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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지친 水魚之親 TISTORY

■ 마음의 양식/소설 이야기

중국사 요약

지송나무 2015. 6. 26. 16:12

중국사 요약

 

 3 황 시대 : 중국 대륙을 다스렸다는 3명의 신격화된 군주

사기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는 독특하게도 천황, 지황, 인황(혹은 태황)을 삼황이라고 주장

 

수인씨(燧人氏) : 백호통 등에 기록된 중국의 전설에 따르면, 사람들이 음식을 날 것으로 먹는 바람에 병에 걸리는 일이 잦던 시절, 문득 어떤 성인이 나타나더니 나무를 부비고 부싯돌을 때려서 불을 피우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로써 사람들이 음식을 익혀 먹게 되니 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후 사람들은 그의 은혜에 감사하며, '불을 얻어 낸 사람'이라는 뜻으로 수인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와 같다른 기록에는 불을 발견한 사람이 복희씨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  백호통 : 중국 후한() 반고() 편찬한 경서().   후한 장제() 백호() 학자들 모으고 오경() 해석 차이 논한 내용 정리한 이다.

 

복희(伏犧氏. 풍이 족, 풍 씨; BC; 3,528 ~ 3,413년) : 복희씨에 대한 전설은 지역과 기록에 따라 각기 다르지만, 가장 일반적인 형태는 상반신은 사람이며 하반신은 뱀 또는 용의 모습을 한 성인이라는 것이다.   복희는 포희 등 다양하게 표기되었다.    복희씨는 포희로도 불렸는데, 그것은 '희생물을 부엌에 채운다' 또는 날고기를 익힌다'는 뜻이라고 한다.   복희씨는 자연을 살펴 건(하늘)...곤(땅)...감(물)...리(물)...간(산)...진(천둥)...손(바람)...태(늪)로 이루어진 팔괘를 만들었는데, 이로써 사람들은 점을 쳐서 신의 의지를 알아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게 되었다고 한다.    또 복희씨는 사람들에게 노끈을 짠 다음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고 전한다.    그림에서는 부인인 여와(복희씨의 여동생)와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신농씨(神農氏. 강[姜]씨; BC;3,218~3,078년) : 백호통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먼 예날 사람들은 주로 고기를 잡아먹었으므로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는데, 어느 날 소머리에 사람 몸을 한 성 나타나더니 사람들에게 밭 갈고 곡식 심는 법을 가르쳐 주어 사람들의 음식 걱정을 해결해 주었다.    이에 사람들이 그 성인을 신농이라고 높여 불렀다고 한다.   신농씨는 또 태양이 충분히 빛나게 하여 사람들의 농사를 도와주었으므로 '태양의 신'이라는 뜻에서 염제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의약의 신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중국 사천성 지역의 전설에 따르면,  '신농씨가 사람들을 위해 각종 약초를 일일이 맛보다가 단장초라는 독초를 먹는 바람에 창자가 끊어지고 썩어서 죽었다고 한다'.

 

     3황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통일된 의견이 없습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이나 백호통의(白虎通義)에서는 삼황을 수인(燧人 : 최초로 불을 발견했다는 인물),  복희(伏羲),  신농(神農 : 염제라고도 불리우며 처음으로 농사법을 발견했다는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고요,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수인대신 황제(黃帝)를,  통감외기(通鑒外紀)에서는 수인대신 공공(共工 : 물의 신으로 염제의 손자)을 넣기도 합니다.

 

 하옇튼 3황신과 인간의 중간적 존재로서, 자신의 초인간적인 지혜와 능력으로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켰다고 합니다.

