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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전통과 역사/역사의 향기 62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日에 수십차례 요구

// “대마도 반환하라” 이승만, 日에 수십차례 요구 1948년 8월 18일, 대한민국이 건국한 지 3일 뒤 이승만 건국 대통령은 첫 기자회견을 열고 대일 관계에 관해 중대한 발언을 한다.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대마도는 上島及下島(상도와 하도)의 二島(두 섬)로 되어 한일 양국의 중간에 위치한 우리 영토인데 삼백 오십년 전 일본이 불법으로 탈취해 간 것이다." 이 대통령의 이 같은 '대마도 한국 영유권' 발언에 당시 일본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이 대통령은 9월 9일엔 '대마도 속령에 관한 성명'을 발표, 영유권을 확인했다고 뉴데일 리가 보도했다. 뉴데일리에 따르면 다음해인 1949년 1월 8일 연두 회견에서 이 대통령은 다시 한 번 대마도 반환문제를 강력히..

흥선대원군이 기막히게 빼앗은 한양 제일의 정원

흥선대원군이 기막히게 빼앗은 한양 제일의 정원김종길 입력 2018.07.31. 10:21 [김천령의 한국 정원 이야기16] 석파정(상)[오마이뉴스 글:김종길, 편집:최은경] '김흥근은 한양 북문 밖 삼계동에 별업(別業)이 있었다. 서울에서 제일가는 명원(名園)이었다. 흥선대원군이 그것을 팔라고 청했으..

[신동립 잡기노트]찡그린 왕비 사진, 명성황후 맞나

[신동립 잡기노트]찡그린 왕비 사진, 명성황후 맞나 뉴시스 | 신동립 | 입력 2015.10.13. 08:05 명성황후 사진, 정확히는 명성황후 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은 여럿이다. 그 중 122년 전 찍힌 사진의 주인공이 명성황후일 가능성이 제기됐다. 1893년 발간된 프랑스 ‘피가로 일루스트레’ 10월호를 확보한 데 따른 것이다. 기사를 쓴 기자가 명성황후라고 명기한 여성의 사진이 실린 잡지다. 기자는 거빌(A B de Guerville·1869~1913)이다. 미국 시카고 박람회(1893)를 홍보하러 1892년 조선에 왔다. 거빌은 ‘마법의 등불’, 즉 환등기로 1878년 프랑스 파리 박람회 현장과 미국의 도시풍경을 관리들에게 보여줬다. 신문물의 존재가 조정에 소문이 났고, 거빌은 급기야 고종(185..

일본 가미가제(神風) 특공대

가미가제(神風) 특공대 가미(神)는 신, 가제(風)는 바람이란 뜻으로 "신이 일으키는 바람" 이란 뜻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무렵,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연합군이 상륙하고 미국은 자국내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등, 압력을 가하자 일본군은 가미가제 특공대를 편성하여 하와이 진주만 기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조종사들은 천황을 위해 죽는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여 연합군 함대에 동체를 부딪치는 무모한 공격을 감행, 1945년 본토 오키나와를 방어하기 위해 1.024 명(추정)의 특공대원이 가미가제 공격을 감행했다. 여기에는 한국인도 11 명이 특공대원으로 참전하게 된다. 가미가제의 공격으로 30척 이상의 연합군 군함과 350척이 넘는 전함이 피해를 입었으나 주요 목표물인 항공모함은 침몰시키지 못했다. ..

동유럽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소금광산

동유럽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소금광산| 동유럽 여행기. 폴란드편 여행일정 7박9일,체코,폴란드,슬로바키아,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 폴란드편 아우슈비츠수용소와 크라코프,비엘리치카 소금광산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독일어: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는 나치 독일이 유태인을 학살하었던 강제 수용소로, 폴란드의 오시비엥침(독일어 이름: 아우슈비츠)에 있는 옛 수용소이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로마인·옛 소련군 포로·정신질환을 가진 정신장애인·동성애자·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였으며 1945년 기준 약 600만 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폴란드군의 병영이었으며 수용소의 건물들도 수용..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 -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마지막 황실, 대한제국' 사진전. -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일본으로 떠나는 덕혜옹주(1925년3월28일 촬영)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이토 히로쿠니 공작과 조동윤 남작(1919년2월9일 촬영)       삼전에 참배하기 위해 영친왕과 함녕전을 나서는 고종의 모습(1918년1월..

