 만남으로 성사되었다. 하지만 본회담에서 양독정부를 대표하는 쌍방의 수상은 각자 그들의 기본입장을 공표하는데 그쳤다.
이어 70년 5월에 열린 제2차 카셀(Kassel)정상회담에서는 동서독간에 보다 완화된 조건에서 여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고 보다 개선된 협력관계를 이룰 수 있는 조짐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적 희망을 갖게 하였다.
이러한 많은 우여곡절끝에 소련을 비롯한 4대국의 중재로 양독 정부는 71년 11월 18일 10개항으로 되어 있는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이하 '기본조약'이라 지칭)"에 가조인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동.서독은 이 기본조약의 취지에 부응하여 1973년 11월 UN에 동시가입하게 되었고, 이에 근거하여 74년 6월20일 상주대표부를 각각 설치하였다. 이후 동서독간의 관계는 모든 면에서 다각적인 교류와 관계증진에 따라 민족공동체의식을 새롭게 되찾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서독은 본 조약체결의 목적을 잠정적으로 통독을 위한 과도기적 장치로 이해하였고, 이를 위한 동서독간의 인적 물적 교류의 증대 및 자유왕래, 그리고 공동체적 번영을 일차적 선결과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동독은 동서독 기본조약의 본질적 취지를 1민족 2국가체제라는 서독의 입장과 전혀 다른 2민족 2국가라는 사고에서 출발하였고, 이를 근거로 할 때 동독은 자본주의민족과 사회주의민족이라는 이념적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향의 차이는 양국의 교역이 활발해 짐에 따라 더욱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서독정부는 교역초기부터 상호 경제교류를 통하여 얻어지는 단순한 경제적인 실리보다는, 오히려 이를 통하여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정치적 기대효과에 더 치중하여 동서 냉전시대나 긴장완화시대를 가리지 않고 분단된 양국을 서로 결속시켜주는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더욱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서독정부의 기본성향은 독일통일정책(Deutschlandvereinigungspolitik)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정책수단의 한부분으로서 발전되어 왔다. 즉, 통일이 되기까지 서독정부는 동서독 교역을 국내거래로 간주하여 거래되는 상품에 대하여는 비관세 원칙, 부가가치세 경감 및 면제 조치,Swing보증, 그밖에 여러 경로를 통한 금융지원 등 거래지원 시책을 강구하여 동독이 실질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 있게 하여 서독과 밀접한 관계가 계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동독 경제가 COMECOM경제체제에 급속히 융화되지 않는, 즉 소련경제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견실한 경제발전을 이루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고르바쵸프의 등장과 그의 신사고정책(New Thinking)이 추진되면서 이의 경향으로 동구권 전역이 개혁의 물결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89년 10월 바르샤바조약기구(WTO) 회의에서 소련의 [브레즈네프 독트린] 완전폐기 선언은 소련의 군사개입에 대한 위협이 사라지게 하였으며, 이것은 민주화 개혁 추진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 동독은 철의 장막에 속한 동구권국가 가운데서도 경제적 강국인 서독의 존재자체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았으며 어느정도의 독자성을 지속하여 왔기 때문에 사회주의 모델로 평가되기도 한 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동독의 집권자였던 호네커 정권은 폴란드와 헝가리, 심지어 소련의 개혁정책까지도 싸잡아 {정통 사회주의에 대한 배반}이라고 비난하면서 마지막까지 개혁도입 반대를 고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89년 9월 동독국민의 해외로의 집단탈출사태를 야기시켰으며, ’89년 10월 동독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쵸프의 개방에 대한 공개적 촉구는 동독국민의 시위를 촉발시킴으로써 ’71년이래 18년간 동독을 통치해 왔던 강경파 공산당지도자 호네커의 퇴진을 가져온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동서독은 1990년 8월31일 양독간에 맺어진 통합조약(Einigungsvertrag)에 의하여 급기야 급진전 되었고, 1990년 10월3일 정식으로 하나의 국가로 탄생하게 되었다.