 

오제 시대 : 고대 중국의 다섯 성군

 

황제헌원[軒遠]; 희[姬]씨; BC;2,692~2,592년 : 그 뒤를 이은 황제는 염제 신농씨와 싸워 이겼다는 하늘나라 중앙의 상제이다.    황제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황제를 낳아 희수라는 물가에 키웠다고 한다.    황제는 4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어서 사방을 살폈으며, 신들의 나라의 최고 통치자 그리고 신들의 싸움을 중재한 재판관으로 유명하다.    황제는 발명도 많이 했는데, 수레...솥...시루...축구와 집 짓는 법을 고안했다고 한다.    그중 특히 수레를 발명했다고 하여 황제를 헌원씨라고도 부른다.   황제라고도 하며, 서방 주나라에서 섬기던 상제로 전한다.

 

전욱고양 : 황제의 손자(사기) 혹은 증손자(산해경)로서, 황제를 이어 하늘나라 중앙 상제의 지위에 오른 뒤 하늘과 땅의 통로를 끊어버림으로써 신의 세계와 인간세계를 보다 분명하게 구별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각종 재난 속에서 고통 받게 되었다. 또한 전욱은 질서와 예법을 중시했는데, 여자를 경시했기 때문에, 여자가 길에서 남자를 만나면 얼른 길을 양보해야 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전욱은 음악을 좋하했으며 죽은 뒤에는 반은 사람, 반은 물고기의 모습으로 부활했다고 한다.

 

제곡고신 : 황제의 자손으로 인간세계를 다스렸다는 반인반신의 존재이다.    음악을 무척 좋아했으며, 하늘의 상제인 제준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전하기도 한다.   제준은 동방 은나라에서 섬기던 상제이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제곡에게는 4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첫째 부인은 후직을 낳았고, 째부인은 을 낳았으며, 셋째 부인은 그리고 넷째 부인은 제지를 낳았다고 한다.   여기후직은 주나라의 시조이며, 설은 은나라의 시조이다.

 

요임금 : 제곡고신의 셋째 부인의 아들로서 인간세계를 다스린 성인이며, 제요라고 부르기도 한다.    허나 한족들의 기록이란 게 믿을만한 게 거의 없으니...   하옇튼 그는 엉성한 초가에 살면서 거친 옷을 입고 흙으로 빚은 그릇에 거친 밥과 야채만 담아 먹었을 정도로 근검 소박하고 백성들을 사랑한 매우 모범적인 왕으로 전한다.   요는 훌륭한 신하를 많이 두었는데, 사위인 순(유호씨 아들)은 교육을 담당하는 였고, 설(배다른 형제)은 구사를 담당하는 사마였으며, 후직(배다른 형제)은 농사, 요는 법을 담당했다고 한다.   아들인 잔주의 성품이 (지 애비를 닮아서인지) 교만하고 포악하자, 백성들에게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왕위를 사위인 순에게 물려주었다고 한다.

 

순임금 : 고수(유호씨)라는 눈먼 사람이 봉황의 꿈을 꾸고 낳은 아들로서 눈의 눈동자가 각각 두 개씩이었다고 하여 중화라고도 부른다.    고수는 순을 낳은 지 얼마 안가 아내를 잃고, 새 아내를 맞아 다시 상이라는 아들과 과수라는 딸을 낳았는데, 그는 성질이 고약한 후처와 후처의 자식만을 예뻐하여 순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으나, 순은 끝까지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를 지켰다(???이 말은 한족들이 쓴 기록이고, 한민족의 기록에는 부친의 말을 듣지 않고 불량한 요임금의 자기 딸을 이용한 유혹에 넘어가 환부(제사장)의 신분을 잃은 불효자로 기록)고 한다.    순은 농사와 고기잡이 그리고 그릇 만들기를 차례로 하는 동안 크나큰 덕행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킨 공이 인정되어 요임금의 두 딸 아황...여영과 혼인(요임금이 두 딸로 미혹하여 순이 환부(제사장)의 자격을 잃게 하였다 함) 했으며, 요임금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수십년간 다스리다가 상균을 비롯한 9명의 아들 대신 홍수를 잘 다스려 큰 공을 세운 신하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 웃기는 소리다.  순은 우의 아비 곤이 치수를 잘못하였다 하여 죽였고, 곤의 아들인 우는 그 앙갚을 하기 위해 추격하여 순을 죽여 버렸다고 부도지는 증거하고 있다.