역사속의 요부(妖婦) -동양,서양

역사속의 요부(妖婦) -동양,서양 클레오파트라 프톨레미아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죠,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남동생인 프톨레미아 13세와 결혼을 했죠. 흔히 왕족끼리 자신들의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과 결혼을 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때 로마의 위대한 장군인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이집트에 와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 되기 위해 카이사르와 결혼을 합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프톨레미아 13세와 전쟁을 벌여 결국은 클레오파트라는 여왕이 됩니다. 그후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아들인 케사리온을 낳습니다. 그러나 그후 카이사르가 부르트스 일당에게 암살당한후 카이사르의 심복인 안토니우스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하기 위해 진격하던중 클레오파트라와 만났습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아내였던 옥타비아누스의..

"조선시대에도 원주율 알고 방정식 풀었다"

"조선시대에도 원주율 알고 방정식 풀었다" 기사입력 2015-07-12 06:30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중 기사 관련 부분(자료제공: 국사편찬위원회) 고전번역원·고대 연구팀 보고서…"번역 필요한 산학서 많아"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임금이 승정원에 이르기를, 산학(算學)은 비록 술수라 하겠지만 국가의 긴요한 사무이므로, 역대로 내려오면서 모두 폐하지 않았다.…지금 산학을 예습하게 하려면 그 방책이 어디에 있는지 의논하여 아뢰라." '세종실록' 중 세종 25년 11월 17일 쓰인 기사 '산학을 예습하게 할 방책을 세우려 집현전으로 하여금 역대 산학의 법을 상고하게 하다'의 일부분이다. 이 기사는 세종대왕이 얼마나 산학, 즉 지금의 수학을 중히 여겼는지 짐작게 한다. 이처럼 세종대 융성했던 ..

조선 국왕들의 재미있는 일화들

☞조선 국왕들의 재미있는 일화들☜ 태 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 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 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겨..

이순신 1593년 편지 "식량 없어 백성 걱정돼"

이순신 1593년 편지 "식량 없어 백성 걱정돼" 순찰사 김성일에 보내…노승석 여해고전연구소장 발굴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전년부터 경상도 연안에 투입돼 왜구를 여러 차례 패퇴시킨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이순신이 2~3월 웅포(熊浦, 지금의 경남 진해)에서 7차례나 큰 승리를 거둔 이후였다. 당시 그 지역 군비태세를 관할하던 경상우도 순찰사 김성일은 이순신에게 '화공을 사용해 왜구를 소탕하라'고 요청하며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이에 이순신은 4월1일 답장을 보내 수군 지휘관으로서 자신의 판단을 정중히 밝힌다. '애초 생각은 진해가 부산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흉악한 적들이 요새를 지키고 나오지 않는데, 명나라 군사가 남하하는 날 수군을 거느리고 곧장 부산으로 가면 필시 후방을 돌봐야 하는 걱정이 들..

경기도 연천군에 원조한류 '기황후' 묘 있다

경기도 연천군에 원조한류 '기황후' 묘 있다 연천/아시아투데이 이대희 기자 = 경기도 연천군이 최근 인기를 얻고있는 역사 드라마 ‘기황후’의 영향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있다. 바로 기황후의 묘가 연천군에 있다고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1일 연천군에 따르면 고려인으로 중국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간 후 순제의 황후가 된 기황후(중국명 완췌후두·完者忽都)가 연천읍 상리 산 145번지 야산에 묻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묘지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조선 영조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묘와 석인, 석양, 석물 등이 있다’고 적혀있다. 또, 1899년 간행된 연천현읍지는 ‘황후총은 동쪽 20리 재궁동(齋宮洞)에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길 원 순제 기황후가 고국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