2. 통일 과정 에서의 시사점
독일이 통일되기 이전의 상황은 그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던 많은 복합적 요인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는 한반도의 상황과 비교해 본다면 상당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지만 한국민에게 주는 시사점 또한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중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점을 정리해 보면 크게 다음과 같은 두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우선 첫째로 서독 정부의 적극적인 대동독 정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서독은 동독과의 다각적 대화 및 교류.협력정책을 추진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에 입각한 동.서독의 관계는 1969년 10월 빌리 브란트 수상이 들어서면서부터 현격하게 변화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즉, 종전까지 주장해 온 '할슈타인 원칙'의 전면적인 폐기와 '동방정책'의 추진으로부터 동.서독간에 신뢰가 싹트기 시작했다. 특히 1972년 12월21일에 조인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간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은 20년이상에 걸친 동.서독간의 복잡한 법적.정치적 문제를 대체적으로 종결시켰기 때문에 독일역사상 가장 중요한 하나의 문서로서 평가된다. 이후 연방정부 및 서베를린정부와 동독간에는 100여개의 조약.협정.합의.외교문서.성명서가 교환되어 졌다. 이 때문에 양독간에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규정들이 제정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더욱 유의해야 할 점은 이런식 으로나마 이어진 양독간의 협력은 양측주민이 분단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편리함을 제공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서독이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상호 교류를 활성화시켜 온 결과 1989년 한해동안 내독간 물품거래액중 서독에서 동독으로 거래한 총액이 8,103.5백만DM이나 되었으며 동독에서 서독으로 거래한 액수도 7,205.4백만DM이나 되었다. 물론 서독은 898.1백만DM의 흑자를 내었다. 그러나 거래없는 일방적 지출의경우 1989년 한해동안 1,277백만DM이나 서독측이 적자를 보았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동서독간의 내독교역중 적용된 적대적 협력(Antagonistic Cooperation)원칙에 관한 것
이다. 이와 관련하여 서독은 동독에게 많은 경제적 혜택도 주었다.
첫번째 혜택은 유럽으로의 진출에 대한 협력정책으로 동독산 상품에 대한 내독교역 특혜원칙을 공인해 주는 것으로써 관세없는 수출을 가능케 하였고, 두번째 혜택은 사실상의 재정원조로 내독교역 용역비와 동서독 관계정상화를 위한 서독정부의 비용부담이며, 세번째로 경제협력방안의 하나인 스윙(Swing)정책을 적용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각종 형태의 경제교류와 협력중에서 공식
적으로는 상업적 형태를 띠는 거래를 제외한 정부와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순수한 이전지출의 총규모는 1987년을 기준으로 년간 약 30억DM에 달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서독정부는 독일통일이 가시화되자 재정지원을 위한 정책조치의 일환으로 궁극적인 목표를 동서독 주민의 생활조건 동일화 실현에 두었었다.
이처럼 독일이 서독의 주도하에 통일을 할 수 있었던 요인중 우선적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역시 막강한 경제력의 뒷받침과 동.서독 주민간의 신뢰가 조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만일 동.서독 주민간의 신뢰가 쌓이지 않았다면 통일기회가 포착되었더라도 그처럼 급속한 통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음 두번째로 서독정부의 통일을 위한 국제적 환경조성방안 모색을 들 수 있다. 분단당시의 독일은 전쟁도발에 대한 국제적 징계로서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국 영국 불란서 소련의 4대국에 의해 분할점령 되었으며, 그 이후 양극화된 동서냉전체제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통일은 전독총선에 의한 통일정부의 수립과 통일의 선포라는 내부적 절차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었으며, 전승 4대국의 대독 점령권문제의 해결에 토대를 둔 완전한 주권의 회복이 수반되어야 헀었다. 이러한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독정부는 ’90년 5월5일 본에서 제1차[2+4회담](동.서독 및 미.영.불.소)을 시작으로 네차례에 걸쳐 동회담을 주관, 통일독일의 NATO회원국 잔류문제, 전승 4대국의 독일 및 베를린에 대한 권한종식문제 등을 논의토록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90년 9월13일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4차 회담에서 "통독관련 최종 합의에 관한 조약"을 성사 시키시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와같은 여러가지 정황을 역사.정치적으로 볼때 동.서독 통합조약 체결의 의미는 통독과정에서의 형식적 기능을 훨씬 초월한 "세계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일대 전환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세계 역사상 그토록 상반된 체제를 갖고있던 양국이 과도기도 거의 거치지 않고 통합된 전례가 없었기 떄문이다.
한마디로 이 [2+4 회담]의 성사로 인한 조약체결은 독일통일의 외형적 최종 결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