 

     부도지 기록은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의 무리 (禹)가 에게 아버지(=우의 아버지=순이 죽임)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순임금이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부도지가 맞겠습니까?   중국 한족들의 기록이 맞겠습니까? 

 

부도지 기록 참조

第十八章  

     이에 임검씨가 그것을 심히 걱정하여, 유인씨(有因氏)의 후손 유호씨(有戶氏)의 부자 하여금 환부(鰥夫)권사(權士) 100여인을 인솔하고 가서 그를 깨우치도록 하였다.   요가 그들을 맞아, 명령에 복종을 하고, 공순하게 대접하여 하빈(河濱)에서 살게 하였다.   유호씨가 묵묵히 그 상황을 관찰하고, 스스로 사람들을 가르치며, 여러 번 그 거처를 옮겼다.   이보다 먼저 유호씨가 부도에 있을 때에 칡을 먹고 오미를 먹지 아니하였으므로, 키는 열 자요, 눈에서는 불빛이 번쩍였다.   임검씨보다 나이를 100여살이나 더 먹었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業)을 이어, 임검씨를 도와, 도를 행하고, 사람들을 가르쳤다.

 

    이에 이르러 사자(使者)가 되어, 완미(頑迷)한 세상을 구제하니, 그가 하는 일에 어려움이 많았다.   때에 요가 유호씨의 아들 유순(有舜)사람됨을 보고, 마음 가운데 딴 뜻이 있어, 일을 맡기고, 도와 주며, 두 딸로 유혹하니, 순이 곧 미혹하여졌다.   유순이 일찍이 부도의 법을 행하는 환부가 되어, 마침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여, 두 딸을 밀취(密娶)하고, 어리석게도 요에 붙어 협조하였다.

 

第十九章

     이 때 유호씨가 수시로 경계를 하였으나, 은 예, 예, 하고 대답만 하고는 고치지 않았다.   그는 끝내 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하였다.   유호씨가 마침내 참지 못하여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는 몸을 둘 땅이 없으므로, 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하였다.

 

    유호씨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 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으므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을 가리어, 수사(數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세(人世)가 곤고(困苦)하여 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지친(至親)이라도 용서할 수가 없다 하고 곧 차자(次子) 유상(有象)에게 명하여 권사(勸士)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하였다. 

 

     요는 유폐(幽閉) 중에서 죽고, 순은 창오(蒼梧)의 들에 도망하여,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의 무리 (禹)가 에게 아버지(=우의 아버지=순이 죽임)를 죽인 원한이 있으므로 이에 이르러, 그를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가 곧 정명(正命)으로 입공(立功)한다고 말하고, 의 군사를 위로하고 돌아가므로 유호씨가 물러나서 우의 소행을 관찰하니, 이 때에 우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와 창을 보수하고 유호씨에게 항거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였다.

 

 

    *부도지의 기록을 볼 때, 반역자불효자불한당이다.   이렇게 시작된 한족의 역사는 서로 믿지 못하는 형국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하거나 치고 받으면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동이(흉노족, 선비족, 거란족, 만주족, 몽골족)의 영향력에 의해 합쳐졌다 뿌셔졌다를 반복하였다.   그러다 보니 한족 자체왕조가 100년을 넘긴 사례가 별로 없다.   거의 몇 십년도 유지 못하고 왕조가 없어지기가 일쑤였다.   한 예로 고구려왕조 하나가 존속되는 기간 동안 중원의 한족왕조들은 40개 가까이 생겼다 없어졌다 했다.   중원의 역사를 보면 1차로 동이의 선비족 왕조인 북위가 북방지역을 통일했고, 2차로 동이족의 냄새가 짙은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했으나 13년 째에 멍들기 시작하여 15년 만에 박살 났고, 3차로 동이의 몽골제국에 의하여 중원의 남북이 일망타진되었다.   그야말로 중원의 역사 중에서 한족이 한 게 거의 없다.   그리고 명나라가 조공을 받는 약간의 시절을 만들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간일 뿐이고, 그래도 내노라 하는 중원의 왕조인 수.당은 동이의 선비족왕조이고,  요나라는 동이의 거란족왕조이고,  .은 동이의 만주족왕조이며, 원나라는 동이의 몽골족왕조이다.   한족의 왕조라야 .한.송.명 정도인데, 진나라는 한족 왕조라기에는 머하고 한나라는 흉노왕조에게 송나라는 동이의 요.금.몽골 왕조에 조공을 바치던 신세정도였고 겨유 명나라 때에 조공을 받아본 적이 있는 정도이다.   그것도 망할노메 이성계 덕분에...   이것이 한족왕조의 역사현실이다.   고조선의 후예들이요 동이족의 후손들인 한민족 앞에 뭐 하나 제대로 내세울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오늘의 중국의 입지에서 보면 얼마나 열등의식을 느끼며 고통스럽겠는가!   그래서 티벳과 몽골과 한국에 역사적 행패와 강도와 사기질을 광란스럽게 해대는 것이다.

 

중국 시조라 하는 3황5제의 내용을 보면 제대로 된 인간이 하나도 없다.   다 이상하다.

하옇튼 5제는 정치...경제...사회 각 부문에 걸쳐 각종 문물을 마련하고 발전시켰다고 합니다.

 

하 . 은 .  주  시대 

 

하나라 [하나라 B.C 2100~1800(추정),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

     중국 역사상 최초의 국가는 하왕조라고 합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왕은 있었으나, 국가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단계였다고 합니다.    바로 3황 5제의 시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것이 하왕조라는 것이지요.   하왕조를 처음 연 사람은 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순임금의 신하였는데, 홍수를 잘 처리해 신임을 얻고는 왕위를 이어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임금은 신하들 중 어진 사람을 뽑아서 왕위를 물려줌으로써 이후 5백년 가까이 의 자손이 대대로 왕위를 계승하게 만들었습니다.    왕조를 연 것이지요. -> 이 부분의 기록은 부도지의 내용과 다르다.  의 아비 이 치수를 실패했다 하여 죽였고 후에 는 그 앙갚음으로 을 추격하여 죽였다고 되어 있다. (부도지 19장)   하왕조는 서기전 1700년을 전후한 무렵에 동쪽에서 일어난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의 공격을 받고 멸망하게 됩니다.

 

은나라 [(殷)나라, BC; 1,766년~BC; 1,122년---[644년]

     중국의 옛 문헌에 동이족의 국가로 소개되기도 한 은나라는 원래 이라는 국호를 사용습니다.   또한 그것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은나라는 도시국가적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지요.   이라는 명칭은 그 뒤를 이은 주왕조 때 붙여진 것입니다.   은나라의 수도는 몇 번에 걸쳐 바귀었으나 멸망하기 전 3백년 가까운 기간은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의 소둔촌 일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20세기초에 그곳을 발굴하자 갑골문자를 비롯해 각종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그로 이해 소둔촌 일대를 은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중국사에서 은나라 이전의 역사를 그대로 인정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왕조가 존재했다는 시기의 대부분은 신석기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왕조와 관련된 듯한 유적에서 정치체의 출현을 암시하는 요소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확정지어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은나라의 경우는 다릅니다.    그들은 대단히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갖춤으로써 국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허를 조사하는 과정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도시국가적 성격이 강한 은나라는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가부장제 사회였으며, 은나라의 왕은 제사장적 성격이 강했다고 합니다.   신권정치를 한 것이지요.    서기전 1100년경에 이르러 은나라는 봉건제 하에서 자주권을 쟁취하려는 부녀 세력들의 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서방을 제패한 주 왕실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은왕조의 성씨는 금씨(김씨)였으나 주나라에 멸망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무씨(굳셀 무武)씨로 바꾸어 살다가 먼 훗날 다시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면서 본래 성씨인 금씨(김씨)라 칭하였다.   가야, 신라, 금왕조, 청왕조  등이 그랬다.   김수로왕은 무청예다.

 

주나라 [(周)나라,BC; 1,122년~BC; 841년----[281년]

     주왕조는 처음 약 300년간을 지금의 섬서성 위수지역에 있던 호경에 도읍했으나, 서기전 770년에 북방족 견융의 침입을 받아 국가 멸망의 위기에 봉착하자 도읍을 하남성의 낙양으로 옮겼는데, 호경에 도읍하던 시기를 서주시대(전)라 하고, 낙양으로 천도한 후 약 550년간을 동주시대(후)하고 합니다.    왕실의 권위가 실추된 동주시대는 다시 춘추시대전국시대로 구분됩니다.    춘추...전국시대와 통일왕조 존왕 양이의 기치 아래 제후들이 각자 패권을 추구하던 춘추시대는 진...제...진...초의 4강 구도로 진행되면서 약육강식에 의한 정복전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춘추 초기에 170여 개국에 달하던 제후국춘추 말기에 이르자 10여개국 정도로 정리되었고, 진(진시황의 진(秦))이 자체 분열을 일으키면서 시작된 전국시대에는 조...한...위...제...진(사마씨의 진(晉))...초...연 등 7국으로 압축 되었습니다.

 

     (BC. 3세기 경부터 흉노족(동이)이 기록에 등장하고 AD. 1세기 초부터 선비족(동이)이 등장하여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를 그야말로 어질어질하게 역어간다.   이어서 여진족(말갈), 만주족, 일본족까지 등장하여 동아시아는 그야말로 뒤죽박죽의 시대를 경험한다.   이성계는 여진족 출신이다.   사실 만리장성이란 한족왕조와 동이무리들과의 경계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런 어질어질한 시대를 몽고의 징기스칸이 정리한 후에 동아시아의 근대 현대 역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열국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사이에 중국의 정치...경제...문화는 급속히 변화했습니다.    각자 최종 승자가 되기 위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면서 실리에 입각한 제도개혁이 이루어 졌으며, 영토를 비롯한 정치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합종...연횡과 같은 외교정책, 관료제에 입각한 군현지배체제, 제자백가의 출현 등이 모두 이 무렵의 특징적인 요소들입니다.    전국시대는 상앙의 변법이래 꾸준히 국력을 키워온 진나라가 나머지 6개국을 차례차례 멸망시킴으로써 서기전 221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당시 진나라의 왕은 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통일하자마자 왕이라는 칭호를 버리고 대신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자신을 첫 황제, 곧 시황제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또한 법가인 이가의 건의를 받아들여 기존의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눈 다음 중앙집권적 관료정치를 시행했으며, 도량형과 화폐...문자를 통일하고 사상조차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정치...제도 개혁은 너무나 급격해 불만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불거져 나왔습니다.    게다가 만리장성 축조 등 대규모 토목공사가 빈번히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이 매우 커졌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전 210년에 시황제가 죽자 정치 혼란마저 더해져 서기전 206년에는 결국 진나라가 멸망하고, 반란세력을 주도하던 유방과 항우의 패권다툼이 시작었습니다.    (이 전쟁도 동이족들이 시끄러운 중원을 잠재우려고 더 다루기 쉬운 유방을 도와 사나운 항우를 망하게 하여 끝냈다고 한다.   어느 기록에는 유방을 도운 맥족의 기마부대가 왕건의 병사들이라는 내용도 있다.)

 

     거대한 중국 - 농민 출신인 유방(한고조)은 귀족계급을 이끌던 항우의 군대를 격파하고 서기전 202년에 한나라(전한)세우니, 이 사람을 고조하고 합니다.    제국을 형성한 한나라는 진나라의 제도를 대부분 계승했으나 급하게 서두르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군현제의 경우에도 그것을 그대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의 봉건제적 요소를 덧붙임으로서 군국제도라고 하는 새로운 제도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는 과정에서 한나라는 실리를 추구하는 법가 위주의 정치에서 벗어나 유교의 통치이념을 채용하는 등 새로운 가치관과 관료제도 구축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무제에는 주변지역 정벌에 나서 남쪽으로 베트남 북부지역에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4군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의 정치 범위를 확대시켰습니다.

 

     (한무제의 재위기간동안, 흉노를 공격한 이외에, 서남이, 동월, 남월, 조선, 진국등 이웃나라들이 하나도 예외없이 한나라군대의 공격을 받는다.    기실 한무제에 있어서, 이들 국가와 전쟁을 일으킨 목적은 이처럼 먼 나라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가 수십만 병사의 생명과 계속 비어가는 국고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진행한 것은 목적이 단지 하나이다.   단지 이웃나라에게 자신의 강함을 보여주는 것(객기를 부렸다는 뜻)이다.    세상사람들에게 자신의 웅재대략을 보여주는 것(저 잘났다고 자랑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또라이 짓을 미친듯이 했다는 뜻이다.)

 

      한무제가 고조선의 마지막 국가인 위만조선을 준왕 때 망하게 하였고, 또 흉노족을 공격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하였다.   어찌보면 중국 한족 정권에게 가장 심하게 동이족들이 당한 것이 이 때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중국 한족들이 아주 통쾌하게 생각하고 한사군이 어쩌고 저쩌고 하며 한민족을 무슨 국가 형태도 갖추지 못한 미개한 부족들이니 중국의 변방 유민들이니 하며 사기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쟁미치광이치고 나중에 편하게 지내는 놈이나 제대로 죽은 놈이 하나도 없다.   한무제도 40여년 만에 선조가 물려준 재물을 미친전쟁놀이 하느라 다 탕진하고 비참하게 망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중국 한족의 내세울만한 왕조라야 진시황정권과 한무제정권인데 두 왕이 다 전쟁미치광이에 또라이다.   잘한 것은 사람 죽이는 전쟁만 남보다 뛰어나게 잘했을뿐 王道 人道에 관하여는 둘 다 완전 꽝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요임금과 순임금도 마찬가지이다.   결과는 진시황의 나라는 장남이 말아 먹었고, 한무제의 나라는 신하(왕망)가 잡아먹었다.   한무제는 이소군과 같은 허풍쟁이 말을 철석 같이 믿는가 하면, 태자의 친모인 왕비를 죽이고, 난다의 헛소리를 믿고 불사약을 얻으려고 신선을 찾아다니다가 실망도 하고, 한번은 한무제를 저주하는 무당의 목우(죽으라고 저주하는 물건)  때문에 궁 안에서 난리가 났었는데 궁 안을 뒤져보니 태자의 동궁에서 목우를 가장 많이 찾아냈다고 한다.   한무제가 죽으라고 자기 태자가 제일 열심히 저주했다는 뜻이다.   한무제의 말년은 비참했다.

 

     그러나 애제 때인 서기전 1년경 신하인 왕망이 길권을 차지하더니, 급기야 서기 8년에는 스스로 왕위에 올라 황제를 칭하고 국명을 고쳐 이라 했습니다.    서기 14년 익구에서 일어나 반란과 북방의 대기근을 계기로 곳곳에서 반란이 줄을 이었고, 그 결과 왕망은 서기 23년에 전사했습니다.    홍란을 수습한 것은 유수라는 호족이었습니다.    그는 한나라의 왕족임을 내세우며 서기 25년에 낙양에서 한나라를 재건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후한의 첫 임금 광무제입니다.    국호에서도 드러나듯이 광무제가 세운 후한은 전한시대의 정치기구와 제고응 거의 그대로 답습했습니다.    다만, 징병제도를 폐지하고 전문적인 병사제를 두는 등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후한에서는 유교를 더욱 중시해 통치의 원리로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후한은 건국된지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외척과 환관의 득세로 부정부채가 만하고, 그로 인해 크고 작은 반란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서기 184년에 폭발한 농민봉기, 곧 황건적의 난등 후한 왕도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실권 없이 명백한 유지하던 후한 왕실은 결국 서기 220년에 마지막 왕인 헌제가 조조의 아들 조비에게 선양함으로써 종막을 고했습니다.    조비는 국호를 로 고치고 낙양에서 즉위했다고 합니다.

 

이 근방의 역사는 만인이 다 아는 삼국지에 소개되어 있지요.

 

그리고 시안은 주나라당부터 진나라당 · 한나라당 · 당나라당에 이르기까지 13개 왕조 1,000여년간 도읍지

 

재밌게 요약 설명한 중국역사의 실상

강태수님의 리플에서 

     알싸 같은 짱골라 새끼가 전에 이런 말을 하더군요.   발해의 포장도로는 당나라의 것을 베꼈다고.   그럼 수,당 이전부터 존재한 고구려의 4차선, 8차선 도로는 어떻게 설명하려고 그러는지...  고구려는 마차중심사회였습니다.   8차선 포장도로도 있었으며 모든 교통이 원활을 요구했죠.   그리고 고구려의 야금기술이 뛰어나서 개마무사와 같은 부대가 있었던 것이며 복합궁 같은 특수한 활도 사용할 정도로 무기분야에 있어서 그당시에 가장 선진국가였죠.

     성곽도 들여쌓기공법이나 정문입구를 휘어지게 하여 삼면공격하도록 한 것이나 성벽 사이사이에 툭 튀어나온 성의 구조로 적에게 는 공격의 어려움을 아군에게는 공격의 이로움을 살릴정도로 뛰어났죠.   고구려때의 천문기록 등을 봤을 때 그들의 과학의 우수성도 알 수 있고... kbs 역사 스페셜 시리즈에서 방영했던 부분들 중 일부의 내용입니다.

     고구려는 농경과 유목을 함께 하는 반농반목의 기마민족국가죠.   배달과 쥬신 이래로 그 후예들은 유목민족도 있고 농경민족도 있고, 부여,고구려 등의 수많은 반농반목민족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을 제대로 보려면 그 전체를 보고 분석해들어가야지.   하나만 보고 그것이 모두를 대변한다는 오류는 더 이상 안 했으면 합니다

     고구려는 농경의 중요함도 알았지만 기마민족의 특성상 이동의 중요성 역시 알았죠.   거기다 토지가 비옥하지 못한 관계로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각국간의 교류를 중요시했죠.   그리고 전쟁시 빠른 군대동원을 위해서도 도로의 확충과 보급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김치가 지금 쥐나공장에서 만들어진다고 그게 짱골라 것인가요?   서양이 개발한 자동차가 쥐나공장에서 만들어진다고 그 원조가 짱골 라 것인가요?   짱골라들의 한, 송, 명 이전과 이후의 수많은 배달쥬신왕조들이 이룬 것을 그냥 냅다 바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죠.    자신의 조상도 빼앗기는 것을 눈뜨고 본다는 것 역시 한심하죠.

 

아래의 어느 댓글에 이런 말이 있어 다시 써 봅니다.

 

     "짱골라 의 왕조는 한, 송, 명뿐이다.   그 시대에 한해서의 발명이나 발견 등의 업적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외의 수많은 우리 조상 배달쥬신왕조들이 이룬 발견이나 발명 등의 업적은 우리 민족의 것이다."

     "얼마나 못 났으면 남의 조상도 지 조상이라고 우기는 짱골라가 굉장히 합리적으로 보이는가....  짱골라들이 역사조작한 것은 이미 2000년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는 절대 마음 을 놓아서는 안 될 상황에 처해 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결국 멸망으로 나아갈 뿐이지.   우리의 어리석은 과거의 역사가 잘 증명 해주지."

     배달, 쥬신, 은, 주, 춘추전국, 요, 금, 원, 청, 고구려, 발해, 백제, 왜열도 등 수많은 우리의 핏줄을 망각해 자멸할뿐이야.    짱골라의 왕조는 한, 송, 명 뿐이죠.   한나라는 오랫동안 배달쥬신일파인 흉노북부여에 공주나 수많은 재물을 조공을 바치던 속국이었고,   송나라도 역시 배달쥬신일파인 거란의 요나라, 말갈(여진,만주)의 금나라몽골에 조공을 바치던 속국이었죠.   그 후에 몽골의 에게 완전 복속되죠.   짱골라가 제대로 조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기껏 명나라뿐이죠.   물론 배달쥬신일파 후금(청)에 복속되지만 짱골라들은 배달쥬신족들을 한나라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북적, 동이, 서융, 남만 등으로 오랑캐로 몰아부치고 역사를 조작하기 시 작하죠.   남의 조상도 빼앗아가면서...   절대 우리가 스스로의 이름을 더럽히고 같은 핏줄을 나눈게 아니야.

     수와 당나라 역시 배달쥬신일파인 선비족이다.   몽골선비족흉노족을 자신들의 종족으로 보고 있지.   다시말해 몽골. 선비족. 흉노족. 거란족. 만주족(여진족.말갈족)은 우리와 같은 동이족이야.    금. 원. 요. 청 뿐 아니라 수. 당도 배달쥬신족이 세웠지.

     짱골라는 자신들 피지배 속국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나라때부터 역사 조작, 날조, 삭제 등을 해 온거야.   그리고 짱골라는 타국을 침략할 때 가장 먼저 한 일이 그 나라의 사고에 있는 역사서나 수많은 저서들을 약탈하거나 불태웠다.    지들이 저질러 놓고 그것을 믿으라 하는 심보는 뭔데.   지들이 없애놓고 니네는 원래 그런 것 없었다 하면 말이 되냐.   동북공정, 서북공정, 서남공정하는 짱골라가 합리적으로 보인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무국적인 이유는, 유럽과 같은, 제대로 역사청산이 안된 한국에서 알싸 같은 매국노들이 득실거리기 때문이죠.   이들 때문에 한국 곳곳이 부정부패로 끊임없이 악순환을 거듭할 뿐이죠.   진정으로 한국이 새롭게 탈바꿈해서 나라를 위해 애쓰셨고 애쓰고 계신 많은 분들이 정당한 권리와 행복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알싸 같은 짱골라 쪽바리 계통을 뿌리뽑는 것이 꼭 필요하죠.

     더구나 사마천이 편찬한 역사(사기史記25권)는 그가 태어나기전의 거의 1천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당시 까지 제대로 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마천이 그 많은 사서를 편찬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사마천이 서술한 사서들은 거의 꾸며낸 쥐나족 위주의 재미있는 이야기 책 수준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배달쥬신 선조들이 남긴 천문기록들을 거꾸로 역추적하면 그 영토나 수도를 알 수 있어.    천문기록은 날조하려해도 할 수 없거든요.

 

뭐 다 맞는 말 아닌가요?

이러다가 입장 바뀌면 중국 한족들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지

앞으로 남아봤자 한족의 입지가 박살나 없어질 시기가 넉넉 잡아 30년...

참고로 마지막 발악을 하는 일본은 10여년, 미국은 20여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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